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전통문화, 현대 과학과 인류

곡청풍(谷清风)

【정견망 2026년 10월 4일】

머리말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아득한 홍황(洪荒)을 걸어왔다.

창룡(蒼龍), 푸른 용 한 마리, 만신창이가 된 늙고 지친 푸른 용 한 마리가 세계의 동쪽에 꼿꼿이 오만하게 서 있었다.

귀가 멀고 눈이 어두워 비틀거리고, 다리가 풀려 걸음걸이가 위태로웠다. 오랜 병고는 씻겨나가야 했고 신위(神威)는 다시 빛을 발해야 했다. 마침 그때, 거센 바람과 차가운 비가 몰아치고 마귀와 귀신들이 침입했다. 온 힘을 다해 맞서 싸웠다. 거듭 싸우다 거듭 패하며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굴하지도 비굴해지지도 않은 채, 극도의 비통함 속에서 기진맥진하고 심장이 멎어 쿵 하고 쓰러졌다. 영혼은 실오라기처럼 흩어져 구천(九天)을 향해 둥실 떠올랐다.

예전에 신룡(神龍)은 겁난(劫難)을 겪었으나 불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오늘 다시 천겁(天劫)을 만났으니, 앞날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신불(神佛)들은 불안해하고 모든 도(道)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지금은 옛날과 달라서 화근이 집안 내부에서 일어났다. 사령(邪靈)이 용의 자식으로 변장하여 요괴를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인심을 미혹하며, 용의 자손들을 마화(魔化)시켜 영혼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귀보(瑰宝)를 짓밟으니, 신주(神州)는 더러운 기운(瘴氣)으로 뒤덮이고 온 누리가 도탄에 빠졌구나……

一

백여 년 전, 인류는 큰 변화를 겪었다. 서구에서는 공업이 맹렬하게 발전하고 과학이 눈부신 진보를 이루었으며, 평등·자유·민주 등의 이념이 보급되고 특히 진화론과 무신론이 범람하면서 사람들은 갈수록 팽창하고 이기적이며 조급해졌다. 약탈과 팽창이 상시화되었고 이념의 확산이 유행처럼 번졌다.

바로 이러한 약탈과 팽창의 태세 속에서 현대 서양 문명은 고대의 동양 문명과 격렬한 충돌과 겨룸을 벌였다. 결국 고대의 동양 문명은 자리를 내어주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사회 체제 속에서 인류는 다 같이 과학 기술 발전 경쟁을 유일한 지상 과제로 삼는 생활 방식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람들의 인식은 점점 표면화되고 평면화되었으며 근시안적으로 변했다. 공리주의와 배물주의(拜物主義)가 지상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평등과 자유의 허울 아래 도덕적 마지노선을 부단히 돌파하며 점차 변이되어 가고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지난 백여 년 동안 과학은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하늘을 날고 바다를 누비며, 멀리 떨어진 곳과 통화하고, 자동차와 고층 빌딩,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 등등 말이다. 그러나 과학은 또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잃게 만들었다 —— 고요함, 여유, 아늑함, 파란 하늘, 맑은 물, 가족의 사랑, 우정, 진실함, 착함, 순박함, 겸손함, 원시적인 맛과 정취, 그리고 마음속의 신성(神性)까지도 말이다. 알아야 할 것은, 그러한 원시적인 것들과 원시적인 느낌 및 향유는 과학이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과학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신이 부여한 것이며 신에게 더욱 가까운 것이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깊이 생각해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환경 오염은 인류의 건강과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으며, 생태 파괴는 수많은 생종을 멸종시키고 생존 환경을 갈수록 험악하게 만들고 있다. 자원 고갈은 사람들이 먼 미래를 상상조차 감히 하지 못하게 만든다. 원자폭탄, 인공지능(AI)의 난동, 네트워크 붕괴 등 돌발적이고 파멸적인 재난들은 모두 큰 불예측성을 지니고 있다.

