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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서약 (誓約)

베트남 대법제자

【정견망】

오디오: 서약 (MP3)

서약

《열자·탕문편(湯問篇)》에 다음과 같이 천고에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기주(冀州)의 남쪽, 하양(河陽)의 북쪽에 태항(太行)과 왕옥(王屋) 두 산이 있었는데, 사방 7백 리에 높이가 만 길이나 되었다. 산 북쪽에는 나이가 구십에 가까운 노인이 살고 있었으니 이름이 우공(愚公)이었다. 두 산이 그의 집 앞에 가로놓여 출입하는 길을 가로막으니 드나들 때마다 늘 멀리 우회해야 했다. 이 때문에 우공은 몹시 괴로워했다.

어느 날 그는 온 가족을 불러 모아 의논하며, 예주(豫州)의 남쪽과 한수(漢水)의 북쪽으로 곧바로 통하는 길을 트고 싶다고 했다. 의논을 거친 끝에 그는 앞에 가로놓인 두 산을 평평하게 파내기로 굳게 결심했다. 다음 날 우공은 짐을 짊어질 수 있는 자손 세 명을 이끌고 정과 곡괭이로 돌을 쪼개고 흙을 파내어, 파낸 흙과 돌을 발해(渤海)의 끝에 갖다 버렸다. 이웃인 하곡(河曲)의 지수(智叟 지혜로운 노인)가 이를 보고는 우공을 비웃으며, 그들의 미약한 인력으로 그토록 높은 산봉우리를 마주하여 어떻게 그것을 평평하게 옮길 수 있겠냐고 여겼다.

그러나 우공은 굳건하게 대답했다.

“자자손손(子子孫孫)은 끝이 없으되 산은 불어나지 않으니, 어찌 평평해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는가?”

우공은 사람의 생명은 비록 한계가 있으나 자손 후대는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대를 이어 끈질기게 해나가기만 한다면 산은 더 높아지지 않을 것이니 언젠가는 마침내 그것을 평평하게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우공은 비록 나이가 구십에 가까웠으나 늙고 힘이 빠진다고 해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적은 것이 모이면 많아질 수 있고 미약한 것도 거대한 힘으로 모일 수 있음을 굳게 믿었다. 비록 하루에 흙 한 삼태기, 돌덩이 하나밖에 옮기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루하루 또 해를 거듭하며 꾸준히 지속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눈앞의 거대한 산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흔들림 없는 신념과 굽히지 않는 의지가 마침내 천제(天帝)를 감동시켰다. 그리하여 천제는 과아씨(誇蛾氏)의 두 아들에게 명하여 태항과 왕옥 두 산을 업어가게 했다. 이로부터 기주의 남쪽, 한수의 북쪽에는 더 이상 높은 산이 가로막지 않게 되었다.

“태산은 흙덩이를 사양하지 않기에 그 커다람을 이룰 수 있고, 하해(河海)는 가는 물줄기를 가리지 않기에 그 깊음을 이룰 수 있다.”

세간의 모든 선행은 어쩌면 단지 한 조각 미약한 일념(一念), 일거(一擧), 일언(一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한 알의 티끌, 한 방울의 가랑비와 같아서 얼핏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날마다 쌓이고 달마다 쌓이면 거대한 선념(善念)과 선과(善果)로 모일 수 있다. 곁에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여 하루에 한 가지 선을 행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며, 은은한 미소를 짓고,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는 등…… 점점이 쌓이면 선(善)의 축적이 될 수 있으며, 작은 선을 쌓아 큰 덕을 이르고, 작고 미미한 것을 쌓아 원만(圓滿)에 이르게 된다.

