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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조조(3): 의로운 깃발을 들고 반란을 다스리다

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2. 의로운 깃발을 들어 반란을 다스리고 어린 황제를 지키다

중평 6년(189년) 영제(靈帝)가 붕어하자 14세의 황자 유변(劉辯)이 뒤를 이으니 이가 바로 한 소제(漢少帝)다. 나이가 어려서 모친인 하(何)황후가 황태후가 되어 수렴청정했다. 이후 장군 원외(袁隗)를 태부(太傅)로 삼고 대장군 하진(何進 하태후의 오빠)이 녹상서사(錄尚書事)를 겸했다. 하진은 원소와 몰래 모의해 환관들을 주살하려 했으나 태후가 동의하지 않았다. 원소 등은 사방에 흩어진 맹장과 호걸들을 소집해 군사를 이끌고 도성에 들어가 태후를 위협하자는 제안을 했다. 하진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조조는 웃으면서 “환관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해왔지만 주상이 지나치게 총애하고 믿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들의 죄를 징벌하려면 원흉만 죽이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외직의 병력을 불러들인단 말인가! 만약 일망타진하려 한다면 계획이 새어 나가기 마련이다. 내가 보기에 이 일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자치통감》권59)라고 여겼다. 그러면서 천하를 어지럽힐 자는 반드시 하진일 것이라며 단언했다.

하진이 동탁(董卓)을 도성으로 불러들였지만 동탁이 도착하기도 전에 하진은 이미 환관들에게 피살당했다. 동탁은 수도에 들어오자마자 소제를 폐위시켜 홍농왕(弘農王)으로 강등시키고 진류왕(陳留王) 유협(劉協)을 옹립하니 바로 한 헌제(獻帝)다. 도성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태후는 목메어 울고 여러 신하들은 비통함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감히 누구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나중에 동탁은 또 태후와 소제마저 살해했다.

중평 6년(189년) 11월 동탁이 상국(相國)이 되어 “황제를 배알할 때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고 조정에 들어갈 때 종종걸음을 치지 않았으며 칼을 차고 대전에 올라가 멋대로 조정을 좌우지했다.”

동탁은 조조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표문을 올려 효기교위(驍騎校尉)로 추천했다. 하지만 조조는 동탁이 필경 무너질 것임을 알고 이에 응하지 않았고 대신 이름을 바꿔 낙양을 벗어났다. 동탁이 병사를 파견해 추격하고 아울러 체포령을 내렸다. 조조가 중모현(中牟縣)에 이르렀을 때 의심을 받고 구금되었다. 하지만 현의 공조(功曹)가 속으로 조조를 알아보고 현령에게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풀려난 조조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쪽 진류(陳留, 연주에 속한다)에 이르렀을 때 진류의 효렴(孝廉) 첨자(韂茲, 위자라고도 한다)가 가재를 털어 조조를 도와 군사를 일으켰다. 동탁을 토벌할 의병을 일으킨 조조는 병사들을 모으는 깃발에 ‘충의(忠義)’라고 써서 5천의 인마(人馬)를 모았다. 이때 악진(樂進), 이전(李典), 하후돈(夏侯惇), 하후연(夏侯淵) 형제와 사촌동생 조홍(曹洪) 및 조인(曹仁) 등이 조조 진영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나중에 모두 조조 휘하의 대장이 된다.

초평(初平) 원년(190년) 정월 봄에 관동의 주군(州郡)들에서 조조에 호응해 앞을 다퉈 동탁 토벌을 위한 병력을 일으켰다. 후장군(後將軍) 원술(袁術), 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 예주 자사(豫州刺史) 공주(孔胄), 연주(兗州) 자사 유대(劉岱), 하내(河內) 태수 왕광(王匡), 발해(渤海) 태수 원소, 진류 태수 장막(張邈), 동군 태수 교모(橋瑁), 산양(山陽) 태수 원유(袁遺), 제북상(濟北相) 포신(鮑信) 등이었다. 이들은 발해 태수 원소를 맹주로 추대했다. 원소는 스스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을 칭했고 당시 관직이 없었던 조조는 행비무장군(行備武將軍)이 되었다. 여기서 행(行)이란 ‘임시 대리’를 뜻한다. 여러 호걸들의 마음이 모두 원소에게 쏠렸지만 유독 제북상 포신만은 “불세출의 지략으로 난을 평정할 인물은 바로 그대요. 진실로 그런 일을 해낼 만한 인물이 아니면 비록 강할지라도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법이오. 그대는 하늘이 내린 인물이오!”라며 조조를 높이 평가했다.

