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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중국문화가 또 한번 휘황했던 송조(宋朝) (5)

(960년—1279년)

심연(心緣)

【정견망】

소옹 및 그의 예언 《매화시》

역사가 북송(北宋) 중기로 접어들었을 때 후세 역사 발전을 예언한 작품 《매화시(梅花詩)》가 나타났다. 저자는 소옹(邵雍)이다. 소옹은 자가 요부(堯夫), 시호가 강절(康節)로, 북송 진종(真宗) 4년인 1011년에 태어나 신종 10년인 1077년에 서거하니 향년 67세였다. 그는 하북 범양에서 태어나 훗날 아버지를 따라 공성(共城)으로 이주했으며, 노년에는 낙양에 은거했다.

소옹은 비록 삼국시대 제갈공명처럼 집집마다 다 아는 유명인은 아니었으나, 재간과 품덕(品德)을 막론하고 제갈량에 뒤지지 않았다. 다만 장기간 은거했기 때문에 이름이 후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당시 사람들이 그에 대해 “요부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문이다!”라고 찬탄했다.

소년 시절 소옹은 큰 뜻을 품고 발분하여 열심히 글을 읽었으며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송사·소옹전》에 따르면 소옹은 “처음 학문을 함에 즉시 굳건하고 고생스럽게 스스로 힘써, 추위에도 화로를 대지 않고 더위에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며 밤에도 잠자리에 들지 않기를 수년 동안 했다”고 한다. 훗날 견문을 넓히기 위해 그는 또 사방을 운유(雲遊)하며 황하를 건너고 분하(汾河)를 지나며 회수(淮水)를 건너고 한수(漢水)를 건너 제(齊), 노(魯), 송(宋), 정(鄭) 등 각지에 이르렀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도는 여기에 있구나” 하고는 더 이상 운유하지 않았다.

당시 이정지(李挺之)란 고인(高人)이 그가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음을 보고 그에게 《하도》, 《낙서》, 《복희팔괘》 등 역학의 비오(秘奧)를 전수해 주었다. 소옹은 총명한 재질로 융회관통(融會貫通)하여 오며한 깨달음을 스스로 얻으니, 마침내 일대(一代)의 역학(易學) 대사이자 먼 데와 가까운 데를 풍미한 홍유(鴻儒)가 되었다. 그는 자신만의 완정하고 독특한 우주관을 형성해 천지 운화(運化)와 음양 소장(消長)의 규율에 대해 훤히 꿰뚫어 보았다.

《송사》에서는 그가 “멀리는 고금 세태의 변화로부터 미시적으로는 날짐승과 길짐승, 풀과 나무의 성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깊이 도달해 곡진하게 통하니” 통달하여 미혹됨이 없었고, 또한 “지려(智慮)가 남보다 뛰어난지라 일을 만나면 미리 알 수 있었다”라고 했다. 이에 그는 책을 쓰고 학설을 세워 《황극경세(皇極經世)》, 《관물내외편(觀物內外篇)》 등의 저작 도합 10여 만 자를 지었다. 그는 역사가 정해진 수(數)에 따라 연화한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의 선천역수(先天易數)로 원(元), 회(會), 운(運), 세(世) 등의 개념을 사용해 천지의 연화와 역사의 순환을 추산했다. 후세 역학에 큰 영향을 미친 《철판신수(鐵板神數)》와 《매화심역(梅花心易)》이 모두 소옹에게서 나왔다. 후인들은 또 그를 존칭해 “소자(邵子)”라 불렀다.