현대인의 삶은 모래 위에 빌딩을 짓는 것과 같아서, 에너지 기반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사실 에너지 문제뿐만이 아니다. 자세히 세어보면 이 외에도 수없이 많으며, 맞물려 돌아가는 사슬이 일단 끊어지면……

다시 보자, 사람들은 진정 행복해졌는가? 약간의 정신적 자극과 물질적 향락을 제외하면, 불안, 초조, 압박감, 긴장, 바쁨, 무관심, 고독, 이기심, 변태성이 인간 세상에 만연해 있다. 온갖 사회 문제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풀리지 않는 매듭이 이어지고 있다.

二

행복은 인류가 예로부터 변치 않고 추구해 온 화두이자 동경이며 추구였다. 행복의 개념과 정의 역시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이고 직관적이며 가장 보편적인 인식은 바로 ‘소유’, 특히 ‘물질의 소유’이다.

비록 행복의 내포는 매우 광대하지만, 사실 행복은 생명 하나의 느낌일 뿐이다. 만족, 유쾌, 편안, 즐거움, 흥분 등등 말이다.

사람에게 있어 도덕과 지혜를 기반으로 한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만약 단지 행복의 중심을 물질적 충족과 추구에만 두고 바닥이 없는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면, 인간은 영원히 행복을 좇아 동분서주할 뿐 진정한 행복을 소유하고 누리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현대적 관념은 전통 도덕의 구속을 내던지는 것이고, 현대 과학은 신을 배제하며 끊임없는 탐사와 경쟁을 특질로 삼는 것이기에, 현대 사회의 사람들이 왜 보편적으로 불안하고 바쁘며 긴장하고 억압받으며 고독한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신에게서 멀어졌고, 자연에게서 멀어졌으며, 도덕에게서 멀어졌고, 전통적인 문화 생활과 영혼의 삶에서 멀어졌다. 정의, 양심, 진리 등의 단어는 이미 사전에서 사라질 지경이다.

동양에서는 노자가 사람들에게 일러주었다: “만족할 줄 아는 자는 즐거워한다(知足者乐).”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반문과 힐문을 특징으로 삼곤 했다. 그것은 단순한 변론이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영혼을 두드려 묻는 것이었으며, 사람이 진정한 자신을 찾게 하고 깨어나게 하며, 최대한 욕망이 아니라 영혼으로 삶을 영위하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물론 물질생활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며, 인간의 물질생활에 대한 추구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영혼을 무시해서는 안 되며 전통 도덕을 내던져서는 안 된다. 사실 농경 사회든 정보화 시대든 어떤 생활 상태에서든 행복을 느끼는 감정은 똑같다.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이 말하는 행복의 상당 부분이 비교와 과시에서 온다는 점이다. 과거에 말을 타고 가마를 타던 것과 오늘날 고급 승용차를 운전하는 것의 만족감은 같다. 물론 기본적인 의식주가 충족되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사실 어떤 시대, 어떤 계층이든 인생은 고통과 즐거움이 반반씩 섞여 있다. 고통이 없다면 행복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이치가 결정한 것이며 천리(天理)이다. 행복을 얻고자 하면서 영원히 행복하고 고통이 없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일부 젊은이들이 물욕이 극도로 충족되고 또 극도로 자신을 방종하는 상태 속에서 교만, 조급, 박식하지 못함, 허영, 공허함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행복한가? 영혼이 메말라 신음하고 있다!

농사를 짓는 절차는 대개 이렇다 —— 고랑을 파고, 물을 주고, 씨앗을 뿌리고, 흙을 덮은 뒤, 마지막에 발로 한번 밟아준다. 발로 한번 밟았기 때문에, 싹을 틔울 씨앗은 매우 힘겹게 투쟁하는 고통 속에서 흙을 뚫고 나온 뒤, 기쁘게 햇빛과 비와 이슬을 받아들인다. 밟지 않으면 안 되는가? 씨앗이 편안하게 나오게 하면 안 되는가? 안 된다! 만약 밟지 않는다면 씨앗은 미처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대개 바람에 말라 죽어버릴 것이다. 비유하자면, 그 발로 밟는 행위는 마치 도덕의 구속과 같다. 인간에게 도덕의 구속이 없다면 인류는 스스로를 파멸시킬 것이다!

