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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5천년 : 수나라(1)

상하5천년 :역사의 진실-성세를 개방한 화려한 왕조 수나라(1)

(서기581년~서기618년)

글쓴이: 심연

[정견망] 중원은 300여 년의 혼란과 분열을 거쳐 천하가 통일 되었다. 삼국시기의 제갈공명이 <마전과(馬前課)>에서 예언한 것처럼 중원은 “二三其位(이삼기위)” 후에 결국은 “羊”(楊)이 사마(司馬)씨로부터 건립한 서진(西晋) 정권의 “天下無主”한 상황을 끝마쳤다.

비록 수나라는 역사에서 30년간 유지했지만 중국 역사상 무시하지 못할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나라는 스스로 흐르는 역사의 물결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모든 것을 연기처럼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수나라는 후에 당나라의 흥성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으며, 남북조의 혼란한 국면을 끝내면서 체계적으로 모든 것을 잡아주었다.

수나라는 천하 통일을 완성한 후에 남북조 시대의 불교를 제창하고 부처를 존경하는 등 불법을 홍법하는데 대거 나섰다. 이것은 주무제가 멸불한 후 침체된 불교를 또다시 새로운 흥성의 단계로 이끌었다. 이에 당나라에 이르러 불교가 최대로 흥성하는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수나라는 또 천하를 통일한 뒤 제도상에서 많은 개혁을 하였다. 역사상 국력을 최강으로 이끌었던 당나라의 업적은 이렇듯 수나라가 기반을 닦아 주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면에서 보면 당고조와 수탕제 양광은 친척이라는 사실에서 드러나듯 당나라가 수나라의 맥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기점으로 보았을 때 어떤 역사 서적에는 수나라와 당나라를 합쳐 “수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수문제의 출생과 동반된 기한 현상(異象)

수문제의 이름은 양견으로 홍농군 화음 사람이다. 양견 부친의 이름은 양충으로 宇文覺(우문각)을 도와 북주정권을 건립한 자로서 관직이 주국(柱國)까지 이르러 “수국공(隨國公)”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양견은 “풍익반야(馮翊般若)”라고 하는 사찰에서 태어났다. 소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나기 직전 적색의 빛이 방을 비추자 자색의 기가 방안을 맴돌았다고 하는데, 자색의 기와 빛은 방에 있던 사람의 옷까지 자색으로 물들여, 이를 본 주위의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呂氏(여씨)는 창용이 배속으로 들어가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역사 서적에 기재된 실록을 보면 실제로 양견은 생김새가 특이하고 손에 “王”이라는 무늬가 있었다고 한다.

양견이 출생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지선(智仙)이라는 하동지역에서 온 “비구니”(송나라 이후부터 “스님”이라고 불렀음)가 와서 그의 부모님을 뵈러 왔다고 했다. “비구니”는 양건에게 “나라연(那羅延)”(번어로 금강불괴라는 의미)라는 이름을 지어주고는 말하기를 “이 얘가 온 곳은 보통이 아니니 당신들과 같은 속인 집안은 불결하기 때문에 제가 아이를 기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당신들은 이 애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늘에서 부처가 보살피고 있기 때문이지요”라고 했다. 이에 양견의 부모는 아들을 알지도 못하는 낮선 비구니에게 넘겨주기 싫었지만 양견이 지선을 보고도 울지 않고 떨어지면 우는 것을 보고는 지선이를 옆방에 살면서 아이를 기르게 하였다.

지선이 아이를 기르는 동안 양견의 부모와 약속을 하였는데 지선의 허락이 없이는 절대로 방에 들어가서 아이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여씨는 너무나 아들이 보고 싶어 지선이 없는 틈을 타 방으로 들어갔다. 침실에 들어가 아이를 안자 아이의 머리에서 뿔이 나오고 몸에는 용 같은 비늘이 생기더니 용으로 변신하는 것이었다. 기절할 정도로 놀란 여씨는 아이를 땅에 떨어뜨렸다. 그 후 양견의 부모는 다시 감히 아이를 안지 못하였다.

