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객(長袖客)
【정견망】
추분이 되었다.
아침저녁으로 이미 제법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태양은 하루가 다르게 일찍 저물어간다. 들판의 곡식은 이미 익었고, 풀잎에 맺히는 이슬도 점점 더 무거워진다.
천지간에 거대한 변화가 조용히 일어나고 있다.
고인(古人)은 이날을 ‘추분(秋分)’이라 불렀다. ‘분(分)’에는 똑같이 나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춘추번로(春秋繁露)》에서는 “추분이란 음과 양이 반씩 나뉘는 때이다. 그러므로 낮과 밤이 균등하고 춥고 더운 기운이 평안해진다”라고 했다. 고인의 눈에 추분은 단순히 달력상의 절기 그 이상이었다. 낮과 밤의 길이, 추위와 더위의 진퇴, 풀잎의 무성함과 시듦은 모두 사람들에게 천지 음양의 운행이 이미 특정한 위치에 이르렀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추분이라는 단 하루만 본다면 그 속의 진정한 오묘함을 알아채기 어렵다. 시선을 추분의 앞과 뒤로 넓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하나의 온전한 원으로 이어보면, 사계절은 마치 천지가 천천히 그려낸 한 폭의 태극도와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겨울에는 대지가 마치 적막에 잠긴 듯 보인다. 풀잎과 나무는 시들고 벌레와 짐승은 굴속에 웅크리며, 수많은 생명 활동이 안으로 수렴된다.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는 겨울 석 달을 ‘폐장(閉藏)’이라 일컬었다. ‘장(藏)’이란 사라짐이 아니라 생명이 외부로 드러난 모습에서 내부의 보존으로 전환되는 것을 뜻한다. 풀과 나무는 생기를 뿌리에 거두어들이고, 씨앗은 흙 속으로 숨으며, 동물은 웅크린 채 또 다른 시절을 기다린다.
그러나 한 해 중 음(陰)의 기운이 극에 달한 바로 그때, 변화는 이미 조용히 시작되고 있다.

동지(冬至)가 되면 낮이 가장 짧아진다. 만약 한 해 동안 태양이 뜨고 지는 위치를 오래 관찰해 본다면, 동지에 이르러 태양이 뜨고 지는 위치 역시 한 해의 한계 극점에 도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태양은 원래의 방향을 따라 계속 나아가지 않고 방향을 돌리기 시작한다.
고인은 이를 가리켜 “동지에 일양이 생겨난다(冬至一陽生)”고 했다. 비록 이때는 매서운 한기가 기승을 부리고 얼음과 눈이 채 녹지 않아 봄은 여전히 아득해 보이지만, 천지가 운행하는 방향은 이미 바뀌어 있는 것이다. 음이 극에 달한 곳에서 양이 이미 싹트고 있는 셈이다. 새로운 생기는 바로 가장 깊은 겨울의 품속에 숨어 있다.
그러므로 봄은 결코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시작은 어쩌면 단 한 가닥의 온기일지 모른다. 뒤이어 얼음과 눈이 녹아내리고, 풀과 나무가 싹을 틔우며, 새와 짐승이 활기를 띠면서 한겨울 동안 적막했던 대지가 다시 생기를 되찾는다. 《황제내경》은 봄 석 달을 ‘발진(發陳)’이라 부르며 “천지가 함께 생장하고 만물이 이로써 영화로워진다”고 했다. 본래 안으로 갈무리되었던 생명이 바깥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하고, 양기가 점차 자라나며 만물은 그에 따라 싹트게 된다.
춘분에 이르러 낮과 밤은 다시 거의 반반으로 나뉜다. 그러나 천지는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춘분이 지난 후 낮은 계속 길어지고 양기(陽氣)는 계속 불어나며, 풀과 나무는 싹틈에서 무성함(繁茂)으로 나아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여름으로 접어든다.
여름은 생명이 온전히 피어나는 계절이다. 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온갖 풀과 꽃은 다투어 피어나며 만물이 왕성하게 자라난다. 《황제내경》은 여름 석 달을 ‘번수(蕃秀)’라 부르며 “천지의 기운이 서로 교감하고 만물이 꽃 피고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봄에 싹튼 생명은 여름에 이르러 아낌없이 밖으로 발산되며, 천지간에는 한 차례 번성한 기운이 가득해진다.
그러나 가장 음미할 만한 변화는 바로 이러한 번성이 극에 달했을 때 비로소 일어난다.
하지(夏至)가 되면 낮이 가장 길어지고 양기 또한 극성함에 이른다. 태양이 뜨고 지는 위치는 동지와는 정반대인 또 다른 극점에 이른다. 그리고 태양은 다시 방향을 튼다. 천지는 가장 성대할 때 멈춰 서지 않는다.
고인은 이를 통해 양이 극에 달할 때 이미 음이 싹트기 시작함을 보아냈다. 하지가 지난 후 날씨는 여전히 무덥고 나무는 여전히 우거지며 숲속에는 매미 소리가 진동하지만, 천지가 운행하는 방향은 이미 남모르게 바뀌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태극도가 가장 깊은 의미를 지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음과 양이 서로를 감싸안으며 나아간다. 양이 성한 가운데에 점차 음이 깃들고, 음이 성한 가운데에 다시 양이 있다. 태극도가 보여주는 것은 세상을 단순히 검은색과 흰색으로 반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음과 양이 늘 서로 자라나고 줄어들며 끊임없이 전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양이 극에 달하면 음으로 향하기 시작하고, 음이 극에 달하면 다시 양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극성한 가운데 이미 전환점이 잉태되어 있고, 극도로 쇠퇴한 가운데 이미 새로운 시작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대로 된다(物極必反)”고 말한다. 만약 이를 그저 처세의 격언 정도로만 여긴다면 쉽게 흘려보내기 쉽다. 그러나 천지는 이 이치를 한 해의 운행 그 자체로 써 내려간다. 태양이 뜨고 지는 위치는 동지와 하지 사이를 왕복하고, 낮은 짧아지다 가장 길어진 뒤 다시 짧아지며, 추위가 다하면 봄이 나오고 더위가 극에 달하면 가을이 찾아온다. 천지는 극점에 다다르면 곧 방향을 돌린다.