2월 동탁은 동맹군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 천자를 장안으로 이주시키고 자신은 낙양에 머물며 궁실을 불태웠다. 원소 등은 동탁의 병력이 강했기 때문에 두려워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조조는 “정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폭란(暴亂)을 토벌하고자 모였습니다. 대군이 이미 모였는데 여러분들은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한번 싸워서 천하를 평정할 수 있으니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건의했다.

하지만 여러 장수들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조조는 독자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했다. 형양(滎陽) 변수(汴水)에 이르러 동탁의 부하장수 서영(徐榮)과 교전했는데 전세가 불리했다. 조조도 날아오는 화살에 맞았고 타고 있던 말마저 중상을 입었다. 긴박한 상황에서 조홍이 달려와 자신의 말을 조조에게 주려하자 조조가 사양했다. 이에 조홍은 “세상에 조홍은 없어도 괜찮지만 군은 없어서는 안 됩니다(天下可無洪,不可無君).”라고 말했다.

조조가 산조(酸棗)에 돌아와 보니 동맹군 10만여 명이 날마다 술자리를 열면서 진격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조조는 다시 계책을 내놓았다. “여러분 내 계획을 들어보시오. 발해 태수 원소는 하내의 군사들을 이끌고 맹진으로 진격하고 산조의 여러 장수들은 성고(成皋)를 지키면서 오창(敖倉)을 점거해 환원(轘轅)과 태곡(太穀)으로 통하는 길을 봉쇄해 요충지를 전부 장악합니다. 또 원술장군은 남양의 군대를 이끌고 단(丹)현과 석(析)현에 주둔하다 무관(武關)으로 들어가 삼보(三輔, 도성 인근 지역)를 놀라게 합니다. 각 군사들이 성벽을 높이 하고 적과 싸우지 않으면서 의병(疑兵)을 내세워 역적을 토벌하는 형세를 세상에 보여준다면 천하는 금세 평정될 것입니다. 허나 지금 정의의 이름으로 군사를 일으키고도 주저하며 진격하지 않는다면 천하의 바람을 저버리는 것이니 나와 여러분이 부끄럽기 짝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은 동탁에 맞서 나서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이익 때문에 내분이 발생했다. 원소는 한복을 위협해 기주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기주목이 되었다.

원소와 한복은 또 북방 유주목으로 있던 유우(劉虞)를 황제로 세우려했다. 원소는 사사로이 황제의 옥새를 새겼고 한번은 앉은 자리에서 조조에게 옥새를 자랑하기까지 했다. 이때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 백성들의 삶이 고달팠다. 조조는 《호리행(蒿里行)》에서 이 시기의 어지러운 사회현상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관동에 의로운 이들 있어간악한 무리 토벌하려 군대를 일으켰네처음 맹진에 모인 것은마음이 함양(진나라 수도)에 있었네여러 군대 모였으나 제각각이라머뭇대며 기러기 날 듯 나서지 않네세력과 이익이 다툼을 부르니기어이 서로 치고 받는구나회남의 동생(원술)은 황제를 자칭하고북방(원소)에선 옥새를 만드네갑옷에선 이가 들끓고백성들은 죽어나가네백골이 들판에 나뒹굴고천리 간에 닭 울음소리 들리지 않네백성은 백에 하나 살아남았으니생각하면 장이 끊어지누나

關東有義士(관동유의사)興兵討群凶(흥병토군흉)初期會盟津(초기회맹진)乃心在咸陽(내심재함양)軍合力不齊(군합력부제)躊躇而雁行(주저이안행)勢利使人爭(세리사인쟁)嗣還自相戕(사환자상장)淮南弟稱號(회남제칭호)刻璽於北方(각새어북방)鎧甲生蟣虱(개갑생기슬)百姓以死亡(백성이사망)白骨露於野(백골노어야)千里無雞鳴(천리무계명)生民百遺一(생민백유일)念之斷人腸(염지단인장)

절절하면서도 충의로 가득한 이 시에서 조조는 천하 백성들의 고통을 가슴에 새기고 여러 제후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투기만 할 뿐 대의를 내팽개치는 모습에 슬퍼한다. 비록 여러 제후들과 부합하지 않고 고립되었을 때조차 조조는 여전히 어린 헌제를 지키려는 충성심을 지니고 있었다.