양견은 어릴 때부터 지선과 함께 생활하면서 부처님을 모시고 계를 받은 제자가 되었는데, 아이가 13살이 되어서야 지선은 비로소 떠나갔다. 양견이 일곱살 때 지선은 “너는 커서 큰일을 할 것이다. 너는 동쪽에 있는 나라에서 왔고 불법이 멸할 때 네가 가서 불교를 흥성 시킬 것이다”라고 알려줬다. 후에 양견은 황제의 자리에 올라 불법을 흥성시켰다.

양견은 속인 사회에 돌아온 후 전문적으로 귀족자제만 다니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는 항상 자신이 “책에 쓴 말을 알아보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위망으로 그는 14살 때부터 벼슬을 하게 되었으며 선후로 표기대장군, 대흥군공 등을 담당하였다. 서기 560년 주무제가 있을 때 20세도 되지 않는 그는 이미 수주자사라는 관직을 담당하였다. 6년 후에 그는 권세를 잡고 있는 대장군 독고신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역사서에 의하면 독고황후는 개성이 강하고 재능이 보통을 능가하며 양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젊은 나이로 높은 관직과 권세를 누리게 된 양견은 다른 사람의 질투와 위협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양견을 제거하려고 하였지만 양씨가족의 세력과 고독가족의 세력은 그를 보호하여주었으며, 비록 위험은 항상 있었으나 후에 양견의 장녀가 태자비가 되면서 양견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수조의 건립

서기 578년 주무제가 병사하고 선제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양견의 딸은 당연히 황후가 되었고 양견은 상주국, 대사마 등으로 승진되어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헌제는 황음무도하여 대신들에게 위신이 없어 양견은 그를 대신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580년 선제는 남부를 토벌할 것을 결정하였는데 출발하기도 전에 병에 결려 쓰러졌다. 선제가 남긴 어명에 의하면 양견이 조정을 총괄하고 8세 되는 주정제 우문연을 도와 나라를 다스리라는 명이었다. 양견이 보정대신이 된 이후에 재능 있는 사람들을 채용하여 조정을 관리하였고 정치국면을 안정시켰다. 그 다음 자신을 위협하는 종실에 공세를 펼쳐 나갔다.

주선제의 동생 우문찬은 조정에서 양견과 세력이 비슷하여 양견이 권세를 잡는데 제일 큰 장애가 되었다. 이리하여 양견은 유능한 사람을 보내어 우문찬을 설득하여 집에서 휴양하게 하였다.

이후 양견은 5개 실력이 있는 지방정권 왕의 세력을 소멸하였으며 하남 사천 호북에 있는 자신을 반대하는 군사세력을 청산하여 철저히 북주의 정권을 잡았다.

서기 581년 정월 주정제는 선위하는 어명을 양견의 자택까지 보냈다. 이리하여 40세의 양견은 정식으로 황제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양견은 부친의 작위를 이어 받았기 때문에 수국공(随国公)이었는데 후에 수왕(随王)까지 봉하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왕조의 국호를 수(随)라 하였는데 옆에 있는 수(随)자 변에 갈 주(走)자와 근사한 변이 있어 불길하다고 하여 갈 주(走)자를 없애고 수(隋)가 된 것이다. 연호를 개황이라고 하고 수도를 장안에 정하였다.

수문제의 원을 이루고 불교를 흥성하였다.

양견은 황제가 된 이후 자신의 전생이 비구승이었고 그 전에는 석가모니불의 제자였으며 그 전에는 모금강이라고 하면서 불법을 흥성시키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문제 양견은 큰 원을 발하여 홍법을 하기 시작했는데, 처음 황위에 직위한 후 두 차례에 걸쳐 각 주에서 사리탑을 세웠는데 83개나 되었다고 한다. 수나라는 짧은 38년 동안 불탑을 5000개 건설하였고 세운 불상의 수는 만에 달하였으며 중수한 것은 셀 수 없으며 출가하여 스님이 된 사람도 50만에 달하였다.
수문제의 강대한 힘에 의해 민간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이 날로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조정대신들도 불교를 믿는 사람이 늘어나 수나라는 지상불국의 나라가 되었다.

