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0년—1279년)
심연(心緣)
【정견망】
남송 말년의 천재(天災)
이미 지나간 역사가 사람들에게 알려주다시피, 한 왕조가 멸망으로 향할 때면 대개 상당한 천재(天災)가 나타나기 마련인데, 이는 하늘이 집권자의 실덕(失德)과 악행을 경고하는 것이다. 남송(南宋) 왕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남송의 황제들은 대개 어리석고 무능했기에, 고종부터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줄곧 재화(災禍) 발생한 빈도가 해마다 증가했다. 예를 들어 역병의 경우, 고종 때에는 약 6년마다 한 번씩 발생하던 것이 효종 때에는 2년마다 한 번, 광종 때는 2.5년마다 한 번, 영종 때는 2.4년마다 한 번, 도종과 공제(恭帝) 때에는 매년 1번씩 발생했다. 여기서는 영종, 도종, 공제 시기의 전염병을 예로 들어보겠다.
영종 가정(嘉定) 원년(1208년) 여름, 회하(淮河) 유역에 큰 전염병이 돌아 죽은 사람의 수는 지금에 와서는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당시 정부는 민간 노동자를 모아 시신을 매장하게 했는데, 시신 200구 이상을 매장한 사람에게는 정부에서 문첩(文牒, 증명서)을 주어 승려(僧人)로 만들어 주었다. 이 해부터 절강 지역에서는 수년 동안 연속으로 큰 전염병이 발생했으며, 도성인 임안부(臨安府)에서 특히 심했다.
가정 2년 여름, 임안부에 또다시 큰 전염병이 발생해 “백성들이 역병으로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전쟁의 난리를 피해 회하 유역에서 장강(長江) 이남으로 피난 온 이재민들은 굶주림과 무더위 속에서 “많은 이가 역병으로 죽었다.” 그 다음 해 4월에도 임안부는 여전히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도성 백성들 중에 역병으로 죽은 자가 많았다.” 가정 4년, 임안부에 다시 대규모 역병이 유행해 매장되지 않은 시신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가정 15년(1222년), 남쪽의 공주(贛州)에 전염병이 유행했다. 진덕수(眞德秀)의 기록에 따르면 그해 정주(汀州), 소주(邵州), 소주(釗州) 세 주에서 “역병에 걸린 사람이 각각 수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비록 이미 시기상으로는 10월 날씨였으나 “더위와 답답함이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아” 비정상적으로 더웠다.
도종 함순(咸淳) 7년(1271년), 절강 영가(永嘉) 지역에 큰 역병이 돌아 죽은 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시기에 원(元)나라 군대가 송조를 멸망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해 그 주력이 임안으로 곧장 진격했고, 가는 곳마다 송군이 잇따라 항복했다. 덕우(德佑) 원년(1275년) 6월, 상주(常州) 등의 성이 원군(元軍)에 점령되자 성 안의 주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으며, “역병으로 고통받다 죽은 백성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성 밖 교외의 천녕사(天寧寺)로 피신한 이재민들 사이에서도 역병이 발생했다. 거주지가 매우 비좁았기 때문에 일단 역병이 발생하면 수습할 길이 없었고 “죽은 자가 유독 많았다.”
덕우 2년 윤정월, 원나라 군대가 임안부를 포위하였고 3월에 원나라 사람들이 임안부에 진입했으며, 어린 황제 공제(恭帝)는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로 보내졌고 전태후(全太后)와 태황태후(太皇太后) 사도청(謝道淸)도 잇따라 대도로 압송되었다. 몇 달간의 포위 끝에 임안부는 온통 혼란에 빠져 엉망진창이 되었다. 윤 3월에 날씨가 조금 더워지자 전염병이 크게 창궐하여 “성 안의 역병 기운이 찌는 듯했고, 병으로 죽는 사람을 헤아릴 수 없었다.” 국가는 이미 망했는데 전염병이 다시 맹렬하게 들이닥친 것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남송의 역병은 임안부를 중심으로 한 양절(兩浙) 지역에 비교적 많이 발생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역은 황제와 그 중신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하늘이 이토록 많은 재화(災禍)를 내린 것은, 반드시 그들이 무슨 실덕(失德)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일 것이다.
《추배도》와 《매화시》에 담긴 남송 멸망에 대한 예언
《매화시》 제2절은 다음과 같다. “호산일몽사전외(湖山一夢事全非), 재견운룡향북필(再見雲龍向北飛). 삼백년래종일일(三百年來終一日), 장천벽수탄미미(長天碧水歎彌彌).”