하지 이후 무더위가 한동안 가시지 않더라도 천지의 운행 방향은 이미 바뀌어 있다. 날이 갈수록 낮은 짧아지고 아침저녁은 서늘해지며, 풀과 나무 역시 왕성한 생장으로부터 성숙과 수렴으로 돌아선다.
추분에 이르러 낮과 밤은 다시 거의 반반인 위치에 이른다. 그러나 같은 ‘나뉨(分)’이라도 추분과 춘분의 방향은 정반대이다.
춘분 이후에는 양기가 자라나며 천지가 여름의 번성함을 향해 나아가고, 추분 이후에는 음기가 자라나며 천지가 겨울의 수렴을 향해 나아간다. 똑같이 낮과 밤이 반반인 시점이지만 하나는 번성함을 향하고, 다른 하나는 갈무리로 향한다.
그리고 이 ‘전환’은 비단 눈에 보이지 않는 음양의 소장(消長)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은 이미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고 있다.
고인은 추분을 삼후(三候)로 나누었다. “초후(一候)에는 우뢰가 소리를 거두고, 이후(二候)에는 땅속 벌레가 흙으로 구멍을 막으며, 삼후(三候)에는 물이 마르기 시작한다”라고 했다.
여름철 천지를 뒤흔들던 우뢰 소리는 점차 잠잠해지고, 작은 벌레들은 굴 입구를 봉하며 다가올 추위에 대비하고, 천지간의 물길도 서서히 줄어든다. 우뢰, 벌레, 물은 본래 전혀 다른 대상이지만 이때만큼은 입이라도 맞춘 듯 똑같은 변화, 즉 ‘거둠(收)’을 향해 나아간다.
마치 천지가 무언의 신호를 보내면 만물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에 응답하는 것만 같다.
이것이야말로 추분을 가장 세심히 바라봐야 할 이유이다. 추분은 가을의 정지된 중점이 아니라 천지 운행 속에서 나타나는 명확한 전환점이다. 만약 눈앞의 현상만 본다면 춘분과 추분은 매우 닮아 보이지만, 그것들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살펴보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춘분의 균형은 번성함을 향해 나아가고, 추분의 균형은 갈무리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므로 천지의 ‘평(平)’이란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음양의 소장(消長) 과정 속에서 서로 교차하는 한순간일 뿐이다. 진정한 균형이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저마다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다.
이렇게 다시 돌이켜 사계절을 바라보면 태극도는 비로소 살아 움직이게 된다.
동지에 하나의 양이 생겨나고 양기가 점차 자라나 춘분을 거쳐 하지로 향하며, 하지에 하나의 음이 생겨나고 음기가 점차 자라나 추분을 거쳐 다시 동지로 향한다. 극점에 이르면 방향을 돌리고, 돌고 나면 또 다른 극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끝없이 되풀이된다.
천지는 정지된 태극도 한 폭을 그려놓은 것이 아니라 사계절을 통해 이 태극도가 스스로 회전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떠한가? 중국 고인의 인식 속에서 사람은 결코 천지 밖에서 사계절을 관전하는 방관자가 아니었다. 사람은 그 천지 한가운데에 함께 살아가고 있다.
《황제내경》은 봄 석 달을 ‘발진’, 여름 석 달을 ‘번수’, 가을 석 달을 ‘용평(容平)’, 겨울 석 달을 ‘폐장’이라 일렀다. 천지가 봄에 나고, 여름에 자라며,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갈무리하듯 인간의 생명 또한 사계절에 따라 조율된다. 가을이 오면 천지가 외부 발산에서 수렴으로 돌아서듯 사람 역시 ‘정신을 거두어 갈무리해야’ 하고, 겨울에 만물이 닫혀 갈무리되듯 사람 또한 ‘갈무리하는 도리’에 순응해야 한다.
따라서 옛사람들이 말하는 사시양생(四時養生 사계절 양생)의 깊은 뜻은 단순히 계절에 따라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어야 하는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이 천지의 리듬에 어떻게 발맞추어 나아가야 하는지, 사계절을 거스르지 않고 음양을 어기지 않는 법을 담고 있다. 인간은 천지 사이에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거대한 천지의 운행 그 자체와 함께하고 있다.
다시 한 해의 변화를 되돌아본다. 봄에 낳고, 여름에 기르며,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갈무리한다. 음양은 자라고 줄어들고, 추위와 더위는 오고 가며, 만물 또한 그에 따라 피고 지며 바뀐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코 무질서하지 않고 저마다의 질서를 따르며 자신만의 리듬을 지니고 있다.
추분은 마침내 사람이 사계절의 흐름 그 한가운데에 서서 이 모든 것을 바라보게 만든다. 하루 낮과 밤의 반반인 시각에서 음양의 소장을 볼 수 있고, 음양의 소장에서 다시 한 해 사계절의 순환하는 운행을 볼 수 있다.
한 폭의 태극도는 비록 검은색과 흰색 두 가지 색상에 불과하지만, 천지는 봄·여름·가을·겨울을 빌려 그 이치를 해마다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 보이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진실로 천지간에 운행하는 이 태극도를 참되게 바라보게 될 때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고인이 천지를 마주하고 저절로 경외심을 품었던 까닭을 말이다. 사계절은 아무런 말이 없지만, 곳곳에서 창세주의 지혜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