수문제는 대행보살 국왕이라고 칭하였으며 황후 독고는 계를 받은 후 묘선보살이라고 칭하였다. 조정의 문무백관 모두 불호를 가지고 있었다. 황궁에는 매일 불경을 논하고 향을 피워 사찰과 다름이 없었는데, 황제와 왕비가 궁밖으로 나갈 때는 항상 스님이 따라 다녔고 수시로 도장을 열어 불경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수나라는 막고굴(돈황에 있는 굴-역자주)까지 새롭게 수리하였다. 수나라가 수리하거나 다시 건설한 동굴이 94개에 달하였는데, 이 숫자는 막고굴에서 200년 동안 건설한 동굴의 배가 되는 숫자다. 동굴에 있는 부처의 형상도 크고 웅장한 감을 주었고 다시는 쓸쓸하게 보이지 않았으며 각기 특색이 있는 수많은 보살과 금강이 새겨져 있었고 마치 모든 신이 밝게 중국 대지에 모인 것 같았다.

수문제는 근면하게 나라를 다스리다

성심으로 부처를 믿은 수문제는 나라를 다스림에 매우 근면했다. 그는 많은 일에 친히 참여하여 실효를 주장하는 태도를 취했고 절약 정신이 강했다.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제어를 강화하기 위해 황제에 오른 후에도 자신의 아들을 파견하여 각 지방에 가서 지방 사무와 당지의 군사를 장악하면서 다스리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양견은 재능 없는 대신을 귀향 보냈으며 실적 있는 신하에게는 요직을 주었다. 귀향을 간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황제에 오르는데 공을 크게 세운 사람도 많았다.

그 후 양견은 많은 개혁을 실시했는데, 그 중 지방과 중앙의 정치체계, 조세제도, 토지제도, 법률 화폐, 대외관계 면이 모두 포함되었다.

1. 정치제도적으로 수나라는 중앙집권 기능에서 한나라와 위나라의 옛 체계를 받아들이고 삼사(三師) 삼공(三公)를 설립하였으며 상서(上書) 문하(門下) 내사(內史) 비서(秘書)내시(內侍)등 오성을 설립하였다. 삼사(三師)와 삼공(三公)은 대신에게 주는 명예직이었다. 5성 중에서 비서성이 좀 한가한 직이었고 내시(內侍)성은 모두 환관이었다. 상서 문하 내사 등 3성의 직책은 진나라와 한나라 때 재상과 직책이 같았다. 3성은 상호간에 서로 견제하였다. 정책을 결정하는 기관은 내사성이고 장관은 내사령이었다. 심사하는 기관은 문하성이고 장관은 납언이라고 하였다. 일상 정무를 처리하는 기관은 상서성인데 상서성에서는 좌우 복사(仆射) 각 한 명을 두었고 밑에는 리,예,병, 도지-吏、礼、兵、度支-(후에 民部(민부)라고 고침), 도관-都官(후에는 刑部(형부)로 고침, 工部(공부)가 있었다. 5성 밖에 또 御史(어사), 都水 (도수)를 설립하였고 太常(태상), 光祿(광녹), 衛尉(위위), 宗正(종정), 太仆 大理(태복대리), 鴻胪(홍려), 司農(사농), 太府 (태부), 國子(국자), 將作(장작)등 11사를 설립하였고 좌우로 위부를 12개 설립하였다. 또 특진과 朝散大夫(조산대부)라는 7등급의 명예직을 설립하여 공이 큰 신하에게 부여하였다.

지방에서 수문제는 이왕에 쓰여 왔던 주, 군, 현 3급 등급 제도를 주, 현의 두 등급제도로 바꾸고 작은 현은 합병하여 관직의 자리와 정부의 지출을 줄여 효율성을 높였다.

2. 수문제는 관원을 선발하는 과거제도를 처음 시행하다.