어떤 이들은 우공이 사실은 도(道)를 닦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옮기고자 했던 두 산은 사실상 자신의 몸속에 산처럼 무거운 업력(業力)을 상징하며, 산을 옮기는 과정에서 겪는 온갖 난관과 위험은 소업할 때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가지가지 힘겨운 험난함과 같다. 결국 천제가 우공의 정성 어린 마음에 감동받아 손을 내밀어 그를 도와 두 산을 옮겨주었다. 수련자에게 있어서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 진정한 정성과 흔들림 없는 신념은 마침내 더 높은 층차 생명의 보호와 성취를 얻게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우공이 산을 옮기는 것을 도왔던 이들은 또한 우공과 동일한 생명 체계 속의 다른 생명들로 볼 수 있으며, 우공을 끊임없이 비웃던 그 지수는 다름 아닌 스스로 총명하다고 여기는 세속의 사람이어서 수련자가 처한 경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그 역시 우공을 고험하는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고층 생명의 지혜와 세속 사람의 총명은 흔히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친구여: 나는 여기 계신 한 분 한 분이 모두 인생의 비바람을 겪었으며, 또한 산더미처럼 짓누르는 압박과 부담을 느껴보았으리라 믿는다. 언젠가부터 번잡한 인연과 끝없는 얽매임은 우리의 심신을 지치고 피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가장 어둡고 가장 힘겨운 순간에, 우리 생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어쩌면 진실하고 굳건한 서원이 울렸을지도 모른다. 즉, 정법정도(正法正道)를 구해 고해에서 벗어나며, 생명의 진정한 귀착처을 찾겠다는 서원 말이다.

이에 사부님께서 무변한 자비를 지니시고 우리 곁으로 오시어, 대법의 빛으로 우리 생명을 밝히시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비춰주셨으며, 이로써 한 차례 완전히 새로운 여정, 즉 수련의 길을 열어주셨다. 《만고기서(萬古奇書)》를 읽고 나서 우리는 모두 그 속에서 한없이 귀중한 진리를 깨달았을 것이다. 사람이 왜 사람이며, 인간이 존재하는 까닭을 알게 되었고, 삼계가 어찌하여 한바탕 미혹 속의 환경(幻境)과 같은지를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 각자는 자신이 짊어진 책임, 즉 사회에 대한 책임, 타인에 대한 책임, 그리고 생명 자체에 대한 책임을 더욱 명백히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또 사부님께서 제자를 위해 아주 오래고 무거운 업력을 감당하셨고, 억만 제자를 위해 무수한 것을 지불하셨으며, 나아가 세간에서 다 서술하기 어려운 비방, 오해, 그리고 고난을 도맡으셨음을 더욱 깊이 깨달았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비록 일문(一門)의 불가(佛家) 대법이 이미 전 세계 100여 개 국가와 지역에 널리 퍼졌으나, 일부 지역에서 수련자들은 여전히 박해를 견뎌내며 역사상 초기 기독교인들이 겪었던 300년의 박해라는 비장한 역사를 다시 재연하고 있다.

오늘 밤은 고요하면서도 수많은 상념이 교차하는 추석날 밤이다……

얼마나 많은 달빛이 조용히 떠올랐다가 조용히 서산으로 졌는지, 얼마나 많은 세세생생의 윤회와 변천을 겪었는지 알 수 없다. 게다가 또 얼마나 많은 선연(善緣)의 만남과 지음(知音)의 조우가 이 광활한 밤하늘 아래서 함께 생명의 꿈을 엮어왔을지 모른다. 천고에 변함없는 저 밝은 달은 여전히 묵묵히 인간 세상에 빛을 뿌리고 있다. 생각컨대, 그것은 우리가 걸어왔던 아득한 세월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며, 인간 세상의 희로애락과 상전벽해 또한 목격했을 것이다.

오늘 밤, 당신과 나는 다시 나란히 앉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그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역사적 그림 속에서 어떤 역할을 연기했는지 이미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명의 가장 깊은 곳에서 당신과 나는 모두 자신이 무엇 때문에 왔는지를 아주 분명히 알고 있다. 우리는 법을 위해 왔고, 그 최초의 서원을 위해 왔으며; 더욱이 사부님의 자비로운 빛이 언제나 우리 곁에서 지켜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추석 명절을 맞이할 때마다 세상 사람들은 종종 ‘단원(團圓)’이란 두 글자를 떠올린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사아(私我)와 자아(自我)의 협소함을 벗어나라고 가르쳐주셨다. 우리가 맑고 투명한 밝은 달을 우러러볼 때, 마음속에서는 깊은 연민이 솟구치며 지금 중국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친구들을 그리워한다——어쩌면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차가운 철창을 사이에 두고 창밖의 달빛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또 이국타향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친구들도 염려한다. 그들은 어쩌면 상처를 품은 채 머나먼 고국을 아득히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추석의 밝은 달이 해가 지는 곳에서 서서히 떠올라 부드러운 빛을 뿌리며 가을바람 속에 가볍게 흔들리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밝힌다. 그 한 가닥 가을바람은 친지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실어 나르며, 가장 진실하고 가장 경건한 소원을 기탁한다. 천지 사이에 우뚝 서서 이와 같은 달빛을 마주할 때, 어찌 풍경을 보고 감정에 젖어 천고에 전해지는 시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밤 밝은 달 아래 사람마다 모두 바라보건만,
가을날의 그리움은 누구의 집으로 떨어질지 알 수 없네.”

