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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중국문화가 또 한번 휘황했던 송조(宋朝) (9)

(960년—1279년)

심연(心緣)

【정견망】

문학 및 사학편

문학

송조 문학의 주류는 사(詞)였다. 사는 민간에서 유래한 것으로 당에서 시작되었고 오대(五代)에 흥성하여 양송(兩宋 북송과 남송)나라 시기에 가장 성황을 이뤘다. 사는 송조 문단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며 당시(唐詩)와 전후로 서로 빛을 발해 ‘당시송사(唐詩宋詞)’라는 말이 생겼으며 후대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송사는 수량이 방대해 근현대인 당규장(唐圭璋)이 편찬한 《전송사(全宋詞)》에는 1330여 명의 사인(詞人)을 수록했고 작품은 19900여 수에 달한다.

송사(宋詞)는 제재가 광범위해서, 전후로 완약파(婉約派)와 호방파(豪放派) 등 여러 예술적 스타일이 나타났다. 표현 수법에 있어서도 더욱 다양화되어 서정과 경치 묘사 외에 포서(鋪敘, 자세히 펼쳐 서술함)와 의론(議論)을 중시했고, 시(詩)를 사로 썼으며, 심지어는 문장(文)을 사로 쓰기도 했다. 게다가 형식 면에서는 송초(宋初)의 소령(小令) 위주 작법에서 발전하여 만사(慢詞)를 많이 썼고, 아울러 적지 않은 새로운 사조(詞調)를 만들었다.

당조에 수많은 대시인이 출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송조에도 안수(晏殊), 유영(柳永), 소식(蘇軾), 이청조(李淸照), 신기질(辛棄疾), 강기(姜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의 대가들이 출현했다.

유영(柳永, 약 987년~1053년)은 자가 기경(耆卿)이며 복건 숭안(崇安) 사람으로, 북송 사단(詞壇)에서 영향력이 가장 컸던 사인 중 한 명이다. 그는 장조(長調) 체재를 발전시켰고, 민간의 비속한 언어와 포서 수법을 능숙하게 구사해 비교적 복잡한 내용을 엮어냄으로써 당시의 사회생활을 반영했다. 그의 사(詞)는 농후한 시민 기품을 지니고 있어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소식(蘇軾, 1037년~1101년)은 자가 자첨(子瞻)이며 호가 동파거사(東坡居士)로 사천 미산(眉山) 사람이다. 그는 북송 문단의 영수로서 시와 사에 모두 능했다. 그는 시를 사의 경지로 가져와 시의 특정 표현 수법을 사를 지을 때 썼을 뿐만 아니라, 사를 시와 마찬가지로 뜻을 말하고 영회(詠懷)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여겼다. 소식의 사는 환상적인 낭만 정신이 풍부하고 웅장하고 거대한 의경(意境)을 지니고 있어, 호매하고 대담한 개인 성격과 낙관적인 처세 태도를 잘 드러낸다. 그는 송사 호방파(豪放派)의 창시자로, 대표작으로는 <수조가두(水調歌頭)>, <염노교ㆍ적벽회고(念奴嬌ㆍ赤壁懷古)> 등이 있다.

이청조(李淸照, 1084년~약 1155년)는 호가 이안거사(易安居士)이며 제주 장구(齊州章丘) 사람으로, 남송 초기의 저명한 여류 사인이다. 그녀의 사는 은근하고 함축적이며, 스타일이 청신한 것으로 유명하여 완약파의 대표 인물이다. 그녀는 삶의 거대한 변화로 인해 그녀의 작품도 남쪽 천도를 분기점으로 전후기의 차이가 있다. 전기(즉 북송시기)의 사는 기조가 즐겁고 명쾌한 반면 후기의 사는 처량한 신세와 국가의 흥쇠에 대한 감회로 가득 차 있다.

