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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수나라(2)

상하오천년: 역사의 진실-성세를 개방한 화려한 왕조 수나라(2)

(서기581년—서기618년)

[정견망] 비열한 속임수로 황위를 계승한 수양제

글쓴이: 심연

양광(楊廣)은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의 둘째 아들로 그의 별명은 양영(楊英)이다. 양견은 수나라를 건립하고 양광(楊廣)을 진왕(秦王)으로 봉하였는데 그 때 양광의 나이는 13살 이었다. 양광은 왕위뿐만 아니라 병주(并州) (지금의 산서성 태원시)의 총 책임자 직을 담당하고 있었다.
수나라가 陳(진)을 멸하고 중국 통일을 위해 치르는 전쟁에서 책임자는 20살인 양광이었지만, 실제로 전쟁을 주도하는 자들은 하약필(贺若弼)과 한금호(韓擒虎)등 장군들이었다. 진을 멸한 후 양광의 기세와 도량은 드높았다. 그는 건강(建康-지금의 남경)에 들어서자 진나라의 간신만 죽이고 나머지 왕족과 왕비들을 수도로 압송하였고, 그는 또 명을 내려 모든 물품을 봉한 뒤 한 푼도 건드리지 않고 모든 것을 조정에 바쳤다. 그 후 그는 태위(太衛)라는 요직에 책봉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다. 서기 590년 그는 황제의 명을 받고 강남에 가서 양주의 총책임자가 되었고, 그곳에서 일어나 고지혜(高智慧)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600년에는 북쪽 돌궐(突厥)의 침략을 물리쳤다. 이처럼 나라에 세운 공적은 다른 왕자들은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양광의 성격은 전형적인 이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강한 허영심을 품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방탕한 짓을 하기 좋아 하였다. 왕자가 이런 품성은 아주 위험한 것인데, 그의 문무에 뛰어난 재능은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 할 정도였다. 그는 무엇을 원하고자 했을 때 그것을 얻기 전까지 자신을 위장하여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성품은 황위를 쟁탈하는 과정에서 황제와 독고 황후를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양광의 부모는 아들을 검소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부모 앞에서 검소한 척했지만 실상은 매우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부모가 자신의 집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미리 알고는 예쁜 애첩은 숨겨 놓고, 처 소씨(蕭氏)와 같이 문밖까지 나가서 부모님을 모셨다. 그리고 나이 많은 노비와 미모가 보통인 부인에게 낡은 옷을 입고서 부모님을 모시게 했다. 양광의 이러한 위장술은 부모님의 환심을 얻었는데, 그는 주기적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하인에게 뇌물을 주어 인심을 샀다. 그의 뇌물을 받은 하인들 모두 그에 대한 좋은 말만 황제에게 고하였다. 양광의 수단에 넘어간 양견부부는 점점 둘째 아들에게 마음을 기울었고, 실속 없는 태자 양용을 싫어하였다. 결국 그들은 태자를 폐위시키고 양광을 태자로 책봉했다.

태자 자리를 더 확고히 다지기 위하여 양광은 죄명을 만들어 친 동생 양수를 모함하였고, 그 결과 양견은 마지막 아들마저 서인(庶人)으로 만들었다. 서기 604년 양견이 병으로 인수궁에 눕게 되자 양광은 황제의 자리를 탐내어 양소를 찾아 후사를 논하였다. 그러나 양소가 양광에게 전하려던 편지가 양견의 손에 들어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양견은 대노하였다. 후에 양견은 자신이 총애하던 선화부인 진씨가 양광에게 희롱당한 사실을 알고는 더욱더 분노했다. 양견은 사람을 시켜 양광을 폐위시키고 큰 아들 양용을 복위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양견 옆에 있던 양광의 심복은 이 소식을 양광에게 알렸다. 양광은 양견 옆에 시중들고 있던 하인 모두 자기 심복을 바꿔버렸다. 양견은 그 날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의 나이 64세 였다. 역사상 기록된 서적을 보면 실제로 양견의 죽음에 대해 명확하게 남겨진 게 없어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후세 사람들은 양견의 죽음에 대해 아들 양광에 의해 피살당했다고도 하는데, 심하게 병을 앓던 양견이 갑자기 들은 소식에 충격을 받아 돌아갔을지 모른다.

