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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조조(2): 예언에 따라 영명한 임금이 나오다

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1장 영명한 임금이 나오다

기원전 221년 천고일제(千古一帝) 진시황은 육국을 없애 중원을 통일한 후 이번 차례 중화문명에서 최초의 통일(大一統) 정통왕조인 진(秦)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겨우 15년 만에 진 왕조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렸다. 풍운이 다시 일어 전쟁의 불길이 치솟더니 새로운 조대의 천국중생들이 신주대지(神州大地)에 와서 새로운 문화를 풀어냈다. 초한(楚漢)이 서로 다투니 군웅이 일어났고 최후에 병성(兵聖, 용병의 성인) 한신이 용맹을 자랑하던 무적의 서초패왕 항우를 싸워 이겨 역사의 막을 내리게 했다. 한신은 한(漢)나라 4백년 천하의 기초를 다졌다. 이때 패배한 항우 부족은 지금 한국에 해당하는 한반도로 옮겨갔다.

《후한서‧동이열전‧진한》과 《삼국지》에는 “진한(辰韓)은 그 언어가 마한(馬韓)과 다르고 모습도 진(秦)나라 사람을 닮았으니 연나라나 제나라의 명물(名物)이 아니다.”라고 했다. 즉 진한의 한인(韓人)들은 진인(秦人)임에도 발해 연안의 연나라나 제나라에서 온 사람이 아닌데 그들이 사용하는 어휘가 이들 지역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근대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민족(韓民族)은 중국 동남방 연해인 절강성(예전 초나라) 일대 사람들과 가장 유사하다고 한다. 지금도 한국의 여러 도시는 한강(漢江)에 위치하는데 중국 초나라 때 유사한 도시들이 한강(漢江)에 분포하던 것과 아주 흡사하다. 예를 들어, 한국에도 초나라처럼 단양(丹陽), 양양(襄陽), 한양(漢陽, 지금의 서울), 한강(漢江)과 동정호(洞庭湖)가 있다. 또한 한국의 어머니 강인 한강(漢江) 상류에 위치한 산의 이름이 초나라의 어머니 강인 한강(漢江) 상류에 위치한 태백산(太白山)과 서로 같다.

한(漢) 왕조의 주인이 된 유방과 여후는 계획적으로 한신을 살해하고 미앙궁(未央宮)을 영웅의 피로 물들여 끝내 천고에 원통함을 남겼다! 진시황의 위엄을 이은 한무제(漢武帝)는 영토를 확장하고 남북으로 정벌에 나서 대한(大漢)의 기풍을 떨치고 서역을 석권했다.

1. 예언에 따라 영명한 임금이 나와 세풍을 바로잡다

한 무제 원봉(元封) 5년(기원전 106년) 무제가 신하들과 잔치를 벌이며 놀다가 《추풍사(秋風辭)》를 짓고는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종실자손 중 누가 이에 합당할까? 육칠 42명의 황제를 거친 후 한나라를 대신하는 것은 마땅히 도고(當塗高)일 것이다.”(《태평어람》권88)라고 말했다.

《춘추참(春秋讖)》에서도 “한나라를 대신하는 자는 마땅히 도고다(代漢者,當塗高也)”라고 했다. 동한 말엽에 이르러 파서낭중(巴西閬中)의 명사 주서(周舒)는 도참을 깊이 연구한 후 “《춘추참》에서 말한 한나라를 대신하는 것은 마땅히 도고다에서 당도고(當塗高)자는 위(魏)를 말한다.”고 했다.

건안 18년(213년) 조조는 위공(魏公)에 봉해졌고 후에 또 위왕(魏王)으로 승급했다.

건안 25년(220년) 위무제가 서거하자 태자 조비(曹丕)가 뒤를 이어 위왕이 되었고 얼마 후 한나라에 선양받아 위나라를 선양을 세웠으니 그러므로 이 해석이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이보다 앞서 한나라 환제(桓帝) 때 황성(黃星)이 옛날 초나라와 송나라 땅 사이에서 나타났다. 요동의 은규(殷馗)는 “오십년 후 진인(眞人)이 초(譙)와 패(沛) 사이에서 나타날 것이며 그 예봉은 막을 수 없다.”[《송서(宋書)》권27‧지(志)제17]고 했다. 50년 후 과연 조조가 원소를 깨뜨리자 천하에 적수가 없었다.