호산에서의 한바탕 꿈 일은 모두 그릇되었으니
구름과 용이 다시 북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누나.
삼백 년 동안 이어져 오던 것이 하루아침에 끝나니
아득한 하늘과 푸른 물을 보며 끝없는 탄식을 하노라.
湖山一夢事全非
再見雲龍向北飛
三百年來終一日
長天碧水歎彌彌
남송에 이르러 황제들은 더욱 어리석고 무능하였으며, 강남의 절반 땅에 구차하게 안주하며 온종일 노래와 춤 속에 빠져 지냈다. 게다가 백성들의 풍속 전체가 나태하고 부진하여 위에서 아래까지 색정과 향락에 취해 강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만 수에 달하는 송사(宋詞)는 대부분 문인소객(文人騷客)들의 사물을 그리워하고 정(情)에 아파하는 것을 읊었을 뿐, 고상하고 웅장하며 분발을 촉구하는 것은 드물었다.
남송이 임안(지금의 항주)에 도읍을 정한 이래로 서호(西湖) 곁에 자리 잡아 산을 의지하고 호수를 끼고 있었으며, 여기에 남송 황제들이 하루 종일 방탕하고 음란한 취몽(醉夢)에 빠져 지냈기에 이를 일러 “호산에서의 한바탕 꿈, 일은 모두 그릇되었네.”라고 한 것이다.
“구름과 용이 다시 북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누나.”란 천상(天象)의 기수(氣數)가 북쪽에 떨어져 북쪽에서 진룡천자(眞龍天子)가 탄생하며, 새로운 왕조가 북쪽에서 태어날 것임을 가리킨다. 남송 왕조가 취몽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마침 북방의 칭기스칸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큰 뜻을 세워 몽골을 통일하였고, 빠르게 자신의 판도를 확장해 나갔다. 몽골은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대거 남송을 침공했다.
“삼백 년 동안 이어져 오던 것이 하루아침에 끝나니”는 송조가 3백여 년(960년~1279년) 간 이어지다 마침내 멸망했음을 가리킨다. 1276년 원나라 군대가 임안을 침입하여 공제(恭帝)가 포로로 잡혔다.
“아득한 하늘과 푸른 물을 보며 끝없는 탄식을 하노라.”는 송조가 최후 멸망할 때 연출한 가장 장엄하고 비장한 국면을 비유한 것이다.
단심(丹心)을 남겨 역사책을 비춘 문천상
문천상(文天祥)은 자가 송서(宋瑞), 호는 문산(文山)으로 1236년 강서(江西) 노릉(廬陵) 둔화향(淳化鄉) 부전촌(富田村)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노릉 향교 시험에서 1등을 차지했고, 20세에 길주(吉州, 지금의 강서 길안)의 백로주서원(白鷺洲書院)에서 공부했으며, 같은 해 길주 공사(貢士)에 선발되어 부친을 따라 수도인 임안에 올라가 과거를 보았다. 전시(殿試)에서 그는 ‘어시책(御試策)’을 지어 당시의 폐단을 날카롭게 찌르고 개혁 방안을 제시하며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드러냈다. 이에 주고관(主考官)으로부터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쇠와 돌처럼 굳세다”는 찬사를 받았으며, 이종(理宗) 황제가 직접 601명 진사 중 장원(狀元)으로 선발했다.
후에 몽골 군대가 두 갈래로 송나라를 공격하자 대칸 뭉케는 서로(西路)를 이끌고 사천(四川)에 들어가 성도(成都)를 공격했다. 쿠빌라이는 동로(東路)를 이끌어 험준한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운남에서 북상해 담주(潭州, 지금의 장사)에 이른 또 다른 몽골군과 합세해 악주(鄂州, 지금의 무창)를 포위했다. 이에 남송 조야(朝野)가 깜짝 놀랐고, 환관 동송신(董宋臣)은 적을 피해 사명(四明, 지금의 영파)으로 천도하자고 청하여 이종이 언제든지 바다로 도망칠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천상은 진사의 신분으로 대담하게 글을 올려 “폐하께서 중국의 주인이시라면 마땅히 중국을 지키셔야 하고, 백성의 부모이시라면 마땅히 백성을 보호하셔야 합니다”라고 직언하며, 동송신을 참수해 민심을 안정시킬 것을 요청했다. 나중에 뭉케가 병사하고 쿠빌라이가 북쪽으로 돌아가 대칸의 자리를 다투려 했다. 남송의 우승상(右丞相) 가사도(賈似道)가 비밀리에 쿠빌라이에게 신하를 칭하고 조공을 바치는 것을 허락한 뒤에야 군사를 철수했다.
