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안녕하세요, 저는 부요(扶搖)입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탐구하는 [미해지미(未解之謎)]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할 내용은 중국 근대 최고의 고승으로 불리는 허운(虛雲) 화상의 이야기입니다. 허운 화상은 청나라 도광(道光)·함풍(咸豐)·동치(同治)·광서(光緖)·선통(宣統) 등 5대 황제를 거쳤고 백년에 걸친 중국의 전란과 격변을 목격했으니 그야말로 전설적인 인물이다. 허운 화상은 또 112세의 고령에 여러 차례 구타를 당해 치명상을 입었지만 기적적으로 되살아났고 심지어 하늘과 땅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한다던 가해자들마저 경외심이 일어나게 했다. 더 신기한 것은 그가 또 불국(佛國)을 유람하며 직접 미륵의 존안을 뵈었다는 점이다.
신기한 출생
비범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비범한 출생이 있게 마련이다. 허운 화상은 원래 소(蕭)씨로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의 후예다. 부친인 소옥당(蕭玉堂)은 청나라 때 영춘주(永春州)에서 벼슬을 지냈고 부인 안(顔) 씨와 마흔이 넘도록 아이가 없어 애를 태웠다. 이에 안 씨가 관음사(觀音寺)를 찾아가 관음보살께 아들을 낳게 해주십사 빌었다.
저녁에 안 씨가 꿈을 하나 꾸었는데, 긴 수염에 파란 도포를 입은 노인이 관음의 몸을 머리에 이고 호랑이를 타고 오더니 갑자기 침대로 뛰어내렸다. 아침에 일어난 안 씨는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소옥당은 자신도 같은 꿈을 꾸었다면서 놀라워했다. 보아하니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한 기도가 이뤄질 것 같았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안 씨는 임신을 했다. 10달 후 마침내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아이를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안 씨가 낳은 것은 아기가 아니라 살덩어리[肉球 역주: 공 모양의 살덩어리로 《봉신연의》의 나타가 이렇게 태어났다.]를 낳았기 때문이다. 안 씨는 너무 놀랍고 또 두려워서 숨이 막혀 죽어버렸다. 갑자기 경사(慶事)가 상사(喪事)로 바뀌자 모두들 이 괴태(怪胎)를 불길한 징조로 여겨 다음 날 내다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바로 이때 약을 파는 한 노인이 찾아와 상황을 듣고 난 후, 마치 무슨 일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칼로 살덩어리를 쪼갰다. 그러자 희고 통통한 남자아이가 나왔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의 허운이다.
허운은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했지만 세간의 공명(功名)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불경(佛經)을 아주 좋아해서 17세에 몰래 집을 나와 출가하려고 했으나 가족들에게 도중에 제지당했다.
허운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아버지는 아내를 맞이하게 했다. 그것도 한 번에 두 명의 아내를 맞이했으니 전(田)씨와 담(譚)씨였다. 허운은 부친의 명령을 거역할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타협할 생각도 없었다. 신혼 첫날밤, 그는 아내들에게 불법(佛法)을 널리 알렸다. 전 씨와 담 씨 역시 자못 혜근(慧根)이 있는 사람들이라 곧 깨달음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마치 대가섭과 묘현(妙賢) 부부처럼 명목상으로는 부부였지만, 부부관계는 하지 않고 깨끗이 수련하는(淸修) 부부가 되었다.
1년 뒤 허운은 두 아내에게 ‘피대가(皮袋歌 가죽주머니의 노래)’를 남기고 출가했다. 여기서 가죽주머니란 육신(肉身)을 말하는데 수련해서 정과(正果)를 얻는 것만이 가장 중요함을 지적한 것이다. 이어서 복주(福州) 고산(鼓山) 용천사(湧泉寺)에서 출가했다. 그의 두 아내도 잇따라 그를 따라 출가했다.
소동파의 환생?
아마 허운 화상의 조예가 비범하고 또 대가섭과 비슷한 혼인 경력 때문에 나중에 어떤 사람들은 허운 화상이 대가섭의 환생이 아닐까 추측했다. 하지만 앞서 다른 편에서 소개했다시피 대가섭은 석가모니 부처의 지시에 따라 인간세상에서 미륵을 기다리며 윤회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허운 화상은 당연히 그의 환생이 아니다.
허운 스님의 제자 정혜(定慧) 장로가 나중에 밝힌 바에 따르면 노스님은 원래 명나라 4대 고승 중 한 명인 감산(憨山)대사의 환생이라고 한다. 이 사실은 어떻게 알았을까?
