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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중국문화가 또 한번 휘황했던 송조(宋朝) (7)

(960년—1279년)

심연(心緣)

【정견망】

전쟁과 화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남송

1162년, 송 태종의 6세손인 송 고종 조구가 36년 동안 재위한 후 퇴위를 선언했다. 슬하에 아들이 없었으므로 황위는 송 태조 조광윤의 7세손인 송 효종 조빈(趙斌)에게 양위했다.

조빈이 제위를 계승한 후 송조의 조씨 강산은 태종 조광윤으로부터 송 고종 조구에 이르기까지 8대 9왕을 거쳐 다시 태종의 지파에서 태조의 지파로 넘어갔다. 송 효종 조빈은 27년 동안 재위했으며(1162년~1189년), 고종은 태상황이 되어 덕수궁(德壽宮)으로 물러나 1187년(순희 14년) 사망할 때까지 총 25년 동안 태상황을 지냈으며 대략 효종이 재위한 기간과 시종 같이했다.

송 효종이 즉위한 후 북방의 금나라는 성대에서 쇠약으로 기울어 더 이상 대규모의 남침 전쟁을 발동하진 않았다. 반면 남송의 임금과 신하들은 전쟁과 화의라는 양자택일 사이에서 방황했다. 비록 효종이 임용한 대신들은 대부분 고종의 구신(舊臣)들이었으며 또 수시로 송 고종의 견제와 고종 시기 구신들의 반대를 받아야 했기에 뚜렷한 소임을 다하지 못했음에도 효종은 결국 금에 대항해 북방의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기로 결의하고 조정 정무 방면에서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항금 장수 장준(張浚)을 불러들인 동시에 악비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그를 위한 사당을 지어 예법에 따라 다시 장사 지내주었다. 이밖에도 조정 내 진회의 잔당을 숙청하고 그의 모함을 받았던 관원들을 불러들였다. 조정 상하의 기운이 한바탕 새로워져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상을 주었다.

효종은 또 송 고종이 진회를 18년 동안 재상으로 두어 진회가 전권을 휘두르게 한 교훈을 받아들여 그와는 정반대로 재상을 빈번히 교체했다. 그는 재위 기간에 총 15명을 재상으로 임명했는데 그중 몇몇은 임기가 1년도 채 되지 않았고 어떤 이는 겨우 3개월 만에 교체되었다. 승상을 돕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역시 총 34명이나 교체했으며 그중 18명은 임기가 1년이 안 되었고 어떤 이는 겨우 두 달 만에 교체되었다. 게다가 송 효종 때의 재상은 고종 때처럼 그렇게 큰 권력을 가지지 못해 재상을 지낸 사람들도 아무 것도 수립하지 못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황권(皇權)이 다시 부각되었다.

1163년, 장준이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영벽(靈璧)과 숙주(宿州)를 수복하니 효종이 몹시 기뻐하고 기대가 컸다. 그러나 나중에 송군 내부에서 모순이 발생하여 금군에게 패배했다. 효종이 동요하면 금과 화의하기로 결정하자 조정 내의 주전파(主戰派)의 반대를 받았다. 효종은 갈피를 잡지 못하다 결국 금나라에 화의를 청하는 것을 선택했다.

1164년, 송조와 금국이 “융흥화의(隆興和議)”를 체결해 양측은 “소흥화의”의 조항을 확인하고 금과 송이 군신 관계에서 숙질 관계로 바뀐다는 규정을 두어 남송 황제가 금 황제에게 스스로 “조카 황제”라 칭하게 했다; 송과 금 사이에는 여전히 소흥화의에서 확정한 국경을 유지하고 송이 매년 금에 바치는 “세공(歲貢)”을 “세폐(歲幣)”로 고쳐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을 각각 은 20만 냥, 비단 20만 필로 줄였다. 송은 상주(商州 지금의 섬서 상현)와 진주(秦州 지금의 감숙 천수)가 금나라 영토임을 승인했다. 이후 송과 금은 30년 동안 휴전했다.

1189년(순희 16년), 금 세종 완안옹(完顏雍)이 병사하고 나이가 불과 21세인 금 장종(莊宗)이 제위를 이었다. 융흥화의 이후 줄곧 금과 송 양국 간의 왕래 예절이 평등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던 송 효종은 이때 이미 63세의 노인이 되어 자신보다 42세나 어린 장종에게 조카라 칭하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태자 조돈(趙惇)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중화궁(重華宮)으로 물러나 태상황이 되었다. 조돈이 보위에 오르니 이가 발로 송 광종(光宗)이다.