수양제 제위 후 발전

양광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문제시기에 있었던 대부분의 제도를 이어 받았으며 그 중 일부분은 개혁하여 새로운 정책을 펼쳐나감으로써 일정한 공적을 세웠다.

1. 그가 세운 가장 중요한 치적은 문제가 닦은 기반 위에 왕조에 많은 영향을 미친 과거제도를 발전시켰다. 과거제도에서 중요한 진사과(進士科)를 두어 재능있는 평민으로 하여금 벼슬길에 오르는 등용의 길을 마련해 주었다.

2. 법전을 개편하여 문제시기 잔인한 형벌은 폐지하였다. 수문제는 말년에 용서할 수 없는 많은 착오를 범했는바, 그 중 법을 위반한 자에 대하여 잔혹한 형벌을 가한 것이 하나였다. 수양제는 잔혹한 법령의 조문을 폐지하거나 처벌을 받아도 예전과 같이 심하지 않게 경감하여 주었다. 그러나 수양제도 말년에는 그의 아버지처럼 잔혹한 형벌을 많이 사용하였고 법령을 위반하여 그의 흉폭하고 독재성을 많이 드러냈다.

3. 학교를 많이 세워 다년간 전쟁으로 흩어진 책을 찾아 정리하였다. 양광은 양견이 폐지한 국자감(國子監), 태학(太學) 등을 회복하였으며 사람들을 조직하여 장주옥경(長洲玉鏡) 400여 편, 구우도지《區宇图志》1200편을 만들었다. 이는 문화적으로 중국의 고대 문서를 보존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4. 수양제는 州(주)를 郡(군)으로 변경하고 동시에 전국 각지의 관리는 모두 이부(吏部)에서 임명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현의 지방관리를 임명할 경우 다른 지방 출신을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는 지방 호적이 지방 정무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데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각 지방장관과 중요 부서 책임자는 연말이 되면 모두 중앙정부에 가서 책임진 분야의 보고서를 내야 했다. 또 중앙정부는 장기적으로 사람이나 관리를 지방에 파견하여 지방관리의 품행을 조사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정치를 바로 잡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는데 효과적이었다.

5. 수양제는 또 국민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서기 605년 낙양성을 재건하라고 명하였다. 당시 수도가 장안에 있어서 동쪽으로 향하는 교통이 불편하여 지방에 명령을 하달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낙양은 나라의 지리적 중심에 있어 강남이나 북방을 다스리고 통치하는데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했으며, 장안에 있을 때 많은 물자를 수도로 운송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낙양에 수도를 이전한 후에는 양식 등 물자 공급에 편리하여 인력이나 시간이 단축되어 상대적으로 국민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새로운 낙양성은 궁성과 황성 그리고 외성으로 나누어 졌다. 외성의 둘레는 70리에 달하였으며 안에 있는 황성은 문무백관이 사무를 보는 기관으로 구성되었고 그 안에는 둘레가 30리 되는 궁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수나라는 문제와 양제의 다스림에 양제가 즉위한 초년에 국고가 풍족하여 국민이 안거낙업하는 번성한 국면이 펼쳐졌다.

즉 경지 면적이 더 넓어지면서 농업인구가 급증했으며 나라의 국고는 날로 충실해졌다. 수나라 초기에 359.9만 가구에서 진을 멸한 후에 50만을 얻었고 전국이 410만 가구에 3000만 인구에 달하였다. 606년에 전국은 890만 가구에 달하였고 인구는 4600만으로 늘었다. 단 26-7년간에 가구가 400만 증가하였으며 인구는 1600만으로 늘었다. 인구가 이렇게 많이 급증한 것은 호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많이 누락한 부분을 찾아낸 것도 있지만 실제로 인구가 늘어난 것도 있었다. 인구의 증가세는 농업생산에 대량의 노동력을 가져다주었고 경지 면적이 날로 늘어갔다. 이와 동시에 많은 수력 시설을 개조하거나 새로 만들었다. 예를 들면 수주에서는 수리시설을 개조하여 5000ha에 달하는 면적의 경작지에 물개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하였다.