원래 중화민국 23년(1934년) 허운 화상이 조계(曹溪)의 조정(朝庭) 남화사(南華寺)를 중창할 때 감산대사의 육신상(肉身像 역주: 감산대사는 육조 혜능처럼 육신을 지니고 열반에 들었고 남화사에 상이 모셔져 있다) 앞에 향을 피우며 말했다.
“지금 덕청(德淸)과 옛날 덕청, 지금과 옛날이 서로 형태를 바꿔 만났군요. 불법(佛法)의 흥망성쇠가 시절에 달려 있으니, 숲에 들어가 풀을 뜯는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명나라 때 감산(憨山)대사의 법호가 덕청(德淸)인데, 허운 화상의 법호도 덕청이었다. 생생세세 윤회 속에서 이미 육신은 변했다. 오늘 살아 있는 ‘지금 덕청’이 육신이 썩지 않는 ‘옛날 덕청’ 앞에 서 있으니 그야말로 “지금과 옛날이 서로 형태를 바꿔 만난 것”이다.
과거 감산대사가 남화사에 갔을 때는 그는 죄수 신분으로 군역(軍役)에 종사하기 위해 남화사에 가서 육조 혜능의 도장을 되살린 적이 있다. 지금 허운 화상도 다시 남화사에 가서 이 도장을 부흥시켰다. 그야말로 “불법의 흥망성쇠는 시절에 달려 있으니 계절에 숲에 들어가고 풀을 뜯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능가경주해(楞伽經註解)》를 가지고 허운 화상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이것은 내가 물 감옥(水牢)에 있을 때 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허운 화상은 전에 물 감옥에 가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감산 대사가 사사로이 절을 수리했다는 죄로 남해(南海)로 귀양 가서 물 감옥에 수감된 적이 있다. 물 감옥에서는 물이 무릎 위까지 올라온다. 감산대사는 하루 여덟 시간씩 물 감옥에 서 있어야 했는데 감옥에서 돌아온 후 다시 《능가경주해》를 썼다고 한다. 즉 이 역시 허운 화상 스스로 자신의 전생을 드러낸 것이다.
이 감산 대사도 보통 내력을 지닌 분이 아니다. 그는 《몽유집(夢遊集)‧영주 경상인에게 보이다(示靈洲鏡上人)》란 글에서 일찍이 상해(上海) 문묘(門妙)봉에 올라가 선정(禪定)에 들어가 깊고 넓은 경지에 들어가서 소동파의 과거를 본 적이 있다. 나중에 그는 이것이 전생에 남겨진 정보임을 알았다. 이후 소동파가 전에 살았던 곳을 다니면서 그의 시를 읽고는 만법(萬法)이 모두 꿈과 같고 환상과 같으니 인생 역시 꿈속의 환화(幻化)와 마찬가지라도 탄식했다.
그래서 후인들은 감산대사의 자술에 근거해 그가 북송의 대문호 소동파의 환생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소동파는 또 오계(五戒)화상의 환생이다. 이렇게 말하자면 허운 화상의 불연(佛緣)은 아주 깊고 근기가 심후한 것은 많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신적(神跡)
허운 화상이 도를 얻어 개오(開悟)한 후 수많은 신기한 일들이 일어났다. 이런 것들은 모두 현대 과학으로는 전혀 설명할 수 없다. 여기서는 가장 전형적인 사례 몇 가지를 들어 여러분들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늦봄에 눈을 내려 가뭄을 해결하고 역병이 멎다
중화민국 10년(1921년) 가을, 운남(雲南)에서 후두가 아픈 후두역(喉疫)이란 역병이 발생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이듬해 늦봄까지 역병이 멈추지 않아 이미 무수히 많은 백성들이 죽었다. 역병 외에도 운남에는 가뭄이 심했는데 여러 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러자 당시 운남의 실력자였던 군벌 당계요(唐繼堯)가 화정사(華亭寺)로 허운 화상을 찾아와 기우제를 지내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화정사는 곤명(昆明)호수 서쪽 호숫가에 있는데, 장기간 방치되어 외부인에게 팔려나간 곳이다. 나중에 당계요의 지원으로 절을 다시 구매해 허운 화상에게 주지를 맡겨 중창시켰다. 이후 흙 속에서 파낸 옛 비석에 ‘운서(雲棲)’란 두 글자가 나와 운서사로 이름을 고쳤다.
허운이 제단을 설치하고 사흘간 기우제를 지내자, 과연 하늘에게 큰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었다. 하지만 후두역은 여전했다. 그러자 당계요가 허운 화상에게 말했다.
“내가 들으니 눈이 내리면 후두역을 막을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 이미 늦봄인데 어찌 눈이 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허운 화상이 말했다.
“제가 단을 만들 테니 (당신은) 진심으로 비셔야 합니다.”
