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7년—959년)
심연(心緣)
【정견망】
문화편
이 시기 가장 두드러진 문학적 성취는 ‘사(詞)’가 크게 발전했다는 점이다.
사의 기원과 초보적 발전
사(詞)는 노래의 가사로 넓은 의미에서 시가(詩歌)의 일종이다. 사의 기원에 관해서는 현재까지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수당 시기, 서역에서 탄생한 ‘호악(胡樂)’, 특히 구자락(龜茲樂)이 중토(中土)로 대량 들어와 한족 고유 청상악(清商樂)을 위주로 하는 각종 음악과 융합되어 새로운 음악인 ‘연악(燕樂)’을 탄생시켰다. 성당(盛唐) 시기 사회 경제가 번영하고 사람들의 생활이 풍부하고 다채로워지면서 음악은 당(唐) 사람들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오락이 되었는데, 연악은 신선하고 활기차며 곡조가 다양하고 각종 서로 다른 악기 반주를 사용할 수 있어 변화가 풍부했으므로 특히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연악 곡조에는 무곡(舞曲 춤과 연주)도 있고 가곡(歌曲 노래와 연주)도 있었는데, 가곡의 가사가 바로 사의 초기 형태로서 당시에는 ‘곡자사(曲子詞)’라 불렀다.
당대 연악 가사의 특징은 엄격한 악곡의 요구에 따라 가사를 제작했다는 것으로, 악장(樂章) 구조에 따라 편(遍)을 나누고, 곡조의 마디에 따라 구(句)를 이루며, 음의 높낮이에 따라 글자를 써서, 그 문자가 문장의 길이가 고르지 않으면서도 정해진 격식이 있는 형태를 형성했다. 이러한 상황은 과거 악부(樂府) 가사에는 없던 것이다. 중당 이후 많은 문인들이 이런 방식으로 가사 창작을 진행하면서, 이 새로운 형태의 가사는 차츰 중국 문학의 중요한 체재(體裁) 중 하나가 되었으니, 이것이 훗날 통상적으로 일컫는 ‘사(詞)’이다.
당대 연악 가사의 또 다른 출처는 문인들의 시가였다. 설용약(薛用弱)의 《집이기(集異記)》 기록에 따르면, 왕창령, 고적, 왕지환이 눈 내리는 날 함께 기정(旗亭)에 가서 술을 마시다가 이원(梨園) 배우와 가기(歌妓)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몰래 내기를 해서 가기들이 부르는 곡의 가사에 누구의 시가 많은지 겨루었다.
그 결과 첫 번째 부른 것은 왕창령의 절구 “차가운 비 강에 가득 밤에 오로 들어오니(寒雨連江夜入吳)”(〈부용루송신점(《芙蓉樓送辛漸》)〉)였고,
두 번째 부른 것은 고적의 절구 “궤를 여니 눈물이 가슴을 적시네(開篋淚沾臆)”(〈곡단부양구소부(哭單父梁九少府)〉였는데, 원래 시는 오언고시 장편이었으나 당시 가수가 앞 4구를 잘라 절구로 만들었다),
세 번째 부른 것은 왕창령의 절구 “빗자루 받들고 날 밝아 금전에 문 열리니(奉帚平明金殿開)”(〈장신추사(長信秋詞)〉)였으며,
마지막으로 대미를 장식힌 것은 왕지환의 “황하 먼 위로 백운 사이에(黃河遠上白雲間)”(〈양주사(涼州詞)〉)였으니, 이것이 저 유명한 ‘기정도창(旗亭賭唱)’ 이야기다.
송대 왕작(王灼)의 《벽계만지(碧雞漫志)》에서 이르기를 “이로써 이당(李唐)의 배우와 가기들이 당시 명사의 시구를 가곡에 끌어왔음을 알 수 있으니 대체로 흔한 풍속이었다”고 했다. 이러한 부류의 시는 주로 오언 및 칠언 절구였으며 특히 칠언절구가 보편적이었다.
시(詩)가 곡(曲)에 들어가면서 곡자사의 서정적 경향에 영향을 주었고, 언어 스타일도 바꾸어 놓았다. 사는 차츰 자신만의 특징을 형성했다. 내용은 일상생활의 감정을 서술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의경(意境)은 비교적 세밀하고 정교하며, 표현 수법은 비교적 부드럽고 완곡하며, 언어가 비교적 세련되고 정치(精致)했다. 이는 과거 대부분의 시가와는 다른 점이었다.