광종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심질(心疾)”을 얻어 정사는 온통 황후 이(李)씨의 손에 장악되었다. 광종은 재위가 겨우 5년이었는데 그동안 비록 재상이 전횡하지는 않았으나 궁중의 모순이 얽히고설켜 시끄러웠다. 환관들이 틈을 타 권력을 도적질하고 서로 뇌물을 바치니 진회가 전횡한 이래 매우 심각했던 뇌물 풍조가 이때 다시 발전했다. 1194년(소희 5년), 효종이 병사하고 광종의 병도 재발해 일시에 정국이 동요하자 재상 유정(留正)은 병화(兵禍)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겁을 먹고 관직을 버리고 도망쳤다.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조여우(趙汝愚)가 외척 한탁주(韓侂胄 고종 황후의 조카)의 지지를 받아 고종 황후의 허락을 얻어 태황태후의 신분으로 조서를 반포해 광종의 아들 조확(趙擴)을 황제로 세우니 이 사람이 송 영종(寧宗)이며 광종을 태상황으로 존칭했다. 이번 “내부 선양”이 앞의 두 차례와 다른 점은 그것이 사실상 황제를 압박한 극이었고 광종은 사실상 폐위되어 6년 후 근심과 병으로 죽었다는 점이다.

송 영종이 즉위한 후 외척 한탁주의 세력도 급속히 발전하여 점차 조정 내외의 모든 대권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한탁주의 전횡은 전후 13년에 달했으며 그의 관직은 절도사에서 태사까지 승진하였고 평원군왕(平原郡王)에 봉해졌다.

1205년(개희 원년), 한탁주는 평장군국사(平章軍國事) 겸 국용사(國用使)에 취임해 군정, 민정, 재정의 삼권을 한몸에 모아 재상 위에 위치했고 3성(문하, 중서, 상서)의 도장을 모두 그의 부중(府中)에 넘겼으며 심지어 송 영종의 어필을 가짜로 만들어 장수를 승진시키고 파면해도 감히 따져묻는 자가 없었다. 한탁주의 권세가 이에 이르러 “위엄이 궁성(宮省)에 행해지고 권세가 천하를 진동하는” 정점에 달했다. 1207년 11월(개희 3년), 한탁주는 북벌이 실패한 까닭에 사미원(史彌遠), 양황후(楊皇后 영종의 황후)의 비밀 책략으로 주살되었으며 그의 수급을 금나라 사람에게 보내니 그가 권력을 전횡하던 시기가 비로소 막을 내렸다.

1208년(가정 원년), 송과 금 쌍방은 화약(和約)을 다시 정하니 역사상 이를 “가정화의(嘉定和議)”라 부른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강의 고사에 의거하여 대를 이어 숙질의 나라가 된다; 세폐를 늘려 은 30만 냥, 비단 30만 필로 한다; 국경은 소흥화의 때와 같다(금은 새로 점령한 대산관, 호주 등을 포기). 남송은 별도로 금군에게 위로금(배상금) 300만 냥을 준다. 이때 몽골 세력이 이미 북방에서 흥기해 끊임없이 남하해 공격하고 있었으나 금과 남송은 점차 쇠락해 갔다.

그리고 쇠락 속에 처한 남송 강산은 사미원의 더 긴 기간 외척 전권으로 접어들었다.

사미원은 송 효종 때의 재상이었던 사호(史浩)의 아들이다. 그는 한탁주의 모살을 획책한 후 지위가 급상승해 다음 해에 바로 재상 겸 추밀사(樞密使)에 올랐다. 송 영종은 30년 동안 재위했는데 전반 13년은 한탁주가 전횡했고 후반 17년은 사미원이 전횡했다. 이 17년 동안 사미원은 모친 상을 치르느라 단기간 이직한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재상, 추밀사의 두 요직을 겸임했다. 이때 조정의 정사는 더욱 부패했다.

사미원의 전권이 한탁주와 다른 점은 주로 한탁주가 일찍이 항금 자세를 취하여 진회의 왕작(王爵)과 시호를 박탈할 것을 선언했던 반면 사미원은 집권하자마자 곧 진회의 왕작과 시호를 회복시킬 것을 선언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사미원의 전권은 송조 정권에 더욱 큰 위해를 끼쳤다.

당시 송 영종은 아들이 없자 소흥부 민간에서 송 태조의 10세손 조고(趙告)를 찾아 궁중에서 길러 황태자로 삼았다. 사미원은 조고를 감시하기 위해 조고가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는 것을 이용하여 거문고를 잘 타는 미녀를 사서 조고의 곁에 배치해 감시했다. 조고가 양황후, 사미원의 전권 행위에 불만을 품고 일찍이 뜻을 얻으면 사미원을 해남도로 유배보내겠다고 말하자, 미녀가 이 상황을 사미원에게 보고했고 사미원은 이에 조고를 폐위할 것을 결정했다.