三

행복을 논하려면 먼저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과 자연의 관계, 우주와의 관계 등 수많은 문제를 알아야 한다.

창세설(創世說)은 수천 년 동안 인류가 공동으로 신봉해 온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과학의 발전은 인류의 인식을 신비로움 속에서 점차 이끌어 내었고, 인간은 자신이 갈수록 더 명백하게, 이성적으로, 깨어 있게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인간이 이러한 표면적인 인식과 연구에 점점 더 매몰되고 진화론과 무신론이 등장함에 따라, 사람들은 민주, 과학, 평등, 자유를 보편적이고 영원하며 궁극적인 진리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류의 발전은 걷잡을 수 없이 오늘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었듯이, 도덕을 떠난 민주는 만능이 아닐 뿐더러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하게 마련이다. 미국의 대선이든, 국경 장벽이든, 법적 판결이든 여러 방면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자유는 또 어떠한가? 온갖 난잡한 성(性), 동성애, 성전환 등이 떳떳하게 행해지고 심지어 법제화까지 되었다. 신이 이같이 가르쳤는가?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공연히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동경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오늘날 세계에 사회주의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으니, 당신들은 어째서 그곳에 몇 년간 머물며 체험해 보지 않는 것인가? 평등의 허울 아래 사회주의 국가들은 극도로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다.

​바로 이러한 약탈과 팽창의 태세 속에서 현대 서양 문명은 고대의 동양 문명과 격렬한 충돌과 겨룸을 벌였다. 결국 고대의 동양 문명은 자리를 내어주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사회 체제 속에서 인류는 다 같이 과학 기술 발전 경쟁을 유일한 지상 과제로 삼는 생활 방식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람들의 인식은 점점 표면화되고 평면화되었으며 근시안적으로 변했다. 공리주의와 배물주의(拜物主義)가 지상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평등과 자유의 허울 아래 도덕적 마지노선을 부단히 돌파하며 점차 변이되어 가고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지난 백여 년 동안 과학은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하늘을 날고 바다를 누비며, 멀리 떨어진 곳과 통화하고, 자동차와 고층 빌딩,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 등등 말이다. 그러나 과학은 또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잃게 만들었다 —— 고요함, 여유, 아늑함, 파란 하늘, 맑은 물, 가족의 사랑, 우정, 진실함, 착함, 순박함, 겸손함, 원시적인 맛과 정취, 그리고 마음속의 신성(神性)까지도 말이다. 알아야 할 것은, 그러한 원시적인 것들과 원시적인 느낌 및 향유는 과학이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과학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신이 부여한 것이며 신에게 더욱 가까운 것이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깊이 생각해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환경 오염은 인류의 건강과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으며, 생태 파괴는 수많은 생종을 멸종시키고 생존 환경을 갈수록 험악하게 만들고 있다. 자원 고갈은 사람들이 먼 미래를 상상조차 감히 하지 못하게 만든다. 원자폭탄, 인공지능(AI)의 난동, 네트워크 붕괴 등 돌발적이고 파멸적인 재난들은 모두 큰 불예측성을 지니고 있다.

현대인의 삶은 모래 위에 빌딩을 짓는 것과 같아서, 에너지 기반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사실 에너지 문제뿐만이 아니다. 자세히 세어보면 이 외에도 수없이 많으며, 맞물려 돌아가는 사슬이 일단 끊어지면……

다시 보자, 사람들은 진정 행복해졌는가? 약간의 정신적 자극과 물질적 향락을 제외하면, 불안, 초조, 압박감, 긴장, 바쁨, 무관심, 고독, 이기심, 변태성이 인간 세상에 만연해 있다. 온갖 사회 문제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풀리지 않는 매듭이 이어지고 있다.

二

행복은 인류가 예로부터 변치 않고 추구해 온 화두이자 동경이며 추구였다. 행복의 개념과 정의 역시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이고 직관적이며 가장 보편적인 인식은 바로 ‘소유’, 특히 ‘물질의 소유’이다.

비록 행복의 내포는 매우 광대하지만, 사실 행복은 생명 하나의 느낌일 뿐이다. 만족, 유쾌, 편안, 즐거움, 흥분 등등 말이다.