신기질(辛棄疾, 1140년~1207년)은 자가 유안(幼安), 호는 가헌(稼軒)으로 제주 역성(齊州曆城, 지금의 산동 제남) 사람이다. 그는 남송의 저명한 애국지사이자 일대(一代)의 사풍(詞風)을 개척한 뛰어난 문학가이다. 그는 소식의 호방한 스타일을 계승해 발전시켰으며, 풍부한 민간 언어를 흡수하고 대량의 산문화된 사구(詞句)를 사용해 필력(筆力)이 웅건하고 스타일이 다양하며 사의 경계를 개척했다. 그가 창작한 사는 매우 많아 현존하는 <가헌사(稼軒詞)>에 총 600여 수가 실려 있으며, 양송(兩宋)의 사인 중 작품이 가장 많은 편이며 내용도 아주 광범위하다.

남송 후기에 이르러 강기(姜夔)를 대표로 하는 일군의 사인들은 장법(章法)과 음률을 따지기 시작했는데, 문학사에서는 이를 격률사파(格律詞派)라 부른다. 강기의 사는 종종 영물(詠物)과 서정을 결합해 은근하고 심원하며, 맑고 텅 비어 정교하고 치밀하게 지었으며 대표작은 <양주만(揚州慢)>이다.

송조에는 대량의 사 작품 외에도 새로운 문학 형식인 화본소설(話本小說)이 발전했다. 화본소설은 당대에 싹터 당시에는 ‘설화(說話)’ 혹은 ‘시인소설(市人小說)’이라 불렀다. 송대에 이르러 도시가 날로 발전함에 따라 시민 계층의 문화 오락 생활 수요에 부응하는 ‘설화’가 당시 중요한 문학 형식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송나라 때의 ‘화(話)’란 이야기를 뜻하므로 ‘설화’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고, 설화의 대본을 가리켜 ‘화본(話本)’이라 했다. 설화의 내용은 설경(說經 경전을 설명), 강사(講史 역사를 말함), 소설(小說) 등이 있었는데 그중 소설이 가장 인기가 많았다. 송대 화본으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에는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오대사평화(五代史平話)>,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遺事)> 및 <경본통속소설(京本通俗小說)> 등이 있다.

화본은 중국 문학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원·명 시대 이후의 적지 않은 장회소설(章回小說)들은 대개 송대 화본을 기초로 점차 발전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외에 희극(戲劇) 예술 역시 송조 때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다. 1959년 산서(山西) 후마(侯馬)의 금나라 시대 동씨(董氏) 무덤에서 발견된 연극 무대 모형을 보면 당시 무대 설치가 이미 상당히 완비되어 있어 위쪽에서 5명의 배역이 한창 ‘작장(作場 작업터)’을 하고 있었으니, 말(末), 단(旦), 추(丑), 정(淨)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자태가 생생하여 그야말로 상당히 성숙한 무대 예술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송나라 경내에서 유행하던 것으로는 괴회희(傀儡戲 인형극), 영희(影戲, 그림자 연극), 잡극(雜劇) 등이 있었다. 괴뢰희란 꼭두각시놀음으로 종류가 매우 많았다. 영희는 처음에는 종이로 오려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가죽(당나귀 가죽이나 양 가죽)을 사용했기에 피영희(皮影戲)라고도 불렀다. 잡극은 당대(唐代)의 참군희(參軍戲)에서 발전·변화해 나온 것으로 당나라 참군희의 배역은 겨우 두 명뿐이어서 주연을 ‘참군(參軍)’이라 하고 조연을 ‘창두(蒼頭)’라 하였으며 줄거리는 대개 비교적 소박했다. 송대의 잡극은 참군희의 현실 풍자 정신을 계승했으나 줄거리가 비교적 복잡하고 배역도 4~5명에서 심지어 7명까지 늘어났다.