가사도는 돌아와서 조정에 “여러 곳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허의 보고를 했고, 위국공(衛國公)에 추가로 봉해져 막강한 권력을 한 몸에 쥐었다. 이어서 도종(度宗)이 즉위했으나 주색에 빠졌고, 가사도는 위로는 속이고 아래로는 숨기다보니 나랏일이 더욱 어지러워졌다. 문천상의 상소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고 그는 한가로운 한직(閑差)에 임명되었을 뿐이다.
그 후 십여 년 동안 문천상은 중간중간 서주(瑞州) 지주(知州), 강서제형(江西提刑), 상서좌사랑(尙書左司郎) 등을 지냈는데, 어떤 때는 반년 혹은 한 달 남짓 만에 그만두기도 했다. 나중에 가사도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또 파면당했다.
쿠빌라이가 제위에 오른 후 국호를 원(元)으로 바꾸고 1274년 20만 대군을 파견하여 수륙 양면으로 진격해 곧바로 임안을 취했다. 그 다음 해, 공주(贛州) 지주였던 문천상은 가재를 모두 털어 병사를 모집하고 말을 사들여 수개월 만에 3만의 의병을 조직해 원나라 군대에 맞섰다. 이 해 겨울, 문천상은 임안의 문호인 독송관(獨松關)을 긴급히 증원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관문이 이미 원군에 함락되었다. 급히 임안으로 돌아와 결사 항전하려 하였으나, 온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다투어 관직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문관은 겨우 6명만 남아 있었다.
1276년 정월, 사(謝)태후가 고집을 부려 항복을 주장했다. 원나라 장수 바얀(伯顏)은 반드시 승상이 직접 성 밖으로 나와 협상해야 한다고 지정했는데, 승상 진의중(陳宜中)은 뜻밖에도 밤새 도망쳐 버렸다. 이에 문천상이 급히 우승상 겸 추밀사도독(樞密使都督)으로 임명되어 사신으로 나가 화의를 논의했다. 협상 중에 문천상은 원나라 군대의 무력에 굴하지 않고 바얀을 준엄하게 꾸짖었으며,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뜻을 당당히 밝히고는 억류되었다. 다시 배에 태워져 북쪽으로 압송되던 중 문천상은 처음에는 단식으로 항의하였고, 나중에 진강(鎭江)의 호랑이 입 같은 위험 속에서 탈출했다.
원나라 군대가 이간계를 펼쳐 문천상이 이미 원나라에 항복했으니 남쪽으로 돌아오는 것은 원나라 군대를 위해 성을 넘겨받기 위함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바람에, 문천상은 거듭 의심과 경계를 받으며 풍찬노숙 속에 생사를 넘나드는 두 달을 보내고 간신히 온주(溫州)에 도착했다. 이때 조정은 이미 항복 문서를 올렸고, 공제는 대도로 압송되었으며, 육수부(陸秀夫) 등은 7세의 어린 단종(端宗)을 복주(福州)에서 옹립했다.
문천상은 또 조서를 받들어 복주로 들어가 추밀사를 맡았으며, 동시에 도독제로군마(都督諸路軍馬)가 되어 남검주(南劍州, 지금의 복건성 남평)로 건너가 도독부를 설치하고, 사람을 각지로 보내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며 각지에서 병사를 일으켜 적을 죽일 것을 호소했다. 가을에 원나라 군대가 복건으로 쳐들어오자 단종을 모시고 바다로 도망쳐 광동 일대에서 배를 타고 떠돌아다녔다.
1277년, 문천상은 군대를 이끌고 용암(龍岩), 매주(梅州)로 주둔지를 옮겨 江西로 진격했다. 우도(雩都, 지금의 강서성 남부)에서 원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흥국(興國)을 함락시켰으며, 공주 10현과 길주(吉州) 4현을 수복하여 민심이 크게 진동했다. 강서 각 로(路)에서 호응하여 전국적인 항원(抗元) 투쟁이 다시 일어났고 문천상의 호령이 강회(江淮) 일대까지 미쳤으니, 이는 그가 항원을 주장한 이래 가장 유리한 형세였다. 하지만 원군의 주력이 문천상의 흥국 대영(大營)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문천상은 중과부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철수하였으나 여릉(廬陵)과 하주(河州, 지금의 복건 장정長汀)에서 패배하여 손실이 막심했으며 처자식까지 원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1278년 봄 말, 단종이 병사하자 육수부 등은 다시 6세의 어린 황제를 옹립했고, 조정은 광동성 신회현(新會縣)에서 50여 리 떨어진 바다 속의 좁은 모래톱으로 천도했으며 문천상에게 신국공(信國公)을 추가로 봉했다. 겨울에 문천상은 군대를 이끌고 조주(潮州) 조양현(潮陽縣)에 주둔하여 산과 바다의 험준함을 믿고 군량을 비축하며 병사를 모집해 기회를 보아 다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원나라 군대가 수륙 양면으로 맹렬하게 진격해 맹공을 퍼부었다.