사람에게 있어 도덕과 지혜를 기반으로 한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만약 단지 행복의 중심을 물질적 충족과 추구에만 두고 바닥이 없는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면, 인간은 영원히 행복을 좇아 동분서주할 뿐 진정한 행복을 소유하고 누리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현대적 관념은 전통 도덕의 구속을 내던지는 것이고, 현대 과학은 신을 배제하며 끊임없는 탐사와 경쟁을 특질로 삼는 것이기에, 현대 사회의 사람들이 왜 보편적으로 불안하고 바쁘며 긴장하고 억압받으며 고독한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신에게서 멀어졌고, 자연에게서 멀어졌으며, 도덕에게서 멀어졌고, 전통적인 문화 생활과 영혼의 삶에서 멀어졌다. 정의, 양심, 진리 등의 단어는 이미 사전에서 사라질 지경이다.

동양에서는 노자가 사람들에게 일러주었다: “만족할 줄 아는 자는 즐거워한다(知足者乐).”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반문과 힐문을 특징으로 삼곤 했다. 그것은 단순한 변론이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영혼을 두드려 묻는 것이었으며, 사람이 진정한 자신을 찾게 하고 깨어나게 하며, 최대한 욕망이 아니라 영혼으로 삶을 영위하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물론 물질생활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며, 인간의 물질생활에 대한 추구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영혼을 무시해서는 안 되며 전통 도덕을 내던져서는 안 된다. 사실 농경 사회든 정보화 시대든 어떤 생활 상태에서든 행복을 느끼는 감정은 똑같다.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이 말하는 행복의 상당 부분이 비교와 과시에서 온다는 점이다. 과거에 말을 타고 가마를 타던 것과 오늘날 고급 승용차를 운전하는 것의 만족감은 같다. 물론 기본적인 의식주가 충족되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사실 어떤 시대, 어떤 계층이든 인생은 고통과 즐거움이 반반씩 섞여 있다. 고통이 없다면 행복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이치가 결정한 것이며 천리(天理)이다. 행복을 얻고자 하면서 영원히 행복하고 고통이 없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일부 젊은이들이 물욕이 극도로 충족되고 또 극도로 자신을 방종하는 상태 속에서 교만, 조급, 박식하지 못함, 허영, 공허함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행복한가? 영혼이 메말라 신음하고 있다!

농사를 짓는 절차는 대개 이렇다 —— 고랑을 파고, 물을 주고, 씨앗을 뿌리고, 흙을 덮은 뒤, 마지막에 발로 한번 밟아준다. 발로 한번 밟았기 때문에, 싹을 틔울 씨앗은 매우 힘겹게 투쟁하는 고통 속에서 흙을 뚫고 나온 뒤, 기쁘게 햇빛과 비와 이슬을 받아들인다. 밟지 않으면 안 되는가? 씨앗이 편안하게 나오게 하면 안 되는가? 안 된다! 만약 밟지 않는다면 씨앗은 미처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대개 바람에 말라 죽어버릴 것이다. 비유하자면, 그 발로 밟는 행위는 마치 도덕의 구속과 같다. 인간에게 도덕의 구속이 없다면 인류는 스스로를 파멸시킬 것이다!

三

행복을 논하려면 먼저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과 자연의 관계, 우주와의 관계 등 수많은 문제를 알아야 한다.

창세설(創世說)은 수천 년 동안 인류가 공동으로 신봉해 온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과학의 발전은 인류의 인식을 신비로움 속에서 점차 이끌어 내었고, 인간은 자신이 갈수록 더 명백하게, 이성적으로, 깨어 있게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인간이 이러한 표면적인 인식과 연구에 점점 더 매몰되고 진화론과 무신론이 등장함에 따라, 사람들은 민주, 과학, 평등, 자유를 보편적이고 영원하며 궁극적인 진리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류의 발전은 걷잡을 수 없이 오늘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었듯이, 도덕을 떠난 민주는 만능이 아닐 뿐더러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하게 마련이다. 미국의 대선이든, 국경 장벽이든, 법적 판결이든 여러 방면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자유는 또 어떠한가? 온갖 난잡한 성(性), 동성애, 성전환 등이 떳떳하게 행해지고 심지어 법제화까지 되었다. 신이 이같이 가르쳤는가?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공연히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동경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오늘날 세계에 사회주의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으니, 당신들은 어째서 그곳에 몇 년간 머물며 체험해 보지 않는 것인가? 평등의 허울 아래 사회주의 국가들은 극도로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다.

