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 진자성(秦自省) 정리
[정견망]
제나라 환공이 패자(覇者)를 칭한 후 6년이 지났다. 재상 관중(管仲)이 중병에 걸려 일어나기 힘들 것 같았다. 제환공은 조급해 하며 친히 찾아가 그를 만나보았다.
환공이 물었다. “대신 중 누가 그대의 지위를 물려받을 만합니까?”
관중이 대답했다. “군주는 마땅히 누구보다도 자기의 신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임금께서는 마땅히 현자를 택해 쓰셔야 합니다.”
제환공에게는 세 명의 총애하던 신하가 있었는데 바로 역아(易牙) 개방(開方) 수도(豎刀)였다. 그들은 환공의 깊은 신임을 얻고 있었다. 제환공이 물었다. “역아는 어떻습니까?”
관중 “그는 제 자식을 죽여 군주에 영합했으니 인정이 없고 현덕지사(賢德之士)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쓸 수 없습니다.”
제환공이 또 물었다. “개방은 어떻습니까?”
관중은 “그는 자기의 부모를 배반하여 군주에 영합했으니 역시 현덕지사가 아니라 임용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제환공이 또 물었다. “그럼 수도는 어떻습니까?”
관중은 “그는 군주를 위해 자신을 거세했으니 더욱 현덕지사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신임하면 매우 위험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제환공은 관중이 죽은 후 그의 의견을 듣지 않고 이 세 사람을 중용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은 함께 결탁하여 조정의 대권을 거머쥐었다.
제환공에게는 3명의 정부인(正夫人)이 있었지만 모두 아들이 없었다. 그러나 이 외에 또 첩이 많았으며 첩 소생의 십여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 공자(公子) 강무궤(姜無詭) 강소(姜昭) 등이 있었다. 관중이 살아있을 때 제환공은 강소를 태자로 세웠으며 그를 송나라 국군 송양공에게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다.
관중 사후 제환공의 아들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면서 모두 제나라 국군(國君)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생각했다. 겨울 어느 날 제환공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신하 역아는 병사를 이끌고 궁중으로 들어와 수도와 함께 많은 대신들을 죽였다. 그리고는 강무궤를 군주로 옹립했다. 그러자 태자 강소는 송나라로 도망갔다.
제환공이 병이 들자 그의 아들들은 파벌을 만들고 쟁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제환공이 세상을 떠나자 더욱 상대를 공격하고 시끄러워 해결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궁중에는 아무도 없어 제환공의 시신을 누구도 관에 넣어 을 수 없었다. 시신은 침상에서 67일간이나 방치된 채 부패되어 구더기가 생겨 심지어 문밖으로 기어 나왔다. 결국 강무궤가 제위에 오르자 비로소 입관을 하고 부음을 내고 장례 의식을 거행했다.
태자 강소는 송나라 송양공의 동정을 얻었다. 송양공은 제후를 소집 군대를 연합한 후 출병하여 제나라의 내란을 평정하고 다시 강소를 보위에 앉혔다.
이때 제후들의 연합군이 제나라를 핍박하자 제나라 사람들은 두려워 그들의 임금인 강무궤를 죽이고 원래 태자인 강소를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하기로 동의했다. 이 사람이 제효공(齊孝公)이다.
당당했던 일대의 패자가 죽을 때 이처럼 비참하게 죽었으니 이는 그가 “현자를 임용하라.”는 관중의 말을 따르지 않고 소인을 중용했기 때문이다. 자업자득이라!
출처: 사마천의 사기(史記)
발표시간 : 2011년 11월 13일
정견문장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1/11/13/786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