한 영제(靈帝) 희평(熹平) 5년(176년) 황룡(黃龍)이 초현에 나타나자 광록대부 교현(橋玄)이 태사령 단양(單颺)에게 물었다. “이는 어떤 조짐입니까?” 단양은 “그 나라에서 마땅히 왕이 흥할 것입니다. 50년이 못되어 용이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하늘의 일에는 늘 상(象)이 있으니 이것이 그 징험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위군(魏郡) 사람 은등(殷登)이 이 말을 몰래 기록해놓았다. 그러다 건안 25년(220년) 봄 황룡이 다시 초현에 나타났다.

조식(曹植, 조조의 아들)은 《용현표(龍見表)》에서 “신이 들으니 봉황이 업남(鄴南)에 다시 나타나고 황룡이 청천(淸泉)에 두 번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는 성스런 덕과 지극한 다스림을 축하하는 상서로운 조짐입니다. 장차 봉황이 숲에 깃들고 용이 연못에 있어 백성들이 아침 저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조자건집(曹子建集)》)라고 했다. 이 해 겨울 위나라가 선양을 받았다.

건안(建安) 초년(196년) 시중이자 태사령인 왕립(王立)이 천상을 관측하고 기뻐하며 말했다. “예전에 태백(太白, 금성)이 천관(天關)을 지키며 형혹(熒惑, 화성)과 만났습니다. 금(金), 화(火)가 서로 만났으니 이는 혁명(革命)의 상(象)입니다. 한나라 천자의 자리는 끝났고 반드시 진(晉), 위(魏)에서 흥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왕립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황제에게 간했다.

“천명(天命)에는 오고 감이 있고 오행(五行)이 늘 성하는 것은 아니니 화(火)를 대신하는 것은 토(土)입니다. 한(漢)을 이을 자는 위(魏)이고 능히 천하를 평안케 할 자는 조(曹)씨입니다.”(《삼국지》 배송지주)

정관(貞觀) 19년(645년) 2월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원정 도중 안양(安陽)을 지나며 직접 위 무제를 기리는 문장을 지었다. “위 무제 조조는 뛰어난 무용으로 혼란에 빠진 나라의 기둥이 되었고, 천하를 바로잡은 공로는 지난날보다 훨씬 컸다.(帝以雄武之姿,當艱難之運,棟梁之住,同乎曩時,匡正之功,異於往代)” “얼마 후 삼국이 나뉘고 황성(黃星)이 응함이 오래 드러나 흥성할 시간을 드러냈으니 진인(眞人, 제왕)의 운명은 이에 속한다. 이는 하늘의 뜻이지 어찌 사람의 일이겠는가!(既而三分肇慶,之應久彰.蔔主啟期,真人之運斯屬.其天意也,豈人事乎!)”(《전당문(全唐文)》권10 《당태종문황제제위태조무황제문(唐太宗文皇帝祭魏太祖武皇帝文)》)

당시 한나라는 3백여 년을 거치면서 마땅히 후대에 길이 남겨주어야 할 ‘내도외유(內道外儒, 안으로는 도가 겉으로는 유가)’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문화 본질을 다졌고 중화의 문화를 역외에 전파해 창세주가 배치한 사명을 완성하고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려 했다. 이때는 이미 강노(強弩)의 마지막으로 성대함이 극에 달한 후 쇠퇴하여 황제의 기강이 무너져 환관이 우환이 되었으며 권신들이 난을 일으켜 천재인화(天災人禍)로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 한 왕조의 기수가 이미 다한 것이다.

하늘의 뜻이 이에 이르자 마침내 새로운 세대의 영웅이 인간 세상에 태어나 후속의 대업을 성취했다.

조조(曹操)는 자가 맹덕(孟德)으로 패국(沛國) 초현(譙縣, 지금의 안휘성 박현) 사람이다. 동한 말기인 155년 유명한 환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조등(曹騰)은 젊을 때 황문시랑(黃門侍郎)을 지냈다. 한 순제(順帝) 때 대장추(大長秋, 황후 관속의 우두머리로 환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가 되었다. 순제가 붕어하고 뒤를 이은 충제(沖帝)와 질제(質帝)는 모두 재위기간 1년을 채우지 못하자 조등은 외척 양기(梁冀)와 상의해 환제(桓帝) 유지(劉志)를 옹립했다. 나중에 이 공으로 비정후(費亭侯)에 봉해졌다.

