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행(躬行)
【정견망】
어떤 이들은 묻는다. 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고도 여전히 평화롭고 활달하며, 심지어 세상 곳곳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그들이 고난을 진정으로 읽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속인의 눈에 비친 고난은 상실이자 억울함이며, 불공평이자 상처다. 그러나 한 사람이 고난을 진정으로 통과하여 마난(磨難)이 생명에 지니는 의의를 깨닫고 나면, 겉보기에 좋지 않아 보이는 많은 일이 반드시 정말로 나쁜 일만은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마난은 자신을 정화하고 심성을 제고하여 생명을 끊임없이 승화시킬 수 있다.
이때 다시 만물을 바라보면, 아름다움이란 결코 이유 없이 거저 오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한 송이 꽃의 꽃향기는 단지 햇빛이 준 선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바람에 날리고 비에 맞았으며, 엄한 추위와 서리 내리는 눈을 겪었고, 길고 긴 기다림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봄날에 가장 감동적인 색채를 피워낸 것이다. 사람들은 피어난 꽃의 아름다움은 보지만, 그 아름다움 이면에 감내해야 했던 그 모든 것을 생각하는 일은 드물다.
새들의 청아한 울음소리는 듣기에 마음을 기쁘고 시원하게 한다. 그러나 그 귀에 고운 노랫소리 이면에는 그들이 생존을 위해 바친 노고가 있고, 둥지를 틀고 먹이를 찾으며 바람과 비, 천적을 피하는 과정이 있다. 우리는 노랫소리는 듣지만, 그들이 걸어온 길의 간고함은 보지 못할 수 있다.
다시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내는 기물(器物)들을 보라. 도자기는 뜨거운 불을 겪고, 휘묵(徽墨)은 천 번의 두드림을 거치며, 미옥(美玉)은 반복해서 조각되어야만 비로소 온윤함과 광채를 지니게 된다.
세상의 많은 아름다운 사물은 모두 이와 똑같은 법칙을 따른다. 연마와 달굼이 없으면 빛남이 없다.
사람 또한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예전에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여겼던 많은 억울함은 나중에 너그러움이 되었고, 예전에는 내려놓지 못했던 많은 집착은 나중에 담담함이 되었으며, 예전에는 불공평하다고 여겼던 많은 마주침은 나중에 도리어 자신을 제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정으로 걸어 나온 후에야 발견하게 되나니,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날들이 대개 가장 빨리 성장할 때였고, 가장 고통스러웠던 경험들이 대개 생명이 가장 크게 제고될 기회였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의 눈에 비친 세계는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이미 간파해 본 것이다.
그는 봄꽃의 아름다움이 겨울눈의 잉태에서 온다는 것을 알고, 자비와 지혜 역시 연마 속에서 성취된다는 것을 안다. 그가 보는 것은 단지 표면적인 득실과 성패뿐만이 아니라, 생명이 모든 경험 속에서 끊임없이 정화되고 승화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순경(順境 순탄한 환경)에 대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역경(逆境 어려운 환경)에 대해서도 태연하게 마주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좋은 일을 하면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잘못된 일을 해도 그것은 미혹됨과 국한됨 때문임을 안다. 속인들을 분개하고 불평하게 만드는 많은 일이 그의 눈에는 생명이 성장하는 과정 중의 서로 다른 단계일 뿐이다.
그때의 아름다움은 이미 단지 새들의 지저귐과 꽃향기, 산하와 바람, 달빛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사만물(萬事萬物)의 이면에 공동으로 따르고 있는 법칙을 본 것이다.
꽃은 바람과 비로 인해 향기로워지고,
사람은 마난으로 인해 성취되며,
생명은 경험으로 인해 성숙하고,
초월함으로 인해 아름다워진다.
그리하여 다시 이 세상을 바라보면, 햇빛도 아름답고 바람과 비도 아름다우며, 성공도 아름답고 좌절 역시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신선한 꽃(鮮花)도 아름답고, 그 꽃을 잉태한 엄동설한 역시 똑같이 아름답다.
생명이 성장하는 신비를 깨달았기에 눈에 보이는 바는 더는 사물 표면의 고락과 득실만이 아니며, 생명이 천지 사이에서 끊임없이 승화하는 장려한 과정이다.
그때에 이르면 눈에 가득 보이는 것이 모두 아름다움이다.
자비로 세계를 바라보니, 천지가 모두 봄이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2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