당조 시기의 사 작품은 제한적이어서 아직 발전 단계에 있었고 성취가 시가(詩歌)를 능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만당(晩唐) 시기 온정균(溫庭筠)의 사는 문인사(文人詞)의 성숙을 알리는 하나의 표지라 할 수 있다.
《구당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온정균은 외모를 꾸미진 않으나 재치와 사고가 민첩하고 음률에 정통한 문인이었으나 관운(官運)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현존하는 60~70수의 사 작품이 있고 들어간 곡조가 19종에 달하는데, 그중 〈소충정訴衷情〉, 〈하엽배荷葉杯〉, 〈하전河傳〉 등은 구절의 변화가 크고 리듬 전환이 빠르며 시의 음률 특징과 차이가 커서 반드시 음악에 익숙하고 ‘소리에 의존해 사(詞)를 채울’ 수 있어야지만 창작할 수 있다.
오대십국 시기, 이처럼 곡에 의존해 가사를 만드는 것이 더욱 풍속이 되었다. 서촉과 남당 두 지역은 군사력은 비록 약소했으나 경제와 문화는 전국에서 가장 발달했으므로 사인(詞人)들이 운집하는 2대 기지가 되었다. 이는 서촉 지역이 만당 중원의 전란에 받은 영향이 적었고 일찍이 번화하고 부유하여 사회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관대했기 때문으로, 이곳의 문인들은 여성과 술 속에서 개인적인 마음의 위안과 만족을 찾으며 온정균과 유사하게 방랑하는 삶을 살았다.
서촉 사인들의 사는 대부분 조숭조(趙崇祚)가 광정(廣政) 3년(940년)에 편찬한 《화간집(花間集)》에 수록되어 있다. 이 사집(詞集)은 당대 온정균, 황보송(皇甫松) 및 위장(韋莊), 설조온(薛昭蘊), 우교(牛嶠), 모문석(毛文錫) 등 당에서 오대로 들어와 촉 땅에서 관직을 살거나 촉과 관련된 사인 16명의 사 500수를 수록하였으므로 그들은 흔히 ‘화간사인(花間詞人)’이라 불린다.
《화간집》은 온정균을 으뜸으로 삼아 그의 사 66수를 수록하였고, 구양형(歐陽炯)은 〈서(序)〉에서 그의 사를 이백의 시와 함께 일컬었으니, 이는 첫 번째로 대량의 사를 쓴 문인인 온정균에 대한 존중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서촉 사인들의 창작이 기본적으로 온사(溫詞 온정균의 사)의 방향을 계승하여 제재가 대개 남녀의 정이나 이별의 한을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당의 사인과 이욱(李煜)
역사 기록에 따르면, 남당은 지리적 조건이 우수하고 환경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어 북쪽에서 유민으로 온 많은 노동력을 흡수하였으며, 이곳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게 하여 당시 보기 드문 번영의 기상을 나타냈다. 따라서 많은 문인들도 이곳에 모여들어 안정되고 풍류 있는 삶을 살았다.
남당(南唐)의 사인 중에서는 풍연사(馮延巳), 이경(李璟), 이욱(李煜)의 작품이 가장 뛰어났다.
풍연사(903~960)는 자가 정중(正中)이며 광릉(廣陵,지금의 강소성 양주) 사람으로, 남당 중주(中主 총 3명의 황제 중 두 번째 황제)의 재상을 지냈다. 그의 사는 주로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이별의 슬픔이나 개인적인 감상을 다루었으나, 그 언어 운용과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화간(花間)의 사인들과 달리 심리적 체험을 비교적 중시했다. 그는 참신한 언어를 구사하여 자연스러운 이미지와 심리의 변화를 통해 감정을 표현했으며, 그의 사풍(詞風)은 이미 청신하고 유창(流暢)하면서도 깊은 함축을 지닌 경향으로 선회했다. 왕국유(王國維)가 《인간사화(人間詞話)》에서 말한 바와 같이, 비록 “오대의 풍모를 잃지는 않았으나” 이미 “북송 일대(一代)의 기풍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풍연사가 어느 날 남당 중주 이경과 한담을 나누던 중 이경이 그의 《알금문(謁金門)》에 나오는 “연못 가득 봄바람 불어와 물결을 일게 하니(吹皺一池春水), 그대가 상관할 바인가(幹卿底事)?”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농담을 건넸다.