사학

송조 사학의 가장 두드러진 성취는 북송의 저명한 사학가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鑒)>으로, 이는 중국 최초의 편년체 통사(通史)이다. 총 294권이며, 위로는 주(周) 위열왕(威烈王) 23년(기원전 403년)의 삼가분진(三家分晉)에서 시작해 아래로는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현덕(顯德) 6년(959년)에 이르기까지 전국시대부터 오대 시기에 이르는 1362년의 역사를 기록했다.

<통감>은 재료가 풍부하고 고증이 치밀하며, 책을 편찬할 때 근거로 삼은 자료는 정사(正史) 외에도 잡사(雜史)가 무려 322종에 달해 대개 한 가지 일을 3~4종의 자료로 얽어 만들었기에 사료의 진실성이 정사보다 훨씬 낫다. 사마광이 이 책을 쓴 목적은 “오직 국가의 성쇠와 생민의 휴척(休戚 휴식과 근심)에 관계되는 것으로, 선한 것은 법으로 삼을 만하고 악한 것은 경계로 삼을 만한 것을 취하는 것”에 있었으며, 책의 대부분 분량은 역대 치란(治亂)의 성패와 안위(安危)의 자취를 기록했고 문화 등의 방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적게 기록했다. 이 책은 후대의 사학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자치통감> 외에도 비교적 저명한 사학 저작으로는 남송의 사학가 정초(鄭樵)가 편찬한 <통지(通志)>와 남송의 사학가 원추(袁樞)가 편찬한 <통감기사본말(通鑒紀事本末)>이 있다. <통지>는 총 200권이다. 가장 큰 공헌은 ‘이십략(二十略)’에 있으며, 이것이 이 책의 정화인데 그중 씨족(氏族), 육서(六書), 칠음(七音), 도읍(都邑), 곤충초목(昆蟲草木) 등 5개 략은 이전 역사책에 없던 새로운 것이다. 여기서 육서는 글자를 논하고, 칠음은 음운을 논한 것으로 정초의 창안이다.

<통감기사본말>은 중국 최초의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역사 저작이다. 송 이전의 중국 사서에는 오직 편년체와 기전체의 두 가지 체제만 있었는데 이 두 체제는 각각 결점이 있었으니, 편년체는 연도를 뼈대로 삼으므로 “어떤 일은 몇 권씩 떨어져 있어 처음과 끝을 연계해서 참고하기 어렵고”, 기전체는 인물을 위주로 삼으므로 “어떤 일은 여러 편에 거듭 나타나 주객을 분간하기 어렵다.” 때문에 독자들에게 일정한 어려움을 주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원추는 <자치통감>을 개편해 문목(門目)을 구별하고 1300여 년의 사적을 총괄하여 239개 목(目)으로 예속시켰으며, 삼가분진(三家分晉)에서 시작해 주 세종의 정벌로 끝을 맺되 일마다 한 편씩 각자의 시작과 끝을 갖추게 했기에 ‘기사본말(紀事本末 일의 본말을 기록했다는 의미)’이라 이름 붙였다. 원추의 저술은 역사 편찬학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게다가 양송 시기의 당대사(當代史) 편수 역시 현저한 성취를 거두었다. 송조 정부는 전문적인 사관(史官)을 두어 각각 실록(實錄), 국사(國史), 회요(會要) 등의 책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내용은 모두 전 시대의 같은 종류 책들보다 상세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송회요집고(宋會要輯稿)> 같은 것은 청 가경(嘉慶) 연간에 <영락대전(永樂大典)>에서 채집해 모은 것으로 원래 책은 2200여 권이었으나 채집본은 비록 비어 있고 온전하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약 500권에 달한다. 그중 7~8할의 사료는 <송사(宋史)>에도 없는 것들로, 송대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의 방면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참고 도서이다.

민간 개인이 편찬한 당대사 서적 중 비교적 뛰어난 거저(巨著)로는 이도(李燾)의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鑒長編)>이 있다. 이 책은 오직 북송 9조(朝)의 역사적 사실만을 기록했는데 원본은 유실되었으며, 오늘날 전하는 520권 본은 청나라 사람들이 <영락대전>에서 채집해 다시 편차를 나누어 엮은 것이다. <장편>은 채록이 광범위하고 고증과 논의가 상세하여 북송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저작이다.