그러나 또 누가 알겠는가, 밝은 달이 떠오르기 전에 인간 세상의 상전벽해와 비참한 고통이 이미 수많은 가정을 감싸고 있었다는 것을. 홍진(紅塵)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전히 달콤한 환상에 빠져 추석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는지——온 가족이 둘러앉아 월병을 맛보고,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며, 단원을 함께 누리기를 바라는지.

그러나 밝은 달이 점차 중천에 이르렀을 때, 수련자가 짊어진 자비와 중생을 제도하는 사명도 마음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을 기운이 점점 깊어지고 쌀쌀함이 더욱 진해진다. 달빛 아래 한 층 흰눈을 덮어쓴 듯한 처마를 바라보며, 우리는 개인의 고독과 비환(悲歡 슬픔과 기쁨)에 잠기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여전히 고난 속에 있는 생명들을 떠올렸다.

천지와 밝은 달이 보는 아래, 사부님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무량한 감사는 밀물처럼 마음속에서 솟구친다. 이날 밤의 달빛은 단지 우리로 하여금 감회에 젖거나 슬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이 다정하고도 깊은 일깨움과 같다. 우리로 하여금 수련의 길에서 더욱 정진하게 하고, 손을 꼭 붙잡고, 사부님을 도와 구도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진상을 똑똑히 알리게 한다.

무명거사(無名居士)의 시 《달그림자 창을 지나며(月影過窗)》을 빌려, 이 순간 마음속 상념을 기탁해본다.

“달빛 창가 스친 세월 그 얼마던가, 이익과 색욕, 정과 명에 붉은 먼지 싫증 나네.
한평생 다툼은 천생의 빚 갚음이요, 인생의 무상함을 진정 아는 이 누구인가?
달빛 창가 스친 세월 그 얼마던가, 부귀영화 탐하다 헛되이 스스로 상처 입히네.
장한 뜻은 구름을 뚫어 온 사해에 울리건만, 티끌 한 알갱이를 그 누가 헤아리리오?

月影過窗幾度春,利色情名厭紅塵。
一世爭鋒千世償,人生無常幾人真?
月影過窗幾度春,貪戀凡塵空自傷。
壯志淩雲響四海,星塵一粒孰能量?

달빛 창가 스친 세월 그 얼마던가, 득실과 성패는 한바탕 꿈속의 일이어라.
인간 세상 객줏집에서 비로소 깨어나니, 그 옛날의 그 서원을 기억하고 있는가?
달빛 창가 스친 세월 그 얼마던가, 말에서 내려 수레 오르며 왁자지껄 바쁘구나.
잊지 말라, 좁은 길은 사람들로 붐비건만, 대도(大道)로 통하는 하늘엔 돌아오는 이 적어라.

月影過窗幾度春,得失成敗一夢中。
人間客棧方始醒,當年誓約可記清?
月影過窗幾度春,下馬登車熙攘忙。
莫忘小徑人擁擠,大道通天少人還。

달빛 창가 스친 세월 그 얼마던가, 시간은 금처럼 귀하도다
곧장 진·선·인(真·善·忍) 속으로 나아가, 인간 세상의 이 한세상을 다 내려놓으세.
달빛 창가 스친 세월 그 얼마던가, 원만 회귀함에 무엇을 그리 마음에 걸려하리오.
육도윤회에 더는 얽매이지 않고, 봉래(蓬萊)를 노닐며 고향을 깨달으리라.

月影過窗幾度春,一寸光陰一寸金。
直向真善忍中去,放盡人間這一生。
月影過窗幾度春,圓滿回歸何掛懷。
六道輪回不再羈,蓬萊遊曆悟故鄉。

자비로운 달빛이 구석구석을 비추어 세상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진정한 희망을 수많은 가정으로 되돌려 주기를 기원한다. 우리가 최초의 서원을 잊지 않고 굳건히 앞으로 나아가며, 수련의 길에서 서로를 부축하고 서로를 지켜주어 마침내 원만히 회귀하기를 기원한다. 서원을 이행하여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기를……

사부님께 추석 인사를 올립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4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