수나라 이전에 관리를 선발하는 것은 九品中正制度(구품중정제도)를 사용하였는데 西魏(서위) 北周(북주)시기의 九品中正制度(구품중정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즉위를 한 후에 정식으로 九品中正制度(구품중정제도)를 폐지하고 매주, 매년에 貢士(공사)를 3명에 한하였다. 598년 (開皇개황 18년), 문제는 경에 있는 5품 이상의 관리와 지방관리 등 관리를 과거시험을 보아서 선발한다고 하여 이것이 바로 역사상의 과거제도가 시작된 것이다.

3. 나라의 병역제도와 형법 등의 면에서 수문제의 개혁

북주(北周)에서 부병제도(府兵制度)를 건립한 후에 병(兵)과 농(農)이 합쳐 동일체가 되는 추세가 나타났다. 590년에 수문제는 “군인은 각 주와 현에 소속되어 있으며 농사를 짓고 민과 같이 관리를 한다.”라는 령을 내리고 군의 호적도 민의 호적과 같이 각 주 현에서 소속되어 전에 있었던 병과 민을 따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바꾸었다. 부병제는 균전제(均田制)와 결합하여 진일보하는 효과를 보였다.

북주에서 시행하던 형벌의 과한 현황을 파악하고 수문제는 “개황율(開皇律)”이라는 법전을 만들었다. “개황율”은 북위(北魏), 북제(北齊)형사 법율의 기초에서 수정하여 만들어 졌으며 차열(車裂), 궁형(宮刑) 등 잔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단 500여개의 법령만 남겼다. 형의 종류는 死(사), 유(流), 도(徒), 장(杖), 태(笞) 등 5가지로 나누었다. 그리고 사형은 또 교수형와 참수형, 두 가지로 나누었다. 유방(流放)(죄인을 먼 데로 보내는 형벌)은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1000리 1500리 2000리 등 3가지로 구분하였다. 도형은 1년, 1.5년, 2년, 2.5년, 3년 5년으로 구분하였다. 장형(杖刑)은 60대 150대로 나누었고 태형은 10에서 55까지 나누었다. <개황율>에서는 특별히 “십악(十惡)”이라는 것이 쓰여져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반역죄, 대반역죄, 모반, 악역(惡逆), 불도(不道), 대불경(大不敬), 불효(不孝), 불목(不睦), 불의(不義), 내란(內亂) 이다. 이러한 죄를 지은 자에 대해서는 엄중한 형벌을 가하였으며 사면을 하지 않았다. 귀족이나 관리가 이러한 법을 위반하지 않았으면 형벌을 한층 감면하여 주거나 돈으로 벌을 대신할 수 있었다.

4. 농업상에서 계속 균전제와 조용조제(租庸調制)를 실시하였다.

수나라의 제도에 의하면 친왕(親王)부터 도독(都督)까지는 영업전(永業田)을 주었는데 많은 자는 100경(顷)을 주었고 적은 사람에게도 30경(顷)을 주었다. 수도에 있는 관리들에게는 1품부터 9품까지 관직에 따라 땅을 나누어 주었는데 많은 사람은 5경이고 적은 사람은 1경이었다. 그리고 관서에 쓰이는 비용은 따로 땅을 나누어 주었다. 농민, 하인, 소 등에 대한 제도는 북제의 것을 따랐다. 즉 한 부부가 120무의 땅을 보유 할 수 있었고 성년 남자에게는 20무에 달하는 땅을 주었다. 지주나 관료의 하인의 수는 관직의 높고 낮음에 따라 60인부터 300인까지였다. 그리고 하인이 땅을 보유하는 수량은 보통 서민과 같았다. 소 한 마리에 60무의 땅을 갈게 하였고 4마리 이상을 보유하지 못하게 하였다.

균전제를 실시한 후에 농민들이 땅을 얻게 되었고 지주들의 독점 추세가 억제되었으며 농민들이 농업에 적극성을 높이고 경지면적을 넓히는데 유리하였다.