조조는 “동탁의 죄는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대군을 합해 의병을 일으키자 모두들 호응한 것은 우리가 정의롭게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린 황제는 미약해서 간신에게 제압당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과거 폐위당한 창읍왕(昌邑王)처럼 무도하여 나라를 망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루아침에 천자를 바꾼다면 천하의 그 누가 편안하겠습니까? 그대들은 북쪽을 향하십시오. 나는 서쪽을 향하겠습니다.(역주: 당신들이 새로 황제를 세울지라도 자신은 헌제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조조가 여러 차례 간언했지만 제후 군사들이 앉아서 좋은 기회를 놓치자 실망만 커져갔다. 눈앞에서는 “백성들은 죽어나가고 살아남은 백성은 백에 하나”니 생각할수록 조조는 애간장이 탔다. 제후들이 단지 자신의 사리사욕만 생각한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조조는 남에게 기대할 수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은 힘이 약해 적을 이길 수 없었고 하머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슬펐겠는가! 유우를 황제로 세우려는 다른 제후들과 달리 혼자서라도 서쪽으로 나아갈 결심을 굳힌 조조는 황제를 보호해 나라를 일으키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 혼자서라도 나아가기로 결정한다.

이후 사도 왕윤(王允)과 사예교위 황완(黃琬)이 몰래 동탁을 제거할 모의를 꾸미고 중랑장(中郎將) 여포(呂布)를 움직여 안에서 호응하게 했다. 4월 여름 헌제가 미앙전에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 조회를 했다. 동탁이 조복을 입고 수레를 타고 들어올 때 여포 등이 칙명을 받들어 살해했다. 그러자 백성들이 길에서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3. 도교를 도와 무리를 얻으니 운이 흥성해지다

일찍이 동한(東漢) 건초(建初) 4년(79년) 장제(章帝)가 백호관(白虎觀)에서 명유(名儒)와 여러 왕들을 소집해 유가의 여러 학파를 통일해 《백호통의(白虎通義)》를 완성한 이래 유교는 날로 흥성해졌다.

동한 말년에 이르면 한 왕조는 이미 끝이 가까워졌지만 한 무제가 세운 내도외유(內道外儒)의 전통문화 체계는 이미 부패한 유학에 의해 거세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인도에서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모두 중토신주(中土神州)에서 풀어내고 인연을 맺어 5천년 신전문화의 역사 속에서 휘황함을 남겨놓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이때 도가(道家)수련 역시 단독으로 전수하던 독수(獨修)방식을 바꿔 도교(道敎)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널리 전파하기에 이로웠기 때문이다. 천상(天象)의 배경은 또한 이후 수백년에 걸친 불(佛)과 도(道)의 상호 다툼을 야기했다.

진시황과 한 무제는 모두 전력을 다해 도가양생(道家養生)과 수련해서 신선이 되는 도를 널리 추진하고자 했고 방사(方士)와 방술(方術)은 선진(先秦)시기부터 동한까지 전해져 초기 도교의 일부가 되었다.

도교가 흥기할 때 천사도(天師道), 태평도(太平道), 방술(方術) 등 세 부분이 있었는데 “한나라의 운수가 다했으니 마땅히 황가가 일어난다(漢行氣盡,黃家當立)”는 것이 널리 전해져 천명(天命)을 대신했다.

천사도는 오두미도(五斗米道)라고도 부르는데 한 순제(順帝) 연간에 장도릉(張道陵)이 창건했다. 장도릉은 자(字)가 보한(輔漢)으로 서주(徐州) 패국(沛國) 풍(豊)사람이다. 태학(太學) 서생으로 오경(五經)에 널리 통달했고 경사(經史)에도 정통했다. 유후(留侯) 장량의 후예다. 한 화제(和帝) 때 금과 비단 및 좋은 수레로 예물을 보내 그를 천부(天傅)에 제수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나중에 제자들과 촉(蜀) 땅에 들어가 곡명산(鵠鳴山)에서 도를 닦았다. 널리 제자를 받아들였는데 처음 도에 입문하는 사람에게 닷 되의 쌀을 바치게 했으며 부수(符水, 부적을 태운 물)로 병을 치료했다. 또 문도들에게 노자의 《도덕경》을 외우게 했다. 그가 사망한 후 아들인 장형(張衡)이 도를 행했다. 장형이 사망한 후에는 아들 장로(張魯)가 다시 도를 행했다.