중년 이후 그는 명리를 담담히 여기고 낙양에 은거하여 책을 쓰고 가르쳤다. 당시의 명류(名流) 학사들인 부필, 사마광 등이 모두 그를 매우 존중해, 일찍이 돈을 모아 그를 위해 정원과 집을 사주며 이름 지어 “안락와(安樂窩 안락한 둥지)”라 하니, 소옹도 자호를 “안락선생”이라 했다. 그는 고금을 관통하고 기이한 재주로 세상을 덮었을 뿐만 아니라 품덕(品德)이 중후하고 사람을 대함에 지성으로 했다. 이에 그의 명성이 먼 곳과 가까운 곳을 막론했고 다다르는 곳마다 사대부들이 다투어 그를 모시며 머물게 했고, 어떤 사람은 소옹이 머물렀던 곳을 그의 “행와(行窩 임시 거처)”라 불렀다. 사람들 마음속에 가진 그에 대한 위망(威望)을 볼 수 있다.

소옹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일을 만나면 미리 알 수 있어” 명성이 자자했다. 한번은 소옹이 정원을 지나며 매화를 보다가 매화나무 위에 두 참새가 서로 싸우다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움직이지 않으면 점치지 않고, 일로 말미암지 않으면 점치지 않거늘, 이제 두 참새가 가지를 다투다 땅에 떨어지니 괴이하도다”라고 했다.

당시는 간지로 진년(辰年) 12월 17일 신시(申時)였으므로, 진년의 수 5, 12월의 수 12, 17일의 수 17을 취하여 합계 34가 되니 8로 나누면 남은 수가 2가 되어 선천괘의 태괘(兌卦)에 합하여 상괘(上卦)가 된다. 다시 34에 시를 의미하는 신시(申時)의 수 9를 더하여 합계 43이 되니 8로 나누어 남은 수가 3이 되어 선천수의 리괘(離卦)가 되어 하괘(下卦)가 된다. 또 43을 6으로 나누면(괘에 6효가 있으므로 6으로 나눔) 남은 수가 1이 되니 초효가 변한 것이다. 그리하여 괘는 택화혁(澤火革) 괘가 되고 호괘(互卦)가 건괘와 손괘가 된다……

그는 이것을 이용해 내일 저녁에 한 여자가 와서 꽃을 꺾다가 정원사가 도둑으로 오인하여 몰아내러 오므로 그 여자가 이로 인해 당황하여 실수로 땅에 넘어져 다리를 다칠 것이나 다행히 상세가 심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훗날 과연 그가 한 말과 같았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어느 겨울날 저녁 유시(酉時 저녁 6시 전후)에 소옹이 화로가에서 불을 쬐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먼저 한 번 두드리고 이어 연달아 다섯 번 두드리며 물건을 빌리러 왔다고 말하니, 강절 선생이 이에 따라 괘를 하나 만들고 즉시 이웃이 도끼를 빌리러 온 것이라 단정했다. 소강절이 이렇게 말하자 그 아들이 믿지 못하여 문을 열고 물어보니 과연 도끼를 빌리러 온 것이었다. 소옹은 온 사람이 처음에 한 번 두드렸으니 상괘(上卦)로 건(乾)을 얻고, 이어서 다섯 번 두드렸으니 하괘(下卦)로 손(巽)을 얻어 상하괘를 얻었다. 상하괘의 수인 1과 5에 시진의 수인 10을 더하면 16이 되고 이를 6으로 나눠 변효를 얻으니 4효가 변한다, 본괘는 천풍구괘가 되고 호괘는 중천건괘가 되니 3개의 건괘가 나온다. 건은 금(金)에 속하고 손(巽)은 목(木)이 되므로 온 사람이 빌리러 온 것은 마땅히 금과 목의 부류에 속한다. 또 금은 짧고 목은 기니 이 물건은 마땅히 도끼가 된다고 했다.

아들이 “금이 짧고 목이 길면 마땅히 도끼가 아니라 호미가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소옹이 대답했다. “괘를 점치는 것 역시 정리에 근거해 추론해야 하느니라. 괘로만 보자면 호미나 도끼나 모두 가능하지만 이치로 추측컨대 저녁에 호미를 가져다 무엇을 하겠느냐? 필경 도끼를 빌려 땔나무를 하려는 것이다.”

