(618년—907년)
심연(心緣)
【정견망】

건축 편
당조의 휘황한 건축 성취는 도시, 궁전, 사찰, 능묘(陵墓), 민가, 원림(園林), 공방, 점포 등 다방면에 체현되어 있다. 당대(唐代) 제왕의 능묘는 주로 관중 일대에 위치하며 규모가 매우 거대하고 건릉(乾陵 고종과 측천무후의 능)을 대표로 하는데, 대부분 산에 의지하여 능을 만들어 따로 봉분을 만들지 않았다. 민가, 공방, 점포는 이미 실물이 남아 있지 않아 단지 회화 속에서 일부 단편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도시 배치와 궁전은 앞서 제경(帝京) 편에서 이미 묘사했다.
대당(大唐) 건축의 특징
초당(初唐) 건축은 질박하고 웅혼하며 확 트인 풍모를 지니고 있었으니, 청대의 유명한 학자 고염무는 가로되 “내가 천하에서 옛 당의 치소였던 주(州)들을 보니, 그 성곽은 반드시 모두 넓고 크며 거리와 도로는 반드시 모두 바르고 곧았다. 관사로서 옛날 당이 처음 창건한 것은 그 터가 반드시 모두 웅장했다. 송대 이후에 설치된 것은 시기가 최근에 가까울수록 제도가 누추해졌다”고 했다.
당 장안성은 청조에 외성을 포함한 북경성보다도 3분의 1이나 더 컸으며, 장안 태극궁(太極宮)의 면적은 4제곱킬로미터에 달해 북경 자금성의 6배였다. 대명궁(大明宮) 내 인덕전(麟德殿)만 해도 총 4개의 전각으로 조합되어 차지하는 면적만 5,000여 제곱미터로 각 조대의 건축이 감히 미치지 못했다.
정밀한 목조 구조
당초(唐初)의 목조 가구 건축은 모두 매우 간결하고 명확하여 어떠한 불필요한 부재도 없었다. 기둥, 들보, 공포(鬥拱), 앙(昻) 등이 기본 부재였으며 각 부재의 치수는 정확한 비율을 지니고 있었다. 전당, 누각, 각루(角樓), 문, 궐, 회랑, 탑, 대, 다리 등 개별 건축 단체를 포함하여, 사용된 주요 건축 부품은 거의 전부 목재였으며, 수많은 전당은 심지어 단 하나의 철못이나 쐐기조차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 견고한 구조와 우아한 조형은 탄성을 자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무측천이 일찍이 낙양에 명당(明堂)을 두 번 건립했는데 높이가 290척, 가로와 세로각 각각 300척에 달했고 내부에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 거목이 위아래를 관통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목재를 중심기둥으로 삼아 모든 하중을 받는 목조 부재를 연결함으로써 건축물의 전체적인 견고함을 보장했음을 설명한다. 애석하게도 1,0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 당대의 원래 건축은 거의 훼손되어 없어졌으므로, 우리는 단지 겨우 남아 있는 몇 좌의 당탑(唐塔), 하나의 작은 사찰, 그리고 회화 속에서 그 오묘함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도화견문지(圖畫見聞志)》에서 당대 건축화의 자취를 논할 때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가령 한전(漢殿), 오전(吳殿), 양주(梁柱), 차수(叉手), 체목(替木), 숙주(熟柱), 타봉(駝峰), 방경(方莖), 합도(頜道), 포간(抱間), 앙두(昂頭), 나화나만(羅花羅幔), 암제작막(暗制綽幕), 호손두(猢猻頭), 호박방(琥珀枋), 귀두(龜頭), 호좌(虎座), 비첨(飛簷), 박수(樸水), 박풍(膊風), 화폐(化廢), 현어(懸魚), 약초(惹草), 당구(當鉤), 곡척(曲脊) 등의 부류를 알지 못한다면, 무엇을 의지하여 가옥과 목구조를 그리겠는가?“
이 수많은 건축 부재 명칭은 건축 화가가 창작에 대해 지닌 충실한 태도를 체현하며, 현존하는 당대 건축화가 신뢰할 만함을 설명해 주니, 성당 시기에 개착된 300여 굴의 돈황벽화야말로 가장 진실하고 보배로운 원천이다.
아름답고 화려한 장식과 경관(景觀)
성당(盛唐) 중엽에 이르러 정자(亭), 대(台), 누(樓), 각(閣)의 조형은 날로 화려하고 정교해졌으며, 채색화, 조각, 벽화, 조소 같은 부수적 예술 또한 전무후무한 경지에 이르렀다. 대기(台基), 섬돌, 구란(勾檻), 보량(屋梁), 주방(柱枋), 문창(門窗), 조정(藻井)과 천장 위에는 대개 둥근 꽃무늬와 비단 무늬가 그려져 있었는데, 보상화(寶相花), 석류화(石榴花), 연꽃(蓮花), 화염문(火焰紋), 보주문(寶珠紋) 등 그 색채가 찬란하고 명랑하여 눈을 즐겁게 했다.
조각에는 흔히 덩굴무늬(卷草), 용과 봉황(龍鳳), 구슬을 엮은 무늬(連珠), 술 장식(流蘇), 비천(飛天), 연꽃잎(蓮瓣) 등이 쓰였으며, 구도는 충실하고 선은 유창했다. 벽화와 조소의 제재는 대개 천국 세계에서 유래하였고, 신불(神佛)의 형상은 아름답고 자상하며, 싱그러운 꽃과 음악·춤의 공양이 무리를 지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과 사모하는 마음을 품게 했다. 정자, 대, 누, 각의 사방에는 물이 있고, 물가에는 온갖 꽃과 나무를 널리 심었으며, 물속에는 연꽃이 자라났다.