그러자 풍연사는 “폐하의 ‘작은 누각에 옥피리 소리 처절하게 불어오고 밤은 차가운데(小樓吹徹玉笙寒)’만 못합니다”라고 화답했다고 한다[마령馬令의 《남당서·당여전(黨與傳)》 참조]. 이는 사사(詞史)에 남은 유명한 일화다.
이경(916~961)은 자가 백옥(伯玉)이며 남당의 제2대 군주이다. 그는 통치자로서는 유약하고 무능했지만 문예적 소양은 제법 높았고 사(詞)도 매우 잘 지었으며, 그의 주변에는 한희재(韓熙載), 서현(徐鉉), 풍연사 같은 문사들이 모여들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남긴 작품은 드문데, 《완계사(浣溪沙)》가 그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연꽃 향기 사라지고 푸른 잎 시드는데,
서풍은 슬픔을 품고 푸른 물결 사이에 이는구나.
아름다운 시절과 함께 수척해지니 차마 볼 수가 없네.
가늘고 긴 빗속 꿈결에서 깨어나 보니
닭 우는 사이 요새는 아득하고,
작은 누각에는 옥피리 소리 처절하게 불어오는데 밤은 차갑기만 하네.
눈물방울은 얼마이며 한은 또 어찌 이리 깊은지,
난간에 기대어 서 있노라.
菡萏香銷翠葉殘,西風愁起綠波間。
還與韶光共憔悴,不堪看。
細雨夢回雞塞遠,小樓吹徹玉笙寒。
多少淚珠何限恨,倚闌幹。
이경의 아들인 이욱(937~978)은 곧 이후주(李後主)를 말하는데 자는 중광(重光)이다. 그는 오대 시기 가장 성취를 이룬 사인(詞人)이자 전체 사사(詞史)에서도 손꼽히는 일류 대가였다. 그는 음률에 밝고 글씨와 그림에 능했으며, 특히 시사를 짓는 데 뛰어났다. 이욱의 성품은 애초에 정치가에 어울리지 않았고 남당의 군사력 또한 송나라와 정면으로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스물다섯 살에 군주가 된 이후에는 해마다 송나라에 신하로 칭하며 공물을 바치는 처지 속에서 한구석에 겨우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서른아홉 살이 되었을 때 남당은 마침내 송나라에 의해 멸망했고, 이미 투항한 이욱은 변경(汴京, 지금의 개봉)으로 압송되어 절반은 포로이자 절반은 한량과 다름없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송태종에 의해 독살되며 생을 마감했다.
이욱의 전반생은 비록 송조의 속국인 아들 황제이긴 했으나 그래도 번영한 남당이란 일국의 군주였던 만큼 꽤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그의 사가 다룬 제재의 범위 역시 화간파(花間派) 사인들이나 풍연사, 그의 아버지 이경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아 궁궐 생활과 가무 연환을 읊거나 전통적인 제재를 이어받아 남녀 간의 사랑, 이별의 슬픔과 한을 노래했다. 예를 들어 《채상자(采桑子)》나 《청평악(淸平樂)》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망국의 군주가 되어 변경에 연금된 이후로는 “아침저녁으로 오직 눈물로 세월을 씻어내며 지냈고”(왕질의 《묵기》), 망국의 회한과 강남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고독하고 비참한 심경과 맞물리면서 그의 사는 향수의 정과 망국의 한을 노래하는 방향으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망강남(望江南)》, 《자야가(子夜歌)》를 비롯해 유명한 《우미인(虞美人)》, 《낭도사(浪淘沙)》 등이 바로 그것이다.
화간파 사인들과 비교할 때 이욱의 사는 유동적이고 명쾌하다. 그는 주로 대상의 심리 활동과 감정의 기복을 주선(主線)으로 삼고, 시각적 이미지를 감정의 주선에 관통시켜 하나씩 남김없이 드러냈으며 이미지와 그 함축적 의미를 매우 자연스럽게 결합시켰다.