​

​

수많은 선사(史前) 문명의 발견 앞에서 진화론자들은 침묵을 지킨다. 진화론의 중간 고리가 왜 여전히 발견되지 않는지 질문을 받으면 진화론자들은 입을 닫는다.

진화론의 일부 증거들이 조작되었다고 지적될 때, 진화론의 추론이 단순하고 조잡하다고 비판받을 때, 누군가 수학적 추론과 생물학적 추론으로부터 진화론의 터무니없음을 지적할 때…… 다윈 자신조차도 눈은 진화되어 올 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진화론은 여전히 교과서에 실려 있다. 이것은 과학 정신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수호하고, 체면을 지키며, 모종의 이익과 기도(企圖)를 수호하는 것이다.

현재 양자역학의 발전은 이미 모종의 의미에서 영혼의 존재를 증명해 냈다. 반면 영혼 윤회의 사례는 고금을 막론하고 전 세계에 부지기수다. 일상의 주변에서, 그리고 고금 현대의 무수한 사실들이 모두 영혼의 존재를 확증하고 있다. 현대 의학을 포함하여 일부 측면에서 영혼의 존재를 실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혼을 부정하는 주장은 틀린 것이며, 일상생활에서 영혼을 돌보지 않는 삶의 방식은 취할 바가 못 된다.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인류는 이미 우주의 대다수가 암흑물질임을 인정했다. 그곳에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가? 외계인은 이미 인류에게 낯설지 않은 화제가 되었다. 아득한 우주 속에는 외계인보다 더 고차원적이고 더 능력이 뛰어난 생명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그들을 신(神)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째서 안 된다는 말인가?

인류와 신은 어떤 관계인가? 외계인과는 어떤 관계인가? 대자연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영혼은 육체를 떠나 어디로 가는가? 우리의 생활 방식 선택, 인류 발전 도로의 선택에서 이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가?

사실 다른 공간은 이미 어떤 가정(假定)이 아니다. 인류의 발전 속에서 다른 공간을 고려하지 않고, 신을 경외함을 고려하지 않으며, 대자연을 합리적이고 신중하게 이용할 것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四

전통문화를 말하자면, 그 맥이 유구하게 흘러내려 온 것은 단연 중화문화이다. 중국 전통문화는 유·불·도(儒佛道)를 기점으로 삼는 광범위한 문화 체계이며, 천인합일(天人合一)을 특징으로 하고 도덕을 기석(基石)으로 삼아 우주, 생명, 인체 및 그 관계를 깊이 인식한다.

도덕(道德)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도(道)’는 길이라는 의미가 있어 만물은 저마다의 특징과 구성, 그리고 규칙이 있어 각기 도를 준수하며 발생하고 발전하고 운동한다. 또한 만물의 기원, 성인(成因), 구성의 원시적 힘과 내재적 힘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덕(德)’은 물질과 생명의 존재 상태를 유지하는 일종의 정에너지 물질이다. 덕이 많은 사람일수록 복분이 더 크다.

전통문화의 근본 출발점은 바로 사람들에게 도를 따르고 덕을 지킬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이든 그만의 도가 있어 도를 벗어나면 스스로 재앙을 자초하게 되며, 어떤 언행이든 덕을 쌓거나 덕을 깎아먹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부단히 덕을 쌓으면 복분이 갈수록 커질 것이다.

도가(道家)에서 가리키는 도덕은 대략 이러한 의미이다. 사람은 저마다 명(命)이 있는데, 명이란 사람이 이미 정해진 인생의 길로서 노력하는 바는 모두 당신 명 안의 필연적인 것이다. 명에 없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헛수고이다. 이것이 바로 불가가 말하는 인과론이다. 예측학은 단지 결과를 미리 볼 수 있을 뿐이다.