수나라의 국고가 충실한 것은 후에 사학자들이 호평했다. 수문제 말년에 “국고에 축적해 놓은 물자는 정부가 50-60년 사용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양제 초년 낙구에다 많은 양식 창고를 지었는데 창고 둘레가 20리에 달하였으며 8000석에 달하는 창고가 3000개 달하였다고 한다. 그 밖에 이양창(하남성 군현 이양진), 영풍창(산서화인)등 지방에도 양식 창고를 지었다.

이 시기에는 수공업도 예전에 비하여 많이 발전하여 양질의 물품을 만들 수 있었다. 특히 천이나 비단 제품과 자기(瓷器) 등의 업종이 많이 발전했다. 하북성은 역대로 방직업이 발달한 곳으로 수나라 때는 상주에서 양질의 비단직조 기술로 이 지역에서 생산한 비단은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명성을 얻었다.

수나라는 중국 자기 문화에 중요한 기술발전 단계를 거쳤다. 특출한 명품으로 하남의 안양 산서 서안 등 지역의 묘지에서 발굴한 골동품 중 “백유(白釉)”가 있다. 이 자기의 특성은 색이 투명하고 질이 뛰어나며 디자인도 새로웠다. 이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기록된 백자였다. 수나라 때 백자가 광범위하게 생산되었는데, 중국의 하남, 하북, 산서, 안휘 성에서 많이 발굴되고 있으며 그때의 요(窯)도 많이 발견되었다.

수나라는 조선기술도 매우 발달하였다. 당시 만든 전함은 5층 구조이며 높이가 100자(30미터)에 달했다. 좌우 앞뒤로 6개의 긴 대나무를 설치하여 전시에 적의 배를 공격할 수 있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양제가 강남을 유람할 때 “용주”를 만들었는데 높이 45자 넓이 50자에 길이가 200자에 달하였다고 한다. 배의 중심부위는 4층으로 나뉘고 상층에는 정전(正殿) 내전(內殿) 동서조당(東西朝堂)으로 되어있으며 중간층에는 120여 칸의 방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수양제가 건설한 대운하

수양제 제위기간 동안 가장 큰 공정은 대운하 건설이었다. 운하 건설은 남북 지역간의 교통을 쉽게 소통하고, 한편으로 자신이 강남에 가서 유람하는데 더 편한 교통수단을 제공받기 위한 목적이었다.

서기 605년 수양제는 우선 황하에서 변수(汴水)로 통하여 회하(淮河)로 들어갈 수 있는 통제거(通濟渠-운하의 일종) 건설을 명하였다. 그리고 회하에서 장강(長江-양자강)으로 들어가는 한구(邗沟)를 건설했다. 그리고 경구(京口-지금의 강소성 진강)에서 여항(餘杭-지금의 항주)까지 달하는 강남하(江南河)를 건설하였으며 심수(沁水)를 황하와 연결하여 북으로는 북경지역까지 연장하였다. 이 결과 역사상 유명한 대운하가 만들어졌다.

대운하는 중국 북방 북경에서 남쪽 항주까지의 수로를 개척함으로써 남북간 중요한 운송수단이 되었다. 그 길이는 5000여리에 달하였다. 대운하로 인해 수나라는 남방의 군사와 정치를 통제하는데 편리했으며 대량의 남쪽 물자를 많은 인력을 쓰지 않아도 낙양과 장안에 운송할 수 있었다. 운하로 인해 군사와 정치적 통제만이 아니라 남북간의 문화적 교류도 강화 되었다. 대운하는 중국역사에 수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元, 明, 淸 나라가 북경에 수도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운하로 많은 물량을 운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양제는 그의 방대한 계획을 완성하는데 6년이 걸렸다. 그는 14년간 황제의 자리에 있었는데, 대운하만으로도 수양제의 역사적 공적을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당나라 초기 정관지치(貞觀之治)도 대운하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수양제 시기 대외 관계
서역에 대한 개발

