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열(欣悅)
【정견망】
만 점의 차가운 까마귀들 서쪽으로 모두 지나가고,
기울어진 달은 사람을 향해 낮게 기울었네.
남은 꿈을 좇으려다 놀라 깨어난 곳,
국화 핀 술잔 앞에서 게 배꼽을 벗기네.
萬點寒鴉過盡西,一輪斜月向人低。
欲追殘夢驚回處,黃菊樽前剝蟹臍。
주용(周容, 1619년~1692년)은 자가 무산(鄮山), 또 다른 무삼(茂三) 또는 무산(茂山)이며, 호는 벽당(躄堂)으로, 명말청초 은현(鄞縣 현재의 절강 영파) 사람이다.
주용은 명대의 제생(諸生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진 생원)으로, 재주가 출중하고 협객의 기개가 자못 있었다. 그는 일찍이 어사 대전신(戴殿臣)의 인정을 받았다. 나중에 대전신이 해적에게 납치되자, 주용은 몸을 던져 인질이 되어 그를 대신해 형벌을 받아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 일이 널리 퍼진 후, 당시 사람들 중에 그의 의로운 행동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명조가 멸망한 후, 주용은 한때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가, 나중에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셔서 효도를 다하기 위해 다시 속세로 돌아와 집으로 돌아왔다. 강희 18년(1679년), 청 조정에서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를 열어 그를 불러 경사(京師)에 와서 시험을 보게 했으나, 그는 끝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 《춘함당집(春涵堂集)》이 있다.
이 시 《효망(曉望)》은 시인이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깜짝 깨어나 어렴풋이 잠이 깬 사이 보고 느낀 것을 쓴 것이다.
중국인들은 흔히 “한 조대의 천자에 한 조대의 신하”를 말한다. 그러나 조대의 교체를 직접 겪은 사람에게 있어 망국의 생각은 어찌 ‘신하’라는 글자로 다 포괄할 수 있겠는가? 주용은 일찍이 명대의 제생이었고, 명이 망한 뒤에는 청 조정에 벼슬살이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인생 경력과 결부시켜 이 시를 읽어보면,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아마도 꿈에서 깬 뒤의 쓸쓸함뿐만 아니라, 망국에 대한 깊은 그리움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만 점의 차가운 까마귀들 서쪽으로 모두 지나가고,
기울어진 달은 사람을 향해 낮게 기울었네.”
새벽녘에 시인이 잠에서 깜짝 깨어나 보니, 수많은 까마귀들이 서쪽 하늘로 날아가 아스라이 어둠 속으로 점차 사라지고 있었고, 기울어진 달이 하늘 끝에 낮게 걸려 마치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듯했다. 까마귀와 기울어진 달은 본래 맑고 차갑고 쓸쓸한 풍경인데, ‘모두(盡)’라는 글자 하나는 만물이 멀어져 가고 다시 만회할 수 없는 의미를 더욱 자아낸다.
‘까마귀들 서쪽으로 모두 지나가고’는 이미 지나간 세월을 좇아 바라보는 것 같고,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달 또한 구시대의 잔존하는 미약한 빛과 같다. 시인은 청조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옛 명조를 그리워하고 있다. 다만 그 역시 세상일이 이미 변천하였고 모든 것이 뜬구름과 같아 다시는 재현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이른바 그리움이란 결국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둘 수밖에 없는 한 가닥 쓸쓸함이 될 뿐이다.
“남은 꿈을 좇으려다 놀라 깨어난 곳,
국화 핀 술잔 앞에서 게 배꼽을 벗기네.“
얼핏 보면 이 두 구절은 깊은 뜻이 없어 보인다. 시인이 잠에서 깜짝 깨어나 방금 전의 꿈속으로 다시 돌아가 국화가 만발하고 술잔을 앞에 두고 술을 마시며 게를 음미하던 한가롭고 편안한 정경을 다시 누리고 싶어 하는 듯하다.
그러나 시인의 처지와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이 ‘남은 꿈’은 의미가 자못 심장하다. 청 초기에는 문자에 대한 통제가 점차 촘촘해져서 선비들이 말과 글에 조금만 부주의해도 화를 초래할 수 있었다. 비록 시인의 마음속에 여전히 망국의 생각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시와 술, 그리고 꿈속에 기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꿈속의 국화와 술잔, 그리고 게는 아마도 시인이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사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가 좇는 것은 단지 술을 마시고 게를 먹는 한가로운 흥취뿐만이 아니라, 이미 사라져 버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망국의 세월이다. 꿈속의 평범한 일상이 그토록 그리운 까닭은 그것이 이미 잃어버린 시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좇으려다(欲追)’는 그의 그리움을 그려냈고, ‘남은 꿈(殘夢)’은 아름다움이 사그러진 것을 그려냈으며, ‘놀라 깨어난 곳(驚回處)’은 또 그를 옛날의 꿈속에서 차가운 현실로 매섭게 끌어내렸다. 꿈이 따뜻할수록 깬 뒤의 현실은 더욱 처량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마음속의 아름다움이 오직 꿈속에서만 재현될 수 있고, 한때 실현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좇을 수 없는 한바탕 남은 꿈으로 화해 버릴 때, 이것은 진정으로 무거운 비애가 아닐 수 없다.
오 마침 정법(正法) 시기를 맞아, 사람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이 모두 하나의 생명 군체의 미래와 관계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자기 한몸의 사사로운 이익 때문에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며, 중생이 구도될 기회마저 저버려서는 안 된다. 본래 실현될 수 있었던 아름다움이 철저히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남은 꿈속에서 헛되이 좇으려 애쓰지 말아야 한다.
사심(私心)을 내려놓고 중생을 마음에 품어야 더 많은 생명이 구도를 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