소옹은 이처럼 어떤 일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아는 기재(奇才)를 지녔기에 후세 역사 발전에 대해 정확한 예언을 내놓아 지금까지 전해지는 《매화시》를 남겨, 사후 중국에서 발생한 중대한 역사적 변천을 예언했다. 물론 모든 예언과 마찬가지로 그는 매우 우회적인 언어를 사용했기에 그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은 도학(道學)이나 불리(佛理)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깨닫기 쉽지 않다.

이후의 역사를 서술할 때 우리는 《마전가》, 《추배도》, 《매화시》 및 기타 예언들을 결합하여 “역사는 단지 정해진 수에 따라 연화할 뿐이다”라는 이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 이치를 밝힐 것이다.

멸망을 향해 가는 북송

*《추배도》와 《매화시》 중 북송 멸망에 관한 예언

《추배도》 제21상은 북송의 멸망을 예언했다. 이 상의 그림에는 앞에 두 사람이 황포를 입고 있고 뒤에 한 금나라 사람이 있으니 송 휘종과 송 흠종이 포로가 되어 북쪽으로 끌려가는 상황을 암시한다.

참(讖)에 가로되:

그 궁중이 텅 비고
눈이 석 자나 쌓였도다
슬프다 원수(元首)여,
남쪽으로 가려다 북쪽으로 가는구나

空厥宮中
雪深叄尺
籲嗟元首
南轅北轍

북송의 수도가 점령되어 궁전이 씻은 듯 털렸다는 뜻이다. 그리고 황제는 본래 궁에 살아야 하거늘 지금은 정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끌려간다.

송(頌)에 가로되:

요사스러운 기운이 가라앉지 않아 편안치 못하니
북쪽의 봉화를 쓸어내며 제경(帝京)을 바라보네
다른 성씨가 조정을 세워 국가의 지위를 끝내니
점친 세상이 삼륙(三六)이요 또다시 남쪽으로 가도다

妖氛未靖不康寧
北掃烽煙望帝京
異姓立朝終國位
蔔世叄六又南行

앞의 두 구절은 간신 채경(蔡京) 부자가 북송을 안녕하지 못하게 만들어 마침내 금나라 사람에게 수도가 함락됨을 말한다. 뒤의 두 구절은 금나라 사람이 장방창(張邦昌)을 도와 북방에 초국(楚國)을 건립하게 하고 북송이 36년 후에 멸망함을 말한다. “남행”은 남송의 건립을 가리킨다.

《매화시》의 첫 번째 절은 다음과 같다.

탕탕한 천문이 만고에 열리니,
몇 사람이나 돌아가고 몇 사람이나 올 것인가.
산하가 비록 좋으나 완벽하지 않으니,
황금이 재앙의 모태임을 믿지 않노라.

蕩蕩天門萬古開
幾人歸去幾人來
山河雖好非完璧
不信黃金是禍胎

첫 구절 “탕탕한 천문이 만고에 열리니, 몇 사람이나 돌아가고 몇 사람이나 올 것인가”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넓고 넓은 하늘로 통하는 문이 만고(萬古) 이래 처음으로 탁 열렸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인간 세상에 왔으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 두 구절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여기서는 한 번에 명확히 보이지 않으며, 나중에 시 전체를 해석한 후에야 진상이 명백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첫 구절부터 소옹의 솜씨가 범상치 않고 뜻을 세움이 아주 높고 먼 것을 볼 수 있다. 단지 사람들에게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알려주려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이 역사적 어수선함 속의 최종 주제를 알려주려는 것이다.

뒤의 두 구절은 북송의 멸망을 예언했다. 송조 초년 태조 조광윤이 “배주석병권”을 취하여 천하를 다진 공신(功臣)과 용맹한 장수들을 해산시킨 후, 송조 장수들은 대부분 문인(文人)이 담당했고 아울러 조정에서 엄격한 방범 조치를 취했다. 이에 송군은 “병사는 정해진 장수가 없고 장수는 정해진 병사가 없게” 되는 국면을 초래하여, 군사력이 약해져 북방의 요나라와 서하를 소멸할 수 없어 오직 방어 조치만 취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북방의 국토인 “연운(燕雲)십육주”는 줄곧 요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으므로 “산하가 비록 좋으나 완벽하지 않다”고 한 것이다.