이욱의 최고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는 대표작은 그의 후기 작품들로, 주로 망국의 슬픔과 회한, 절망을 담고 있다. 《상견환(相見歡)》에서 표현된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과 인생의 길고 깊은 한이든, 《오야제(烏夜啼)》에서 탄식하는 덧없이 한바탕 꿈처럼 지나간 옛일이든, 《낭도사(浪淘沙)》 속 “주렴이 한가롭게 말리지 않는 것을 내버려두노라”의 가득한 수심이든, 또 같은 조(調)의 사에 나오는 “꿈속에서는 제 몸이 나그네임을 알지 못하네”라는 상감이든, 모두 그 “도도히 흐르는 한 줄기 봄물”과도 같은 내면의 감정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다.
가령 《상견환》을 보자.
숲의 꽃들은 봄의 붉은빛을 떨구고 져버렸으니 너무도 허망하구나.
어찌하랴, 아침에는 찬 비 내리고 저녁에는 바람 불어오니.
연지 같은 눈물에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데,
그 시절은 언제 다시 돌아오려나?
본디 인생의 오랜 한은 동쪽으로 흘러가는 강물 같아라.
林花謝了春紅,太匆匆,無奈朝來寒雨晚來風。
胭脂淚,留人醉,幾時重?自是人生長恨水長東。
상편에서는 비록 경치를 묘사하고 있으나 이 대자연의 변화는 고스란히 인생의 변화를 읊은 것이며, 아침 비와 저녁 바람이 모질게 다그치며 봄기운을 짓밟고 청춘을 갉아먹는다. 하편에서는 사람을 노래하는데, 사람 또한 자연과 마찬가지로 비바람 속에서 화려한 시절이 다 지나가 버렸기에 마지막 구절에서 “인생의 오랜 한은 동쪽으로 흘러가는 강물 같아라”라고 읊은 것이다. 지극히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한 구절이다.
또한 유명한 《우미인(虞美人)》을 보자.
봄꽃과 가을 달은 언제 끝이 나려나, 지나간 옛일들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작은 누각에 어젯밤 또 동풍이 불어오니, 달빛 찬란한 속 차마 옛 고국을 회상하지 못하겠네. 조각한 난간과 옥 돌계단은 마땅히 그대로이겠지만,
오직 사람의 고운 얼굴만은 달라졌구나.
그대에게 묻노니, 시름이 얼마나 깊은가 하니,
흡사 도도히 동쪽으로 흘러가는 한 줄기 봄물 같아라.
春花秋月何時了,往事知多少?
小樓昨夜又東風,故國不堪回首月明中。
雕闌玉砌應猶在,只是朱顏改,
問君能有幾多愁,恰似一江春水向東流。
그리고 또 다른 유명한 《낭도사(浪淘沙)》의 구절도 있다.
주렴 밖에는 가랑비 보슬보슬 내리고, 봄기운은 저물어 가누나.
비단 이불은 오경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꿈속에서는 제 몸이 나그네인 줄도 모른 채 한때의 쾌락을 탐하네.
홀로 난간에 기대지 말지니, 끝없는 강산이여, 헤어질 때는 쉬워도 다시 만나기는 어렵구나. 흐르는 물과 진달래 꽃잎 지며 봄은 가버리나니,
이곳은 인간 세상인가 저 하늘 위인가.
簾外用潺潺,春意闌珊。
羅衾不耐五更寒,夢裏不知身是客,一晌貪歡。
獨自莫憑欄,無限江山,別時容易見時難。
流水落花春去也,天上人間。
이처럼 진심 어린 내면에서 우러나와 창작된 사들은 주로 세월의 덧없음을 추억하고, 무정한 인사(人事)의 변천을 탄식하며, 가혹한 운명을 슬퍼하는 감정을 흘려보내며 아주 강한 예술적 감동을 자아낸다. 이 외에도 이욱은 당·오대 시기의 사인들이 드물게 쓰던 백묘(白描) 기법을 채택해 청신한 언어로 감정을 그려냄으로써 자신만의 독특한 풍격을 확립했다.
[역주: 백묘 기법이란 복잡한 수사구나 감정의 과장 없이, 객관적인 사실이나 사물을 담담하고 직솔적으로 묘사해 독자 스스로 깊은 여운을 느끼게 하는 문체를 말한다. 진솔하고 담담한 언어로 깊은 비애와 서정을 극대화하며 이욱 사에서 두드러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