자연을 닮은 황실 원림(園林)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천인합일(天人合一), 천지위려(天地爲廬 온 세상이 곧 집이다)’ 사상을 받들어, 조경 수법은 자연의 산수를 위주로 하고 인력의 가공을 보조로 삼아 광활한 대자연의 경지에 이르고자 했다.
흥경궁(興慶宮)은 정원을 주체로 삼은 궁원으로, 궁 안에는 18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용지(龍池)를 팠다. 연못가는 푸른 버들로 그늘을 이루고, 연못 위에는 채색 배가 물결을 가르며 떠다녔으며, 연못 위의 정자와 누각은 물에 떠 있는 듯 아기자기하고 특색 있게 지어졌고, 그 사이에는 굽이치는 회랑이 고리처럼 서로 통하고 있었다. 용지의 동북쪽에는 유명한 침향정(沈香亭)이 있다.
구성궁(九成宮)과 화청궁(華清宮)은 이궁별원(離宮別苑, 왕이 본궁을 떠나 머물던 별궁)에 속한다.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의 기록에 따르면, “산세를 높여 전각을 세우고 깊은 골짜기를 파서 연못을 만들었으며, 물을 가로질러 기둥을 세우고 벼랑을 나누어 대궐을 높이 솟구쳤다. 높은 누각이 두루 서고 긴 회랑이 사방으로 이어지니, 건물이 복잡하게 얽히고 대와 정자가 들쑥날쑥하다. 우러러보면 아득히 백 심(百尋 1심은 1.8~2미터)에 달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험준하기가 천 인(千仞)에 이른다”라고 하여, 이 궁궐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자연 지세에 맞춰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화청궁은 여산(驪山) 북쪽 기슭에 있으며, 폭포와 온천이 인접해 있고 천여 그루의 푸른 소나무와 측백나무 사이에 가려져 있다. 산 위에는 부용원(芙蓉園), 분매단(粉梅壇), 간화대(看花台) 등의 식물 구역이 있고, 산허리에는 사슴을 풀아 놓았으며, 산꼭대기에는 주로 도관(道觀)이 있어 조원각(朝元閣), 노군전(老君殿), 장생전(長生殿) 등이 있었다. 그중 장생전은 백거이(白居易)의 시 《장한가(長恨歌)》로 인해 후세에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현존하는 당탑(唐塔)과 사찰 및 도관
누각식 탑
목조 구조 누각식 탑은 당대 탑의 주류였으나 현존하는 두 좌(座)는 모두 벽돌을 쌓아 목조 구조를 모방한 것이다. 하나는 서안 흥교사(興敎寺) 현장탑(玄奘塔)으로 고종 총장(總章) 2년(669년)에 건립되었고, 다른 하나는 서안 자은사(慈恩寺) 대안탑(大雁塔)으로 고종 영휘 3년(652년)에 건립되었으니, 두 탑의 전체 형상은 모두 간결하고 안정되며 듬직하다.
밀첨식(密簷式–처마가 빽빽한 양식) 탑
서안 소안탑(小雁塔), 하남 법왕사탑(法王寺塔), 대리 천심탑(千尋塔)과 사골탑(蛇骨塔)은 모두 밀첨식에 속한다. 천심탑은 동쪽으로 이해(洱海)에 임하고 서쪽으로 점창산(點蒼山)에 의지하여, 처마는 살짝 오목하고 모퉁이는 살짝 위로 솟았으며 탑신이 깨끗하고 하얗고 수장하여 수려하니, 호수와 산의 풍경과 서로 비친다.
정자식 탑
돈황벽화 속 수많은 단층 목탑은 모두 정자식 탑으로, 탑 전체가 온화하고 화려하며 조형이 부드럽고 함축적이다. 현존하는 혜숭탑(惠祟塔), 정장탑(淨藏塔), 범주탑(泛舟塔), 명혜탑(明惠塔)은 구조가 비교적 간단하나, 오직 산동 신통사 용호탑(龍虎塔)만은 전신에 금강, 나한, 비천, 보살, 등룡(騰龍), 비호(飛虎)를 부조로 새겨 만당(晩唐) 풍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불광사(佛光寺) 대전
지금까지 겨우 남아있는 4좌의 당대 목조 구조 사찰 가운데 산서 오대산 불광사 대전이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 사찰은 만당(晩唐) 시기인 857년에 건립되어 회창 연간(841~846년) 멸불의 재앙을 피했고, 지리적 위치가 외지고 신도들의 왕래가 적었기에 재건의 재앙을 면했다. 대전 자체 전체가 정밀한 목조 구조일 뿐만 아니라 전 내에는 아직도 당대 불보살 소조상이 몇십 구 남아 있고, 들보 아래에는 당대에 제목을 적은 먹 자국이 있다. 더욱 귀중한 것은 공안벽(拱眼壁) 위에 대형 당대 신선 벽화 한 폭이 아직 남아 있어 기세가 웅혼하고 색채가 화려하니 중국 고대 벽화의 효시라 할 만하다. 비록 작디 작은 불광사가 대당의 웅장하고 웅화려한 건축이란 편장 속에서는 단지 한 알의 작은 먼지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이 보여주는 조화롭고 우아한 전체 형상과 탁월한 공예 수준은 후인들로 하여금 탄복을 금치 못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