본래 북방 금나라의 여진족은 약소한 민족이었으나 그들이 발전하고 강대해질 때 일찍이 북송과 연합해 함께 이미 말세에 가까워진 요나라를 뒤엎고자 했다. 어리석은 송 휘종은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오로지 금나라와 동맹을 맺고자 하여, 매년 요나라에 바치던 공물을 금나라로 돌리는 데 동의하면서 ‘황’룡부(黃龍府)에 도읍한 이 큰 ‘금’니라야말로 송저의 진정한 재앙의 모태”임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국 역사상 드문 “정강(靖康)의 치(恥)”가 있게 되었으니, 북송 황제, 비빈, 친왕, 조정 대신 등 3,000여 명이 모조리 금나라에 노예로 잡혀가 강산의 반쪽이 금국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정녕 “황금이 재앙의 모태인 줄 믿지 않노라”라고 한 바와 같다.

* 휘종과 흠종이 놀이에 빠져 나라를 망치다

역사의 진실은 어떠했을까? 신종(神宗)이 서거한 후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개혁도 따라서 중단되었다. “육적(六賊 여섯 도적)”이 대권을 독점하여 조정의 정사가 한바탕 혼란해졌다. 북송이 멸망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1100년, 송 철종이 재위 15년 만에 병으로 서거했지만 아들이 없어 동생인 단왕(端王) 조길(趙佶)이 황위를 계승하니 이가 바로 송 휘종이다. 송사에서는 송조 중기 이후의 화단(禍端)의 으뜸은 “장돈(章惇), 채경(蔡京)이 으뜸가는 악인이었다. 채경은 경박하고 교사하고 아첨하는 자질로 그 교만하고 사치하고 음란하고 방탕한 뜻을 이루었다.” “예로부터 임금이 물건에 빠져 뜻을 잃고 욕심을 풀어 법도를 망치면 멸망하지 않는 자가 드물었으니 휘종이 심했다”라고 했다.

조길은 역사상 유명한 풍류 천자이자 혼군이었다. 그는 시부(詩賦)를 읊었으며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렸다. 송조 사람들은 그의 문채와 풍류가 후당 이후주(李後主)보다 백 배는 낫다고 말했다. 그는 놀이에 특별히 취미가 있어 음률(音律), 색, 글씨, 그림, 기이한 꽃과 돌, 날짐승과 길짐승, 나아가 공차기, 해학 등에 이르기까지 좋아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무릇 그 취향에 맞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조정의 대신, 궁궐의 환관, 시정잡배를 막론하고 모두 신임과 중용을 얻을 수 있었다. 가령 고구(高俅)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본래 관청의 하인이었으나 공차기를 잘한다는 이유로 송 휘종이 그를 매우 좋아해 보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고구를 전전도지휘사(殿前都指揮使)로 승진시켜 금군(禁軍)을 통솔하게 했고, 곧 고구에게 “사상(使相 절도산나 재상)”의 관작을 하사했다.

송 휘종은 자주 미복으로 궁을 나와 기생집에서 밤을 지새웠고 궁중에도 작은 시장을 설치하여 궁녀들은 장사꾼으로 분장하여 술과 차를 팔고 휘종은 거지로 분장하여 집집마다 구걸하며 모두 즐겼으니, 혼군의 마음속에는 이미 대송 200년 가국(家國)과 수천 금수강산이 존재하지 않았다.