그해 연말, 문천상은 해풍(海豐) 북쪽의 오파령(五坡嶺)에서 원나라 군대의 기습을 받아 패배하고 체포되었으며, 즉시 용뇌를 먹고 자살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나라에 항복한 장홍범(張弘範)이 투항을 권유했으나 엄정하게 거절했다. 문천상은 일찍이 <과영정양(過零丁洋)>을 지어 자신의 뜻을 밝혔다.
고생 끝에 경서 한 권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고,
사방에서 일어난 전란 속에 4년의 세월이 쓸쓸히 흘러갔구나.
나라의 산하는 갈라져 부서지고 바람에 흩날리는 버들솜과 같고,
나의 부서진 신세는 비에 부대끼며 떠도는 개구리풀 신세 같구나.
이름마저 두려운 ‘황공탄’ 머리에서는 두려움을 말하였고,
외로운 바다 ‘영정양’ 속에서는 외로움을 탄식하노라.
사람의 삶이란 예로부터 누구나 한 번은 죽는 법이니,
오직 붉은 마음을 남겨 역사책을 환히 비추리라.
辛苦遭逢起一經,幹戈廖落四周星。
山河破碎風飄絮,身世浮沉雨打萍。
惶恐灘頭說惶恐,零丁洋裏歎零丁。
人生自古誰無死,留取丹心照汗青。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많은 사람이 찾아와 항복을 권유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원나라 통치자들은 또 그를 열악한 감옥에 집어넣어 3년 동안이나 투옥하고 고문하였으며, 원나라 궁궐에서 여종으로 일하고 있던 포로로 잡힌 처자들의 편지를 읽게 하고, 이미 원나라에 항복한 그의 남동생이 감옥으로 찾아오게 만들었다. 그러나 문천상은 온갖 고문과 다양한 이익의 유혹, 그리고 숱한 혈육의 정에도 흔들리지 않고 늠름하게 《정기가(正氣歌)》를 지어 역사적 인물들의 불멸의 업적을 찬양하고, “이러한 정기 온 세상에 가득하여 늠름하고 장렬함이 만고에 전해진다. 이러한 정기 해와 달을 꿰뚫으니 살고 죽음 따위 어찌 논하리오?”라는 지조를 토해내었다.
머지않아 문천상은 살해당했으니, 향년 47세였다.
남송의 멸망
가사도는 비록 살해당했으나 이때의 남송 이미 풍비박산의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1275년 10월, 원나라 군대는 세 갈래로 나뉘어 임안으로 진격했다. 그 다음 해 정월, 남송은 마침내 원군 총사령관 바얀에게 옥새를 바치고 항복을 선언하며 원조의 번속 소국(藩屬小國)이 되기를 청했다. 그러나 원군은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3월에 임안으로 진입하였으며, 송공제 조현(趙顯)과 전태후 및 모든 관료와 태학생들이 포로가 되어 대도로 압송되었다. 송 공제는 원세조에 의해 영국공(瀛國公)으로 강등되었고, 나중에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남송의 수도 임안이 함락된 후, 문천상과 장세걸(張世傑) 등은 어린 단종(端宗)을 옹립했고, 나중에 또 조병(趙昺)을 황제로 옹립했다.
1279년, 잔존한 송나라 군대는 패전한 후 벼랑 끝 궁지에 몰렸다. 포로가 되기를 원치 않았던에, 대신 육수부는 겨우 9세인 어린 황제를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으며, 대장 장세걸은 양태후를 보호하며 탈출을 시도했으나 결국 갑작스러운 폭풍우에 휘말려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다. 남송 왕조는 이렇게 역사 무대에서 완전히 막을 내렸다. 그러나 악비, 문천상 등이 연기한 충의(忠義)의 노래는 천고에 아름다운 향기를 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