불가와 도가는 사람들에게 하늘에 더 고차원적인 생명이 존재하며 그들이 인간을 보살피고 있고, 인간은 수련을 통해서도 고차원적인 생명이 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유가(儒家)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욱 원칙이 있고 질서 있게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것이다. 인자하고 이지적이며 의롭고 신의를 지키며 자율적이고 인내하며 겸손하고 굳세게 정진하며(健行) 용서하고 근검한 사람이 되도록 한다. 유가문화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창조한다.

유가는 또 만족할 줄 알며(知足), 감사하고, 복을 아낄 줄 아는(惜福) 것을 말한다. 실은 당신에게 어떻게 행복을 얻을 것인가, 어떻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심태를 갖출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유가 예교(禮教) 속의 예(禮)는 단순히 인륜의 질서를 규범화하여 가정과 사회를 질서 있게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동시에 예교는 신과 통하는 것이며 신이 안배한 윤회전생과 대응 관계가 있다. 은혜를 갚는 이든 빚을 갚으러 온 이든 생명의 고리 속에는 그 정상적인 질서의 운행과 안배가 존재한다. 도덕이 파괴된 후, 빚을 갚는 이와 은혜를 갚는 이가 그 목적을 정상적으로 완수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생명계의 안배된 질서와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며 신계(神界)를 교란하는 것과 같다. 공당(共黨)이 고의로 사람들의 도덕을 파괴한 것은 이 점에서 볼 때 반우주적이다. 하늘과 땅에 대항하며 싸운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반우주적인 무지한 광모(狂妄)이다.

예교 속의 제사(祭祀)는 더욱이 다른 공간의 생명과 직접 소통하는 것이다. 신을 공경하는 것이든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일이든, 귀신과 신과 소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이 자연을 함부로 약탈하고 파괴하는 것은 산신, 하신, 토지신 등 신들을 직접적으로 상해하는 것이다. 소위 대자연의 보복을 받는다는 것은 곧 신이 인간에게 가하는 징벌이다. 과거에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풍수사를 찾아가 살펴본 뒤 제사 지내고 기도했다. 정부에 땅 한 조각을 허가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토지신에게 땅 한 조각을 허락받으려 절을 올렸던 것이다.

유가가 말하는 악(樂)에 이르러서는, 단순한 정조의 함양, 아흥의 배양, 감정의 발산에 그치지 않는다. 음악은 몸을 치유하고 신과 통할 수 있으며 우주의 에너지를 소통시킬 수 있다. 현대인 중 많은 이들이 이를 인식하고 있다.

활쏘기 역시 유가가 장려한 기예였다. 활쏘기는 체력을 기를 수 있고 적을 막을 수 있으며 마음을 닦고 본성을 기를 수 있다. 신궁(神弓手)의 능력은 이미 일종의 기능(功能)이었다. 예를 들어 여포(呂布)가 백미터 밖에서 화극(畫戟)의 작은 가지를 쏘아 맞힌 것을 보라. 사실 백미터 밖에서 맨눈으로 화극의 작은 가지를 똑똑히 보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그는 단발에 명중시켰다. 역사 속 수많은 신궁들은 쏘는 자와 맞는 자가 모두 움직이는 상황에서도 백발백중이었다. 현대의 저격수는 대개 조준경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정지된 조건에서 임무를 완수한다.

고대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 입도(入道)를 말하여, 예기(藝技)를 배우기 전에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우며 신령에게 절을 올렸다. 수련하는 가운데 마음을 고요히 하고 숨을 조절하는 것은 수련 상태에 매우 가까웠으며, 그리하여 기능이 나올 수 있었다. 모든 도(道)에는 그를 수호하는 신이 있어 당신이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면 도에 들게 해주는데,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문도를 파악한다(掌握門道)’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예가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出神入化).

목수가 노반(魯班)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보라. 특히 무술계에는 신의 경지에 이른 대가들이 매우 많다. 물론 스승을 모시기 전에 스승도 제자를 고찰하여 자질을 갖추었는지 보며, 더욱 중요하게는 제자의 덕행을 고찰하여 덕행이 좋지 않은 자는 거두지 않는다. 그리고 신의 경지에 이른 이들이 장악한 정수(精髓)는 오직 마음으로 깨달을 뿐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이다.