1224년(가정 17년), 송 영종이 병사하자 사미원은 양황후와 함께 조고를 폐위하고 송 태조의 10세손 조윤(趙昀)을 찾아 황제로 세우니 이 사람이 송 이종(理宗)이다. 조고는 얼마 안 있어 강제로 목을 매 죽임을 당했다.

송 이종은 사미원이 세웠기 때문에 여전히 그가 홀로 9년간 재상을 맡았고 모든 정령이 사미원의 손에서 나왔다. 사미원은 이 9년 동안 더욱 전횡하고 발호했다. 송 이종은 다만 그의 손에 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1233년, 사미원이 송 영종, 송 이종 두 조정에서 도합 26년을 전횡한 후 병사한 후에야 이종이 직접 조정 정사를 관장하면서 연호를 단평(端平)으로 고쳤다. 이때의 조씨 강산은 한탁주, 사미원이 연속해서 40여 년 동안 전권한 것을 거쳐 이미 부패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멸망을 향해 가는 남송

이종이 정권을 장악한 후 외척인 가사도(賈似道)를 중용해 그로 하여금 대권을 독점하게 하니 조씨는 더욱 쇠락했다.

가사도는 전형적인 “시정무뢰배”였다. 그의 누이가 이종의 귀비(貴妃)로 간택된 덕분에 그는 양회선무시(兩淮宣撫使)의 직위에까지 올라 남송의 주요한 군사 사령관이 되었다. 얼마 안 되어 그는 전공을 허위로 보고해 소사(少師),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져 남송에서 가장 권세 있는 인물이 되었다.

가사도는 일찍이 사적으로 원 세조 쿠빌라이와 몽골에 신하를 칭하고 땅을 떼어주고 예물을 바치는 굴욕적인 화의를 맺었다. 하지만 진상을 은폐하고 악주(鄂州) 전공을 거짓으로 보고하여 조정의 기강을 독차지하는 대권을 훔쳤다. 1260년(경정 원년), 쿠빌라이가 학경(郝經)을 사신(國信使)으로 남송에 보내 남송으로 하여금 악주 성 아래에서 화의했던 조항을 이행하도록 촉구했다. 가사도는 사적으로 맺은 굴욕적인 화의가 발각되지 않게 하려고 원조 사신인 학경을 진주(眞州 지금의 강소 의정儀征)의 군영 안에 비밀리에 구류했다. 몽골이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 학경의 행방을 물었으나 가사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동시에 전투태세를 갖추지 않고 도리어 각 로(路)에서 “타산법(打算法 일종의 회계감사제도)”을 실시하는 데 전념했다(군비 지출을 검증한다는 구실로 자신에게 불경했던 장수나 관리들이 몽골병에 대항할 때 지출했던 관물을 모두 “부정부패”로 몰아 “공금횡령”의 죄를 덮어씌워 파직하고 유배시켰으며 어떤 이는 심지어 옥에 가두고 박해해 죽였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장수나 관리들을 박해하기 위함이었다.

1264년, 송 이종 조윤이 병사하고 동생인 복왕(福王) 조여예(趙與芮)의 아들 조기(趙禥)가 뒤를 이으니 이 사람이 송 도종(度宗)이다. 1271년, 쿠빌라이가 국호를 원(元)으로 정하고 원조(元朝)를 건립해 각 로의 원병(元兵)에게 남송을 대거 진공할 것을 명하고 양양과 번성을 공격하게 했다. 남송의 각 전장이 위급을 고했으나 가사도는 조정의 그 누구도 송 도종에게 변방의 위급한 일을 말하지 못하게 했으며 송 도종에게 양번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누설한 궁녀 한 명을 죽이기까지 했다.

1274년(함순 10년), 원조가 바얀을 통수로 임명해 수륙 병진으로 남송을 소멸하게 하였고 다음 해 3월 건강(지금의 남경시), 무석(無錫), 상주(常州), 광덕(廣德)을 함락하고 남송의 도읍 임안을 직접 압박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가사도는 더 이상 전횡할 수 없게 되었고 각지에서 상소를 올려 가사도를 죽여 천하에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사(謝)태후는 다만 그를 순주(循州 광동 용천)로 유배시켰다. 가사도를 압송하던 회계현위(會稽縣尉) 정호신(鄭虎臣)이 의분에 겨워 압송 도중 가사도를 복건 장주(漳州) 목면암(木棉庵)에서 참수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