606년 양광은 대규모 서역 개발에 나섰다. 그전 수나라는 장액과 서역에 있는 상인을 통하여 무역을 해왔다. 수나라의 황문시랑 배규는 무역에 관한 구체적인 사무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후에 배규는 황제에게 서역 개발에 대한 글을 올렸다. 수양제는 그의 건의를 듣고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수양제는 돈을 이용하여 서역에 있는 상인이 수나라에 와서 무역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으며, 서역 상인이 지나는 지방에서 모두 초대를 받을 수 있는 편리를 주었다. 이런 무역은 평등하지 않은 무역 관계였음에도 오직 무역의 이름을 빌어 수양제가 천하를 다스린다는 문치무공(文治武功)이라는 허명을 위한 것이었다.

수양제는 서역개발을 위해 파병을 하여 서 돌궐족인 추루커칸을 물리쳤고 서역으로 통하는 교통을 장악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투구휘 등 기타 지방세력을 물리쳤다. 원래 서역과의 무역은 서로 이득을 보기 위해 진행되어야 함에도 수양제의 강제적인 행정수단으로 수나라의 물질적 재부를 자랑하는 전시회가 되었다. 이러다 보니 수나라의 무역은 이득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서역에 있는 상인이 되돌아 갈 때는 많은 물건을 하사했다. 이러다 보니 거액의 국고를 낭비했고 백성의 부담 또한 날로 늘어갔다.

610년 정월 수양제는 낙양에서 대거 축제를 벌여 서역 상인을 대접하면서 그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 축제는 한 달을 지속하였는데, 낙양의 모든 음식점이나 판매점 모두 서역 상인에 대해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여 주었다. 수양제는 이렇듯 국고를 탕진하면서까지 자신의 허명무실한 명성에 만족하였다. 그 결과 백성에게 거대한 부담을 안겨 주었다.

고구려 정벌

수양제가 황위에 즉위한 전후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펼쳤는데, 이 전쟁은 수나라의 국력을 대거 약화시켰다.

고구려는 중국 동북쪽 변경지대에 위치한 아주 강대한 이웃 나라였다. 고구려 서쪽 국경은 이미 지금의 요하를 넘어 요령성 부분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문제 시기에 고구려는 수나라 변경지대를 침입하여 양견이 무력으로 저항했지만 실패한 이후 다시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서기 607년 수양제가 황제에 즉위한지 3년째 되던 해에 돌궐을 방문했을 때 커칸(可汗)의 천막에서 고구려에서 온 사신을 만나게 되었다. 양제는 고구려왕 고원(高元)이 수나라에 올 것을 청하였으나 고구려 왕은 이를 거절했다. 거절에 대노한 수양제는 이를 핑계로 고구려에 군사적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612년 고구려에 대한 일차 정벌을 거행했다. 하지만 정벌의 길이 멀어 결과적으로 병사들의 사기는 많이 떨어졌다. 많은 양식이 상했고 후에 지속된 전쟁에서는 양식이 부족해 전쟁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수도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중 고구려 군대의 습격으로 대패하여 30만 대군이 2-3천 명만 돌아오면서 1차 정벌은 실패했다.

다음 해 수양제는 또 한 번 정벌을 시도하여 전선에 도착하자마자 후방에서 양소의 아들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켜 낙양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양광은 이에 급히 파병하여 낙양으로 원병을 보냈고, 이리하여 2차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수나라는 전국이 혼란해 지면서 왕조는 점점 패망의 기색이 짙어졌다. 양광은 서기 613년에 고구려를 상대로 3차 전쟁을 펼쳐 수나라 군대가 평양 근처에서 고구려 군을 패배시켰다. 패배한 고구려군은 평화협정을 제시했고, 양광은 철저히 고구려를 소멸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평화조약에 동의하였다. 이렇듯 고구려와의 전쟁은 아무런 결과 없이 미미하게 끝나면서 수양제와 수나라의 운명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수양제의 인덕없는 정책