유가는 또 어(御), 즉 마차를 모는 것을 말한다. 이것도 배움이 있는가? 있다. 마차를 모는 학문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가 담겨 있다. 한 편의 <집폐(執辔)>가 진기(眞機)를 다 드러내고 있다.

시(詩)도 있다. 누군가는 시가 곧 그림이고 그림이 곧 시라고 했다. 단 네 줄의 글귀 속에 감정과 경치와 철리가 들어 있다.

또한 전통문화의 시사(詩詞)와 가부(歌賦)는 운율의 아름다움과 언어의 간결함뿐만 더욱이 몽환적인 아름다움, 신비로운 아름다움, 그리고 함축적인 아름다움을 중시한다. 이와 같은 작품들은 하늘과 땅과 귀신과 통하며 영혼을 위로한다. 인류의 진정한 문화는 영혼과 소통하는 것이다.

중의(中醫)는 다른 공간을 겨냥한 천인합일의 의료 양생 기술이다.

기혈이 통하지 않고 맥이 막히면 병이 난다. 맥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산이 높으면 물도 높다는 것을 안다. 물은 높은 산에서 흘러내려 바다로 흘러가며 해년마다 끊이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지구의 일종의 경락 순환이며 그것은 에너지가 이끄는 것이지 꿰어 맞춘 압력설로는 설명할 수 없다.

풍수란 무엇인가? 바로 지혈(地穴), 즉 에너지 응집점을 찾는 것이다. 사람의 혈위와 완벽하게 같은 이치이다. 중의는 바로 맥락, 기혈, 음양, 허실 등을 겨냥한 인체의 인식이다.

<황제내경(黃帝內經)>이 말한 많은 것들을 현대인들은 현대 과학적 수단을 통해서야 비로소 인식하고 인정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분노는 간을 상하게 한다(怒傷肝)’는 이치 같은 것이다.

전통문화가 귀신과 통한다고 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도덕을 지키게 하여 일들이 순조롭게 풀리고 일을 보는 눈이 트이게 하며, 까놓고 말해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인간이 하는 일이 다른 공간의 생명과 엇나간다면 까닭 모를 저항과 손실을 불러오지 않겠는가?

전통문화가 낙후되었다고 말하지만,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검이 얼마나 많은 학자들을 감탄케 했는지 알아야 한다. 20세기 인류의 기술을 채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에 영정문(永定門)을 헐었을 때 그 기초가 지표면 아래 불과 한 자 되는 곳에 직접 벽돌을 깔았음에도 불구하고 꼿꼿이 솟아오를 수 있었음이 발견되었다. 현대 건축가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현재 재건된 영정문은 500여 그루의 십여 미터에 달하는 철근 콘크리트 말뚝을 땅속에 박아 기초를 다진 뒤 그 위에 건축했다.

이러한 기술에 대해 고대인들은 단지 이 길을 따라 발전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기적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대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수되지 못하고 쉽게 사라졌을 뿐이다.

전통문화는 심오하고 방대하여 자세히 말하자면 이 밖에도 수없이 많다.

五

현대 과학의 특성은 바로 만져지고 눈에 보이는 표층 공간을 연구하는 것이다. 현대 과학의 많은 산물들은 대자연이 분해하고 소화할 수 없으며, 그것들은 정상적인 인체 대사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것들이 서로 다른 방식을 통해 인체로 들어온 후 인체에 가하는 상해는 엄청나다. 어떤 것들은 이미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지만, 또 어떤 해로움들은 인류가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유해 물질들은 생태를 해치고 인체를 해치는 것을 가속화하고 있으며 실로 우려스러울 지경이다.

현대 과학은 서구에서 탄생하여 순리대로 서양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발전되고 보급되었다. 그것이 동양으로 전해졌을 때 큰 저항에 부딪혔고 또한 큰 골칫거리를 가져다주었다. 사실 인류의 발전은 한 차례의 기회를 놓쳤다.