한편 기주(冀州) 거록(巨鹿)의 장각(張角)은 영제 때 태평도를 창립했다. 태평도는 ‘황로의 도(黃老道)’를 받들었는데 ‘중앙황로(中央黃老)’ 또는 ‘중황태일(中黃太一)’이라고도 불렀다. “선도(善道)로 천하를 교화해” 신도가 36만에 달했다. 여기서 말하는 황로(黃老)는 황제(黃帝)와 노자(老子)가 아니라 도가 신(神)의 호칭이다. 태평도는 ‘중황태일’을 지존천신(至尊天神)으로 모셨고 여러 신들에 대한 음사(淫祀)에 반대했다. 장각은 대현양사(大賢良師)라 칭하며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누런 하늘이 선다. 갑자년에 천하가 태평해지리라(蒼天已死,黃天當立,歲在甲子,天下太平)”라고 주장했다.

중평 원년(184년) 장각이 태평도를 일으켜 누런 두건을 표식으로 삼고 황건군(黃巾軍)이라 불렸다.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 동생 장보(張寶)는 지공장군(地公將軍), 장량(張梁)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을 각기 칭하며 8주에서 호응하니 그 세력이 상당히 컸다. 한 영제는 “천하의 정예병력을 선발해” 토벌하게 했다.

이때 청주(靑州)의 백만 황건군이 연주(兗州)로 들어가자 연주 자사 유대(劉岱)가 황건군과 맞서다 피살당했다. 진궁(陳宮)이 조조에게 스스로 연주목을 차지하라고 제안하자 제북상(濟北相) 포신(鮑信)이 조조를 연주로 맞이했다. 조조가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황건군을 공격했다. 조조는 곳곳을 순시하며 병사들을 격려하고 상벌을 명확히 했다. 또 기병(奇兵)을 활용해 밤낮으로 전투를 벌였다. 그러면서도 여러 차례 투항할 길을 열어주었고 싸우면서 또 포로로 잡자 황건군이 마침내 물러났다. 192년 12월 조조가 만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황건군을 제북(濟北)까지 추격하자 궁지에 몰린 황건군이 항복했다. 조조는 투항한 황건군 병졸 30여 만명과 이들을 따르던 남녀 100여 만 명을 거두고 이중 정예만을 거두어 청주병(青州兵)을 조직했다.

청주 황건군은 작전할 때 아주 용맹하고 “병사들이 모두 날쌔고 용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겨우 만여 명의 병력을 가진 조조가 어떻게 삼십만이 넘는 황건군을 제압할 수 있었을까? 태평도의 황건군은 ‘도(道)’를 인정했고 신앙이 같았던 것이 이들이 조조에게 투항한 주요원인의 하나다. 황건군이 조조에게 보낸 서찰에서 “지난날 제남에서 신단(神壇)을 파괴했습니다. 그 도(道)는 곧 중황태을(中黃太乙)과 같으니 마치 알 듯하면서도 지금은 더욱 곤혹스럽습니다. 한나라는 운세가 이미 다했으니 황가(黃家)가 마땅히 일어서야 합니다. 하늘의 대운(大運)은 그대의 재능과 힘으로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청주병이 한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조조에게 투항한 것은 오직 ‘동도(同道)’인 조조를 위해 힘쓴 것이다. 나중에 조조가 세상을 떠나자 “청주군은 북을 두드리며 떠났고” “태조(조조)가 붕어하자 장패(臧霸)가 거느리던 부대와 청주병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이라 여겨 모두 북을 울리며 떠나갔다.”(《삼국지‧위서》)는 기록이 있다. 즉 청주군은 오직 조조의 명령만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조조는 투항한 태평도 황건군을 받아들여 자신의 군대로 삼았다. 나중에는 또 장로(張魯)의 오두미도(천사도)도 받아들였고 한중 백성들을 이주시켜 장안과 삼보(三輔)를 충실하게 했다. 이렇게 되자 천사도가 북쪽으로 옮겨가 북방에서 널리 전해졌고 나중에는 또 강남까지 전파되었다. 조조가 위왕(魏王)이 된 후 전국 각지의 방사(方士)들을 업성으로 초대했는데 “세상에 방사가 있기만 하면 우리 왕(조조)께서 모두 초대하셨다.”(조식 《변도론(辨道論)》)고 할 정도로 업성은 당시 방술(方術)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위나라는 위아래가 모두 도를 배우는 것이 풍속이 되었고 도교의 흥성과 발전을 촉진했다.