수양제는 비록 통치 전기에 많은 공적을 세웠지만 그의 잔혹하고 사치한 본성과 인덕을 쌓지 않은 성품은 자신은 물론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수양제는 황위에 등극한 뒤 그를 구속하는 어떤 세력도 없었기 때문에 본성이 점점 드러났다. 미색을 좋아하고 화려한 궁전을 즐기며 도처에 여행하기를 좋아했다. 그의 생활은 사치스러워 역사서에 의하면 매일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고 한다. 비록 과장된 표현이라 하더라도 실제 상황은 아주 심각한 상태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유람을 즐기는 그는 십 몇 년 동안 3차례나 강남의 산수를 보기 위해 출행하였으며 북으로는 돌궐 커칸의 주거지까지 갔고 서쪽으로는 장액까지 갔다. 북방의 만리장성을 유람하다가 돌궐족에게 포위된 적도 있었는데 후에 이연(李渊)이 파병하여 위험에서 벗어났다.

수양제는 서역에 있는 사신이나 상인뿐만 아니라 나가서 유람을 할 때도 사치스러운 모든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그가 처음으로 남하하여 순찰할 때 강도(江都)에서 자신이 탄 배 높이는 45자에 달했으며, 그 넓이는 50자에 달했고 길이는 200자에 달했다. 그리고 상하로 4층 분할하여 정전, 조당(正殿、朝堂), 그리고 하인들이 자는 곳까지 마련하였다. 안에는 금은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같이 수행한 황후, 비, 귀인들 모두 자신의 독자적인 배가 있었다. 그를 수행하는 배도 몇 천 척에 달하여 앞뒤 길이가 200리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육지에서는 기병이 호위했는데 500리 범위의 현이나 군에서 그들이 쓰는 모든 비용을 부담하여야 했는바 다 먹지 못한 음식은 모두 버려져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수문제가 바르게 다스려 수나라의 국력이 강성한 상태였지만 수양제가 10년간 너무나 방탕하게 허비하게 되어 결국 나라의 재정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양제 스스로 재능은 있었지만 흉폭한 성격으로 인해 간신을 많이 임용하였다. 능력과 재능이 뛰어난 대신은 핑계를 대어 죽였으며 대신들의 권유는 듣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그의 잘못을 지적하면 반드시 보복을 하였다. 수양제에게 직언하여 죽은 대신의 수는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고구려 3차 전쟁이 끝난 후 태사령은 백성이 휴식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며 그의 낙양 유람을 막았지만 돌아온 것은 죽음뿐이었다. 이런 일인 자주 발생하자 감히 옳은 글을 올리는 대신이 없었다. 각처로 돌아다니며 유람할 때도 이와 같았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 관직을 주고 화나면 관직을 면하거나 죽였다.

양소, 우문술, 곽연 같은 간신들은 눈치를 보면서 듣기 좋은 말만 하여 총애를 받았으며 항상 보석이나 귀한 물건을 양제에게 선물하였다. 이런 간신으로 인해 수나라가 멸망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수나라 말년의 천재

수나라 전기에는 비교적 나라가 안정되어 역병이 비교적 적었으나 말기에는 천하 각처가 다시 혼란해 졌다. 수양제의 사치와 황음, 전쟁을 자주 일으켜 사회모순이 격화되었으며 이 때문에 역병이 널리 유행하였다. 수나라의 역병은 수차례의 전쟁과 관련되어 있다.

612년 산동, 하남에 홍수가 발생하여 40여개 군을 덮치면서 곧 질역이 나타났다. 그중 산동 지구 역병은 매우 엄중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게다가 양제가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원정했는데 산동지구에서는 정벌을 위해 강제로 자금을 거둬들여 민생이 불안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해 졌다.