만약 인류가 동양의 전통문화로 서양의 과학을 심사숙고하고 이성적인 판단과 선택을 내릴 수 있었더라면, 현대 과학이 반드시 전면 부정되지는 않았겠지만 그 발전은 규범화되고 제한을 받았을 것이다. 인류 역시 물질생활에서 큰 개선을 얻었을 것이되, 대자연을 심각하게 해치는 부분과 일부 변이된 생물 기술은 제한을 받았을 것이다. 환경 보호는 더욱 잘 이루어졌을 것이며 일부 상품의 생산량 역시 제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대체 언제부터 ‘절검(節儉)’이라는 두 글자를 잊어버린 것인가?

완전히 짓밟는 식의 소비, 약탈적인 개발, 마치 누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살아온 결과 오늘날에 이르렀다.

신문화운동은 맹목적이었고 심지어 혼란스러웠다. 꿰어 맞춘 듯 그들이 변혁하려는 사상과 행위를 변호하기에 급급했다. 도대체 어떤 종류의 새 문화를 창조하려는지 자신들도 명확히 말하지 못했다. 대강 말하자면 서구 선진국을 모방하는 것이었고, 정신의 실질은 변혁이었으며, 오직 자유의 필요만 충족된다면 계속 변혁해 나가는 것이었다. 아무튼 자유·평등·과학을 원했다. 낡은 문화, 풍속, 예의, 제도를 타파하고자 했다. 가난한 동정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고 백성들의 고난은 모두 이러한 낡은 것들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 여겼다. 사실 그들은 전통문화의 심오함과 방대함을 애초에 인식하지 못했다. 물론 당시의 역사적 특수 시기, 정권의 부패, 열강의 능멸과 침략이 국가를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던 점도 있다. 전통문화 속 일부 인위적으로 극단화된 행태들이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았던 것 등도 모두 신문화운동을 급진적으로 만들었던 원인들이었다.

뒤이어 기회를 틈타 일어난 귀매(鬼魅)가 나라를 도둑질한 중국공산당(中共)은 전통문화를 완전히 제멋대로 파괴하여 인류의 이 귀보(瑰宝)를 오늘날 거의 절멸 직전에 이르게 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유가가 말하는 인(仁)은 서양 종교에서의 박애(博愛)와 비슷하다. 신의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는 것은 인간들의 평등주의가 아니다. 인류에게는 당연히 계층의 구분이 존재하며, 인류는 완전히 평등해질 수 없고 계층의 존재를 소멸시킬 수도 없다. 당신은 베풀고 가엾게 여길 수 있으며, 그것은 모두 훌륭하고 선한 일이다. 인격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하고 심령적으로는 모든 생명을 아껴야 하지만, 만인이 완전히 평등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이 문제를 보는 각도와 인간이 문제를 보는 각도가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불가에서 말하는 인과응보, 그것은 천리이다. 전생에 나쁜 짓을 하고도 벌을 받지 않는다면 말이 되겠는가? 인간 세상의 법률 역시 악을 징벌하고 선을 권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인류에게는 당연히 복분이 큰 이도 있고 작은 이도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인간에게는 또 게으름과 부지런함의 차이가 있고 능력의 크고 작음의 차이도 있는데, 완전히 평등하고 똑같이 나눈다는 것이 과연 되겠는가? 게으름을 장려하겠는가? 신은 사람을 제도하러 온 것이니, 신이 보기에 인간에게 천국으로 들어갈 평등한 기회를 주는 것이다. 신은 인류 사회가 자연적으로 형성한 계층을 소멸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평등이든, 자유든, 법치든, 반드시 도덕 아래에 있어야 하며 오늘날의 인류는 도덕을 다시금 되찾아야 한다.

황권 제도(皇權制度)가 반드시 참으로 낙후된 것만은 아니며 민주 제도 역시 반드시 참으로 합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도덕을 떠난 사회 체제는 모두 인류의 재난이다. 이것들은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

인류의 현실적 위기 앞에서 인류의 발전 경로를 되돌아볼 때, 인류는 서양 과학, 공산 체제, 전통문화에 대해 진정으로 엄숙하고 이성적인 선택과 취사(取舍)를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4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