균전제를 실시한 기초 위에 수나라는 조용조(租庸調)제도를 실시하였다. 조용조제도에 따르면 장정은 자신이 병역의 비용을 부담하여야 하였고 늙으면 병역을 면하였다. 조용조의 계산 방법은 한 부부를 단위로 세금을 내어야 하였는데 단위당 3석의 쌀을 내고 농경하는 작물에 따라 내는 세금도 달랐는데 뽕나무 농사를 하는 사람은 비단 한필과 면 3냥을 내야 하였으며 삼베를 생산하는 농가는 마 한필과 마 3근을 바쳐야 하였다. 미혼 남자와 하인은 보통 사람의 절반의 세금을 내면 되었다. 수나라는 예전의 병역제도를 따라 매년에 한달 동안 병역에 복무하여야 하였으며 583년부터는 21세부터 병역을 20일 하여야 하였다. 590년 부터는 50이 되면 병역을 면하고 다른 재물(천, 면, 비단 등 물건)로 병역을 대신하였다.

5. 세금 면에서의 변화

수문제는 농민이 바쳐야 할 세금을 감면하여 주었고 하인은 모든 세금을 반을 내면 되었다. 농민의 부담도 경감되었고 농민이 농사에 종사하는 시간도 늘어졌으며 수입도 증가 되었다. 이것은 모두 농업생산발전에 유리하였다.

6 . 호적제도 면에서 “대소모열(大索貌閱)과 수적정양(輸籍定樣)”정책을 실시하였다.

수나라는 전국에서 “대소모열을 실시하여 개개인을 대상으로 호구를 다시 정리하고 나이를 너무 어리게 부르거나 늙게 부르는 것을 방지하였으며 만약 호구가 부실하면 이장이나 당장을 먼 곳으로 유배시켰다. 그리고 사촌형제는 모두 분가를 하여야 하며 서로 고발하는 것을 장려하여 주었다. 이러한 조치를 하여 전국에서 호적에 새롭게 올린 호구가 164만명이 증가하였으며 남자가 44.3만명 증가하였다.

그리고 수문제는 고영이 건의한 “수적정양(輸籍定樣)” 방법을 받아들여 매 개인당 내야할 조세와 각 집의 가산의 정황에 따라 내야 할 세금 표준을 실제보다 낮게 할 수 있었다. 매년에 현의 장관이 사람을 보내어 백성을 5섯호 혹은 3호를 무리로 모아서 표준에 의하여 호급의 상하를 나누었다. 이렇게 한 결과 국민의 호구상황과 내야할 세금을 명확히 알아낼 수가 있었고 사람들도 세금을 도피 할 수가 없었으며 지방에 있는 관리도 마음대로 부정부패를 하지 못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정한 세금이 대농장이나 대가족이 점유한 토지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때어 나간 돈보다 적은 것이었다. 이것은 많은 대농장에서 살던 사람을 정부가 만든 새로운 정책 쪽으로 오게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국가의 인구가 늘어났다. 이 정책의 결과는 대농장주와 세습대가족의 이익에 타격을 주었으며 동시에 사회발전에 유리하게 되었다.

7. 화폐의 통일과 도량형의 통일

수나라 이전에 화폐는 장기적으로 혼란한 국면에 있었으며 크고 작기가 달라 상품교환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수나라가 건립한 후에 새로운 화폐를 사용하여 통일시켰다. “엄격히 제작하고 돈의 단위를 통일 시켜 시장에 유통함으로 나라 백성에게 편리함을 주자”라는 정책을 섰다.

8. 대외 외교관계면에서 수문제는 안무(安撫-인심을 위로함)를 위주로 하고 방어적인 정책을 사용하였다.

일찍이 북제와 북주시기에 북방에 살고 있는 돌궐족은 장기적으로 내지에 사는 중원지대를 침입하고 교란하였다. 양견이 북주에서 세력을 잡은 후에 돌궐족과 통혼을 하는 방법으로 두 나라관계를 환화시키는 방향으로 국정을 펼쳐나갔다. 수나라가 건립한 후에 돌궐은 남하하여 침공하고 교란하는 일이 더 많이 발생하였는데 모두 수나라 군대에게 패배를 당하였다. 돌궐의 세력을 효율적으로 막기 위하여 양견은 만리장성을 쌓는 것을 주장하면서 북방의 변경지대의 방어선을 공고하려고 나섰다. 후에 돌궐은 내부의 분열로 동 돌궐과 서 돌궐로 나눴다. 동 돌궐은 수나라와 국력 면에서 많이 떨어져 대항할 수 없게 되자 점점 완화 정책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후에는 수나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서 돌궐은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수나라에 대한 위협도 점점 적어져 갔다.