송 휘종 재위 25년 동안 가장 신임을 받은 자는 채경, 왕보(王黼), 동관(童貫), 양사성(梁師成), 주면(朱勔) 등 간신들이었다. 채경은 장기간 재상으로 임용되어 중간에 비록 세 차례 파면되긴 했으나 세 차례 모두 금방 다시 복위되었다. 채경의 아들 6명, 손자 4명이 동시에 집정(執政)과 종관(從官)이 되었고 그 당여들도 모두 승승장구했다. 채경, 왕보, 동관, 양사성, 주면 5명은 훗날 송 휘종을 위해 긁어모으고 돈벌이를 위해 온갖 나쁜 짓을 다 한 환관 이언(李彥)과 더불어 당시 사람들에게 “육적(六賊)”이라 불렸다. 이들은 서로 결탁하여 이교를 배척하고 당여를 늘리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졌고 심지어 공개적으로 가격을 매겨 관직을 팔았다. 당시 “3천 냥이면 직비각이요, 5백 관이면 통판에 발탁한다(擢通判)”는 노래가 있어 채경 등이 공개적으로 관직을 팔던 행태를 폭로했다.

자신의 권세를 공고히 하기 위해 “육적”은 송 휘종의 취향에 맞춰 나쁜 짓을 도왔다.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강남에서 꽃과 돌을 수집하여 경성으로 운반했다. “화석강(花石綱)”의 무거운 압박은 마침내 송조 중기 가장 큰 두 차례 농민 기의, 즉 송강(宋江)의 기의와 방랍(方臘)의 기의를 유발했다.

북송 조씨 왕조가 ‘풍요롭고 형통하게’ 음탕한 즐거움에 빠져 있을 때 북방에서는 금조(金朝)가 흥기했다. 1122년 금이 요를 멸망시켰다. 1125년 금군(金軍)이 또 북송을 남침하여 하북에서 직접 내려와 개봉을 압박했다. 송 휘종은 손발이 어지러워 급히 경성의 모든 금군을 환관인 양방평에게 맡겨 여양(黎陽 지금의 하남 준현)에 주둔해 황하 북안을 지키게 했고, 동시에 급히 제위를 황태자인 조환(趙桓), 즉 흠종에게 선양하고 자신은 채유(蔡攸), 동관 등 총신을 데리고 남방으로 피난을 갔으며 채경도 따라서 남쪽으로 달아났다.

당시 금군을 통솔해 북송을 공격한 자는 금국 우부원수 완안알리불이었다. 알리불의 외모가 송 태조와 몹시 닮았으므로 송조 야사에서는 그가 송 태조 조광윤이 환생한 것이라 말한다.

공원 1126년 정월, 알리불이 금군을 이끌고 개봉을 포위했으나 이강(李綱)의 저항을 만나자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와 뒷길이 끊어질까 우려해 같은 해 2월 공물을 갈취한 후 군사를 이끌고 떠났다. 이듬해 봄 알리불이 다시 대군을 이끌고 개봉을 공격해, 1127년 4월 초하룻날(정강 2년) 알리불이 송 휘종, 송 흠종 및 종실, 후비, 그리고 조정 관원을 포함해 모두 3,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북쪽으로 데려갔다. 개봉의 법가, 루부, 황후 이하 차로, 루부(鹵簿 황제 전용 의장대 기물), 관복, 예기, 법물(法物), 대악(大樂), 교방 악기, 제기, 팔보(八寶), 구정(九鼎), 규벽(圭璧), 혼천의, 동인(銅人), 각루(刻漏), 고기(古器), 경령궁 공기, 태청루 비각 3관의 책, 천하 주부(州府)의 지도 및 관리, 내인(內人), 내시, 기예, 공장(工匠), 창우(倡優 배오), 부고의 축적 등이 모조리 씻은 듯 털렸다. 이것이 바로 남송의 명장이자 민족 영웅인 악비의 유명한 시가 《만강홍》에서 말한 “정강의 치”이다. 훗날 두 황제는 억류된 상태에서 사망했다.

북송은 960년 송 태조의 진교역 병변에서 시작해 1127년 알리불이 개봉을 함락해 멸망시킬 때까지 167년 동안 지속되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