수양제 말년 3차 고구려 정벌은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마을에서는 연기가 끊어지면서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형국이었다. 이 때 관중에 질역이 유행하고 가뭄이 들어 농작물이 타들어갔다. 비록 역사서에는 질역이 유행하여 조성된 결과를 상세히 적지 않았지만 가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역병이 수나라의 붕괴를 가속화 시켰다는 것이다. 역병의 횡행은 수나라 말기 통치가 부패한 결과였다.

수양제 죽음 예언

서기 617년 수양제는 재차 강도(江都)로 남하하였다.

사서에 의하면 수양제가 강도로 유람할 때 악공 왕령언(王令言)의 아들이 궁에서 돌아왔다. 왕령언이 아들에게 “오늘 황상에게 들려준 곡이 무슨 곡이냐!” 아들은 “<안공자>입니다” 왕령언이 아들에게 한 편을 연주하도록 한 뒤 말하기를 “너는 어가를 따라 강도로 가지마라. 이 곡은 궁의 소리가 없으니 황상은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후에 역사는 과연 이렇게 되었다.

수양제가 강도로 간 것은 곧장 황천으로 간 것이었다. 그가 그곳에 일년 이상 머무는 동안 농민봉기로 인해 천리가 새어도 구할 방법이 없었다. 각지에서 장군들이 할거하여 제왕을 칭했으며 태원에서 일어난 이연(李渊)은 스스로 황제로 칭하지(칭제)는 않았지만 장안을 공격한 후 양제의 손자 양유를 황제로 옹립하고는 자기는 태상황으로 올려 표면상 그를 퇴위 하게 하여 실제로는 자신이 칭제할 준비를 하였다.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안 수양제는 기억도 못하고 비빈들의 향락만을 추구하며 술에 취해서 지냈다. 하지만 그는 소황후에게 이 같은 위로의 말을 하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가 빨리 내려가기를 원하며 내 대신 황제가 되려고 한다. 그러니 나는 곧 쫓겨날 것이고 장성공이 될 것이다. 너는 두 번째 심후(남조 진나라 말년 황제 진숙보의 황후 심씨)가 될 것이니 우리 술이나 같이 마시고 번뇌하지 말자.” 하지만 수양제는 아직도 자기의 생명을 걱정하고 있었다. 한 번은 수양제가 거울을 보고 멍하니 서 있다가 황후에게 “정말로 좋은 머리인데 최후에 누가 이 머리를 자를까?” 라고 하였다. 만일을 대비하여 양제는 독약을 몸에 지니고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머리가 잘려서 비명횡사하지 않으려 했다.

618년 수양제 즉위 14년 3월, 시종 드는 호위병들이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를 수령으로 추천하여 변을 일으켰다. 수양제는 결국 교살 당했으니 그 나이 50세였는데 두 아들과 손자도 죽었다. 수양제 사후 소황후와 궁인들은 침상의 판으로 세 개의 관을 만들어 염을 하여 황급히 매장하였다. 나중에 강도 태수 진해가 강도성 서쪽의 오공대 아래에 이장하여 이후에 뇌당으로 보내어 장례를 치렀다. 민간의 전설에 의하면 수양제의 악이 너무 많아 그가 어디에 장례를 지내던지 벼락이 그곳을 친다고 하였다. 수양제의 묘는 나중 점점 황폐하여졌다. 청나라 가경(嘉慶-1796-1820)년 간에 비로소 뇌당 부근에 사는 양주학자 원원이 발견하였으며 현재의 능 앞에 원원이 중수할 당시 세운 비가 있는데 비석에는 당시의 서예가이자 양주 지부 윤병수가 쓴 “수양제릉” 네 글자가 있다.

양광 사후의 익호는 “양제”인데 이는 평가가 가장 나쁜 것이다. 수문제 양견은 원래 북주 우문씨의 제위를 탈취했는데 마지막에는 자신의 아들이 우문씨에 의해 살해당했으니 풍수는 돌고 도는 것으로 역사 또한 여기에서 한 번 작은 범위에서 돌았다. 하지만 제위는 다시 돌아가지 않는바 이씨에게서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조인 당조가 서서히 막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발표시간:2004년 9월 3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4/9/3/289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