수문제의 중국 통일

수문제는 북방의 변경지대를 안정시킨 후에 천하를 통일하는 다음 단계로 들어갔다. 먼저 그는 후량(後粱)을 소멸하였다. 후량은 원래 북주의 보호를 받았는데 양견은 처음에는 사이를 가깝게 두고 지내다가 마지막에 수나라의 세력이 커지자 파병하여 후량을 점령하였다.

당시 강남을 차지하고 있던 진(陳)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陳叔寶)는 주색을 매우 즐겼다. 서기 588년 가을 수문제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진을 토벌하였다. 전선은 동쪽의 바다로부터 서쪽의 사천까지 펼쳐져 있었으며 장강 일선에서 진에 대한 전면전을 펼쳤다. 진의 총 병력은 10만밖에 달하지 않았으며 상하가 일심으로 적을 대항할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모두 주색에 빠져 긴급한 상황을 몰랐다. 수나라 군대가 진나라의 황제 진숙보를 포로로 잡았을 때에는 전선에서 전해온 급보는 보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이렇게 하여 수나라는 전국을 통일하고 뒤에 당나라의 흥성을 위하여 좋은 기초를 닦아주었다.

수문제의 공적

수문제 양견은 중국 역사에서 공적이 탁월한 황제라 할 수 있다. 그는 정치체계, 법제 면에서 많은 개혁을 하였으며 훗날 당나라 체계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사실상 당나라는 체계상 완전히 수나라의 모든 것을 받아 들였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인데, 우리가 당나라의 성세와 화장을 찬송 할 때 이 화려한 역사의 시작인 수나라를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여기서 지적할 것은 수문제이다.

황태자의 선발과 수문제의 죽음

수문제 양견은 만년에 의심이 심했는데 특히 황태자 선발의 문제였다. 양견은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황후 독고씨의 소생이다.

장자 양용은 어렸을 때 부모가 매우 사랑했다. 그러나 장성한 후 양용은 사치하고 여색에 빠져 잘못을 숨길 수 없었다. 이에 근검절약을 부르짖는 양견부부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양용은 태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어 마지막에는 평민으로 폐해졌다.

둘째 양광은 매우 심계가 깊었다. 그는 위장을 잘했는데 부친 앞에서는 매우 근검한 듯하고 모친 앞에서 모범을 나타내어 정비하고만 가까이 지냈다. 그는 나중에 형인 양용을 대체하여 태자가 되었다.

셋째 양준, 넷째 양수는 모두 사치했고 여색에 탐욕한 사람이었다. 양준은 병사했고 양수는 양광에 의해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막내 양량은 양견이 죽을 때 병사를 일으켜 경성에 뛰어와 황위를 쟁취하려고 했으나 곧 패하여 잡혔다.

서기 604년 양견이 중병이 들자 양광 등지의사람들이 궁에 들어와 시봉을 들었다. 죽을 무렵 양견은 마침내 양광의 진면목을 보았으나 이미 너무 늦었다. 양광이 양소에게 써준 편지가 양견의 손에 들어왔는데 편지에는 양견의 사후에 어떻게 조정의 일을 안배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있었다. 편지를 보고 양견은 분노가 극에 달했다. 그를 상심하게 한 또 다른 사건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선화부인을 양광이 밤에 희롱하였다는 것이다. 양견은 이 때 양광을 태자로 책봉한 것을 후회했고 급히 사람을 시켜 양용을 찾았으나 양광이 듣고 양견을 시봉하는 사람을 전부 바꾸어 버렸다. 그날 양견이 죽었으니 향년 64세였다. 역사에서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후세인들은 양광이 독수를 썻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중병에 걸린 양견이 격분하여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하여 수조의 둘째이자 최후의 황제 양광은 진상이 알려지지 않았다.

발표시간:2004년 9월 2일
정견문장: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4/9/2/2890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