또 이심전(李心傳)의 <건염이래계년요록(建炎以來系年要錄)>은 오직 송 고종 일조(一朝)의 역사적 사실만 전문적으로 기록했다. 이 책은 이도의 <장편>을 잇기 위해 지은 것으로 원본은 유실되었으며, 오늘날 전하는 <요록> 역시 청나라 사람들이 <영락대전>에서 채집해 엮은 것이다. 이심전에는 <요록>과 서로 경위(經緯)를 이루는 또 다른 저작인 <건염이래조야잡기(建炎以來朝野雜記)>가 있는데, 이는 남송 전기의 전장제도(典章制度)를 전문적으로 기록하여 사료적 가치 역시 매우 높다.

또한 서몽신(徐夢莘)의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은 송 휘종, 흠종, 고종 세 조(朝)와 금나라의 화친 및 전쟁 등 모든 일을 전문적으로 기록했으며, 책 속에는 송·금 교섭 및 화전(和戰)에 관한 언론과 기록을 광범위하게 수집해 넣었고 그 안에서 인용한 사료의 가치가 매우 높다.

양송 시기의 지서(志書)는 대량으로 출현했을뿐더러 편찬 체제도 점차 완비되어 갔는데, 그중 한 지역을 전문적으로 기록한 지방지(方志)로는 범성대(範成大)의 <오군지(吳郡志)>, 양극가(梁克家)ㆍ진부량(陳傅良)의 <순희삼산지(淳熙三山志)>, 시숙(施宿)의 <가태회계지(嘉泰會稽志)>, 주종(周淙)의 <건도임안지(乾道臨安志)> 및 잠설우(潛說友)의 <함순임안지(咸淳臨安志)> 등이 있다. 그 밖에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은 북송 말년 개봉(開封)의 번화한 광경을 전문적으로 기록했고, 주밀(周密)의 <무림구사(武林舊事)>, 오자목(吳自牧)의 <몽량록(夢粱錄)>은 남송 항주의 도시 상황을 전문적으로 기록해 모두 사료적 가치가 풍부한 지방사 저작들이다. 전국성 지서로는 낙사(樂史)의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왕존(王存)의 <원풍구역지(元豐九域志)> 및 왕상지(王象之)의 <여지기승(輿地紀勝)> 등이 있다.

금석학(金石學)과 유서(類書)

금석학은 송대에 시작되었다. 당시의 금석학자들은 주로 다음 세 가지 방면에 주목했다:

① 고대 기물 및 고대 기물 탁본의 수집;

② 고대 기물의 감정 및 금석 문자의 고증과 해석;

③ 고대 기물 및 금석 문자를 이용하여 역사 기록을 고증하는 것. 주요한 금석학 저작으로는 북송 때 구양수(歐陽修)의 <집고록(集古錄)>, 여대림(呂大臨)의 <고고도(考古圖)>, 왕보(王黼)의 <선화박고도(宣和博古圖)>; 남송 때 조명성(趙明誠)의 <금석록(金石錄)>, 설상공(薛尙功)의 <역대종정이기관식법첩(曆代鍾鼎彝器款識法帖)>, 홍준(洪遵)의 <천지(泉志)>, 홍적(洪適)의 <예석(隸釋)>과 <예속(隸續)> 등이 있다.

북송 사람들이 편찬한 유서(類書) 중 중요한 것으로는 <태평어람(太平御覽)>, <태평광기(太平廣記)>, <문원영화(文苑英華)>와 <책부원귀(冊府元龜)>가 있는데, 이를 일러 4대 부서(四大部書)라 칭한다. 그 밖에 남송의 왕응린(王應麟)이 편찬한 <옥해(玉海)> 등이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7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