오두미도의 장로는 “차라리 위공(魏公)의 노예가 되는 게 낫다”며 ‘황의당왕(黃衣當王, 누런 옷이 마땅히 왕이 되어야 한다. 누런 옷은 도교를 상징한다)’의 기치를 들고 조조 진영에 귀부했고 각지의 방사들도 여러 가지 형식으로 조조의 문앞에 결집했다. 조조에 대한 도교(道敎)측의 인정을 세인들에게 분명히 알려준 것은 ‘황덕이 조조에게 있다’(黃德在曹)는 말이다.

초평4년(193년) 봄 조조군이 견성(鄄城)에 주둔해 있다가 원술과 싸워 크게 이겼다. 원술이 봉구(封丘)로 퇴각하자 조조가 추격해서 포위했다. 원술은 봉구에서 다시 양읍(襄邑)으로 달아났다. 조조가 원술을 바짝 뒤쫓자 결국 영릉(寧陵)을 거쳐 구강(九江)까지 멀리 달아났다. 승리한 조조는 늦여름에 군사를 이끌고 정도(定陶)로 개선했다.

이해 연초 하비(下邳)에서 궐선(闕宣)이란 자가 수천 명의 무리를 모으고 천자를 칭했다.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이 궐선과 합세해 군사를 일으켜 태산군의 화(華)현과 비(費)현을 빼앗고 임성(任城)을 공략했다. 이해 가을 조조가 도겸에 대한 정벌에 나서 10여개 성을 빼앗자 도겸은 본성인 팽성을 버리고 달아나 담성(郯城)을 지키며 감히 나오지 못했다.

흥평(興平) 2년(195년) 여름 여포의 장수 설란(薛蘭)과 이봉(李封)이 거야(巨野)에 주둔하자 조조가 공격했다. 여포가 구원에 나섰으나 패하고 달아나자 조조가 설란 등을 벴다. 여포가 동민(東緡, 지금의 산동성 동명)에서 진궁(陳宮)과 함께 다시 1만여 명을 모아 쳐들어오자 조조는 병사들에게 모두 보리를 수확하는 것처럼 꾸미게 했다. 지키는 병력이 천명에도 미치지 못하고 둔영이 견고하지 않게 했으며 부녀자들을 시켜 성을 지키게 했다. 둔영 서쪽에 큰 제방이 있고 남쪽에는 숲이 울창했다. 여포는 매복이 있을까 우려해 “조조는 속임수에 능하니 복병이 있을 만한 곳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여포는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주둔했다.

이튿날 다시 여포가 오자 조조는 군사의 절반과 기병을 제방 안쪽에 매복시키고 나머지 절반은 제방 밖에 나와 있게 했다. 여포가 진격해오자 조조는 경무장한 병력을 보내 도발했다. 쌍방간에 교전이 벌어지자 숨어 있던 복병들이 일제히 제방 위로 나와 보병과 기병이 함께 공격해 여포의 군대를 대파했다. 북과 수레를 빼앗고 둔영까지 추격한 다음에야 되돌아왔다. 여포가 밤을 틈타 달아나자 조조는 정도를 탈환하고 군대를 나눠 인근 여러 고을을 평정했다. 조조는 또 빼앗겼던 여러 성을 회복하고 거야(钜野)에서 여포를 격파했다. 여포는 동쪽으로 유비에게 달아났고 장막은 동생 장초(張超)에게 가족들을 옹구(雍丘)로 보내 지키게 했다.

가을 8월 조조가 옹구를 수개월간 포위 공격했다. 겨울 10월에 천자가 조조를 연주목(兗州牧)에 임명했다. 12월 조조가 옹구를 공격해 차지하고 연주를 평정하자 마침내 동쪽으로 진(陣)땅 공략에 나섰다.

조조가 널리 젊고 뛰어난 인재들을 찾아 초빙하고 문무(文武)를 병용하자 인재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조조도 드디어 한 지방을 차지하고 중원의 각축전에 뛰어들 수 있게 되었다. 천하에 조조의 이름이 널리 떨쳤고 운이 도래해 흥성해졌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4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