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상룡(翔龍)
[정견망] 농촌에서 경작을 하던 시대에 토지는 부를 대표하는 것이었으며 늘 토지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는데 어떤 농민이 복을 얻기 위해 농토를 포기할 수 있을까?
남북조(南北朝) 시기 황매(黃梅)라는 곳에 완(宛)씨 성의 농민이 봄에 농사를 준비하다가 자기 밭에서 주인 없는 새 무덤을 발견했다. 망자(亡者)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농민은 조용히 그 땅을 포기하고 또 밭가는 중에 한 쟁기 흙을 무덤에 덮어주었다.
농민의 이 선한 행동은 곧 보답을 얻었는데 바로 대대로 농사를 짓던 그 집은 손자 대(代)에서 성시에서 장원한 수재(秀才)가 나왔다. 이는 황매에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급제를 한 일이었다. 이를 위해 황매 현령이 직접 관아를 나와 완(宛)수재를 맞이해 말을 타고 성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표창했다.
사실 완수재는 평소 공부가 그리 출중하지 못했는데 과거시험에서 출중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어려운 시험문제를 고인(高人)이 도운 덕분이었다. 완수재의 시험 당일 날밤 꿈에 자칭 유일뢰(劉一雷)라는 사람이 나타나 말했다. “너희 완가 중에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 있으니 오늘 몰래 점지해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완수재의 부친이 말했다. “우리 완가는 조상 대대로 유씨 성을 가진 사람과 왕래한 적이 없고 더욱이 무슨 은원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러자 수재의 모친이 말했다. “유일뢰(劉一雷)라는 분이 혹시 밭을 갈 때 그 한 쟁기 더 덮어준다는 뜻의 유일려(留一犁)가 아닐까요? (역주: 犁와 雷는 발음이 비슷함) 정말 이 한마디에 완가는 활짝 깨우쳤다. 그래서 “유일려(留一犁)”가 암암리에 완가를 도와줌에 감사하기 위해 그의 외로운 무덤을 잘 수리해주었다.
몇 년 후 사람들은 이 묘에 묻힌 죽간을 보고 원래 묘 주인의 이름이 유명한 포참군(鮑參軍)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포참군은 바로 남북조 시대의 문학자인 포조(鮑照 서기 414―466년)이며 말릉령(秣陵令), 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의 관직을 지냈고 나중에 임해왕(臨海王) 유자욱(劉子頊)의 전군(前軍) 참군(參軍)을 지냈다. 유자욱이 병사를 일으켰다가 패하여 황매로 피해갔을 때 포희 역시 난을 일으킨 병사에게 죽임을 당했고 시신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 없어 황매에 장사지냈던 것이다. 그의 출신은 비록 화려하지 않으나 시(詩)의 품격이 뛰어나 “포참군집(鮑參軍集)”란 문집이 있으며 나중에 이백(李白), 잠삼(岑參) 등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포참군 같은 고인이 완가를 뒤에서 가르쳐 준 것이 장원을 한 이치이다.
지금도 황매에서는 밭은 팔아도 묘는 팔지 않는다는 풍속이 있다.
발표시간: 2011년 10월 30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1/10/30/7816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