그래서 당계요는 목욕재계했고 허운은 경을 읽었다. 하루 뒤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렸는데 많은 곳은 한 자 가량 눈이 쌓였다. 이렇게 큰 눈이 내리자 정말로 역병의 확산을 막았다. 당시 여러 사람들이 모두 불법(佛法)의 위력에 깊이 감동했고 정말 불가사의하다고 했다.
불국정토에 놀러갔다 되살아나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찬탈한 후 110세의 허운은 광동성 운문사(雲門寺)에서 수행했다. 1951년 허운 화상이 춘기 계율전수를 주관하자 각지에서 소식을 듣고 계율을 구하러 온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당시 운문사에 120여 명이 모였다. 그런데 이때 중공은 전국적으로 ‘반혁명 진압’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무신론을 신봉하는 중공 정부는 일찍부터 덕망이 높고 불법(佛法)을 널리 펴는데 최선을 다하는 허운 및 그를 따르는 많은 독실한 신자들에게 불만을 품고 구실을 찾아 제거하려 했다. 이에 운문사에 무기, 라디오, 황금과 은이 숨겨져 있다는 구실로 수백 명을 파견해 사찰을 에워쌌다.
그들은 먼저 허운 화상을 방장실에 감금하고 여러 사람을 파견해 그를 지키게 했다. 이어 다른 승려들을 선당(禪堂)과 법당(法堂)에 각각 감금했다. 그리고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다. 위로는 대전 지붕에서, 아래로는 당 아래 벽돌에 이르기까지 또 금불상, 법기(法器)와 경장(經藏)에 이르기까지 수색하고 훼손시켰다. 이렇게 이틀을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스님을 붙잡아 고문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며칠 사이에 26명이 연행돼 그중 1명이 숨졌다. 이렇게 열흘을 들볶아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그들은 마침내 허운 화상에게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3월 1일 허운 화상을 다른 방에 가두고 문과 창문을 잠그고 음식과 물도 주지 않았고 심지어 화장실 출입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3월 3일 건장한 남자 10명이 방에 난입해 허운 화상에게 황금, 은과 총기를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허운 화상이 없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각목으로, 이어 쇠막대기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렸고 갈비뼈도 부러뜨렸다. 그들이 악행을 저지를 때 허운 화상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는 보지 않았고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한 패의 악당들은 하루 종일 허운을 네 차례나 구타했고, 결국 그를 땅에 쓰러뜨렸다. 그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보고나서야 그가 반드시 죽을 거라 생각하고 떠났다.
그러나 3월 5일 허운 화상이 아직 살아있는 것을 알자 다시 때리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자 지키던 제자가 허운 화상을 끌어안고 의자에 앉히자 허운은 단정히 앉아 입정(入定)에 들어갔다. 3월 10일 아침에는 석가모니부처의 열반상처럼 옆으로 누웠는데 하루 종일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옆에서 지키던 제자가 스님의 코끝에 실을 대어 숨을 쉬는지 확인해 보니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좌우 맥을 짚어 보아도 맥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까지 허운의 얼굴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고, 몸도 여전히 따뜻했다.
다음날 아침, 옆에서 지키던 제자가 문득 허운 화상의 가냘픈 신음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제자는 그에게 숨이 끊어진 지 하루가 지났다고 했지만 허운은 그저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는 즉시 제자에게 하루 동안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게 하고는 말썽이 일어나지 않도록 함부로 외부인에게 말하지 말라고 단속했다.
다음은 허운 화상의 말이다.
나는 꿈속에 도솔천(兜率天) 내원(內院)에 갔는데, 그곳은 장엄하고 아름다워서 모든 것이 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미륵께서 법좌(法座)에 앉아 설법하시는 것을 보니 앞에서 듣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중 십여 명은 전에 알던 분들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자 그들은 동쪽에서 세 번째 빈자리를 가리키며 나더러 앉게 했다. 아난 존자가 나와 아주 가까이 앉아 있었다.
미륵께서는 설법을 다 마치기도 전에 나를 가리키시며 “너는 돌아가거라!”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제자는 업장(業障)이 깊고 무거우니 돌아가기 싫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미륵께서 또 말씀하셨다.
“너는 아직 업연(業緣)이 끝나지 않았으니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 나중에 다시 오너라.”
허운 화상은 이에 어쩔 수 없이 불계(佛界)에서 다시 인간계로 돌아와야 했다.
미륵은 또 허운 화상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렸지만 허운은 당분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허운이 보여준 기적은 그를 박해하던 자들까지 불가사의하게 여기게 했다. 그들은 승려에게 물었다.
“저 늙은이는 어째서 때려도 죽지 않는가?”
승려가 대답했다.
“노스님은 중생을 위해 고생을 겪으신 것으로 당신들을 위해 재앙을 없앴기 때문에 때려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나중에 당신들도 알게 될 겁니다.”
그러자 그들도 두려워하며 더는 악랄한 수법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후 중공이 운문사 승려들을 박해한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허운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박해는 일단 수그러들었다. 이 사건을 훗날 ‘운문사변(雲門事變)’이라 한다.
사리의 신비
허운 화상의 관문제자(關門弟子 역주: 스승과 마지막을 함께 한 제자)였던 소운(紹雲) 스님은 《소운법사개시록(紹雲法師開示錄)》에서 허운 화상의 마지막 몇 년간 일에 대해 소개했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허운 스님은 자주 아프고 열이 나곤 하셨다. ‘운문사변’으로 입은 낡은 상처와 골절 부위가 수시로 아팠기 때문이다. 스님은 늘 침대에 누워 신음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손님이 찾아오면 스님은 곧장 일어나 다리를 틀고 앉으셨다. 정신상태도 아주 좋아서 사람들과 서너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아픈 기색이라곤 전혀 없으셨다. 그러나 손님이 떠나면 다시 누워서 신음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묻자 허운 스님이 대답하셨다.
“이는 업장(業障)이다. 염라왕도 나를 관할할 수 없는데, 내가 일어나려고 하면 일어나고 일어나기 싫으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1958년 이후 허운 화상이 제자에게 자신은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여러 제자들이 슬퍼서 왜 가셔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허운 화상이 대답했다.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십 년의 고난이 또 있으니, 정말 힘들 것이야!”
나중에 10년 거대한 겁난인 문화대혁명이 발생한 후에야 제자들은 비로소 스님이 이 일이 발생할 것을 미리 아셨음을 알았다.
1959년에 허운 스님의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3월이 되자 아침과 낮에 작은 죽 한사발만 겨우 먹었다. 어떤 사람이 스님을 위해 의사를 모셔왔지만, 그는 늘 “세상의 인연이 곧 다할 것”이라며 의사를 돌려보내곤 했다.
허운 화상은 1959년 9월 12일 원적(圓寂)했다. 원적하기 약 한 달 전부터 많은 승려들이 한줄기 큰 빛이 모봉(茅蓬)에서 나와 대전(大殿)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단지 환한 광환만 보일 뿐 그 어떤 영상(影像)도 보이지 않았고 대전에 들어간 후 광채가 서서히 사라졌다. 9월 19일 감실(龕室)을 봉인하고 다음날 화장했으며 3일 후 화로를 열어 사리와 유골을 선별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틀째 되는 날 조주(趙州) 관문 밖에서 산불이 났다. 산에는 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살았는데, 승려들은 모두 산불을 끄러 나갔고, 사찰에는 노약자들만 남았다. 그중 관회(寬懷)와 관극(寬克) 두 스님이 화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허운 화상을 화장하고 남은 유골(遺骨)이 그대로 앉은 채로 있었는데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그곳에 앉아 있었다. 이들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작은 기와 조각을 주워 유골을 향해 던지자, 유골이 통째로 쓰러졌다. 관회 스님이 손을 뻗어 유골을 한 움큼 집어 들자, 영롱한 사리 여러 개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보자마자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산불을 끄러 나갔던 사람들이 속속 돌아왔고 허운 화상의 유골에 사리가 들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다투어 안으로 유골을 한 움큼 집어 들고 산속 한적한 곳으로 달려갔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다 이렇게 했는데, 어떤 이는 유골 안에 여러 개의 사리가 있었고, 적은 경우 한두 개의 사리가 있었다. 사리는 크기가 다양하고 색깔도 달랐는데 수정처럼 투명한 흰색이 가장 많았다. 때문에 허운 화상의 유골에서 얼마나 많은 사리가 나왔는지 통계를 낼 수 없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허운 화상이 가부좌를 틀고 사리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을 봤는데, 그중 한 사리에는 그의 긴 눈썹까지 선명히 보였다. 이 사리는 지금도 사리탑 안에 소장되어 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허운 화상을 비방하려고 이 사리는 호박을 태워 나온 가짜라고 했다. 그래서 누군가 호박을 불에 넣고 태웠더니 모두 재로 변했다. 진짜와 가짜 사리를 판별하는 문제는 전에 방송한 내용이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확인해보기 바란다.
[역주: 진짜 사리는 고온으로 태워도 불에 타지 않는다. 반면 가짜 사리는 이런 고온을 버텨낼 수 없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미해지미’ 저는 부요입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중문 대기원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2/9/19/n1382789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