조등의 아들 조숭(曹嵩)은 사예교위(司隸校尉)를 지냈고 이후 대사농, 대홍려를 거쳐 나중에 관직이 삼공(三公)의 하나인 태위(太尉)에까지 이르렀다.

조조는 바로 이 조숭의 맏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아주 기민하고 의협심을 발휘하길 좋아했으며 기마술과 활쏘기에도 능했다. 원소(袁紹), 장막(張邈) 등을 벗으로 삼아 어울렸다. 청소년기에 당시 권력을 쥐고 악을 행하던 간사한 인물을 암살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중에 널리 다양한 책을 읽었는데 특히 병법을 좋아해 손무(孫武)의 13편(즉 손자병법)에 주를 달아 ‘고학(古學)에 능통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조조가 열두 살 때 장사(長史) 하옹(何顒)이 그를 보고는 “한나라가 장차 망하면 천하를 편안히 할 자는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교현(橋玄)은 먼 장래를 내다보고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조조가 십오 세 때 태위 교현은 그에게 “지금 천하가 어지러워지려 하니 명세지재(命世之才, 천명을 받은 뛰어난 인물)가 아니면 이 사회를 구할 수 없을 것이며 천하를 편안하게 할 사람은 아마 자네뿐이네.”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중에 자신의 처자와 가족들을 조조에게 부탁했다. 이에 조조의 성망은 날로 커졌다.

또 사예교위 이응지(李膺之)의 아들이자 동평상(東平相) 이찬(李瓚)은 임종 무렵 “장차 혼란한 시기가 올 텐데 천하 영웅은 조조를 넘지 못할 것이다.”라고 후인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일찍이 조조를 동군태수(東郡太守)로 발탁했다. 하지만 당시 권신들이 조정을 농단하는 상황에서 조조는 원칙을 버리고 남과 타협할 수 없었고 늘 권신들의 비위를 건드렸다. 이에 집안에 재앙이 미칠까 우려해 더 이상 태수의 직책을 잇지 못했다. 나중에 조조를 의랑(議郎)에 제수했으나 늘 질병을 핑계로 대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 돌아온 조조는 성 밖에 집을 짓고 봄여름에는 독서에 열중하고 가을 겨울에는 사냥을 했다. 마치 용이 파도 속에 잠복한 것 같았으나 그렇다고 그의 뜻을 고친 것은 아니었다.

이 기간에 조조는 유명한 두 편의 시를 지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직접 보여주었다. 우선 《도관산(度關山)》에선 “사람이 귀함”을 직접 언급하며 “임금을 세워 백성을 다스리고 법도와 법칙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또 고대 성군 요(堯), 순(舜), 우(禹)를 본받아 “백성을 몰아 임금이 되어 백성을 부리고 세금을 부과하는데 힘써선” 안 된다고 했다. 또 형벌과 세금을 간단히 하고 절약을 귀하게 여길 것을 제창했다.

《도관산(度關山)》

하늘과 땅 사이에 귀한 것은 사람이니임금을 세워 백성 다스림에 법도와 법칙을 세웠다네수레 자국 말 발자국이 사방 멀리 다다라못난 관리 내치고 바른 관리 등용하면 백성이 번성하네옛날 어진 성인은 온 나라를 다스렸으니다섯 가지 작위 세우고 정전제와 형법 마련했네노예문서 불태울망정 다 같이 사면하진 않았으니고요와 보후(甫侯)처럼 공정하면 어찌 자리를 잃겠는가?슬프구나, 후세에는 제도와 법을 바꿨으니백성 부려 임금만 위하니 백성들은 부역에 시달리네순임금이 옻칠한 식기를 쓰자 열 나라가 배반했으니거친 참나무 서까래에 거처한 요임금만 못하다네세상이 백이를 찬탄함은 풍속을 바로 잡으려는 것이니사치는 큰 죄악이며 검소함이 공통된 덕이네허유처럼 사양하면 어찌 송사가 있겠는가?겸애하고 평등하면 소원한 이도 가까워지리라

《度關山》

天地間,人爲貴(천지간 인위귀)立君牧民,爲之軌則(입군목민 위지궤칙)車轍馬跡,經緯四極(차철마적 경위사극)黜陟幽明,黎庶繁息(출척유명 여서번식)於鑠賢聖,總統邦域(어삭현성 총통방역)封建五爵,井田刑獄(봉건오작 정전형옥)有燔丹書,無普赦贖(유번단서 무보사속)皋陶甫侯,何有失職(고도보후 하유실직)

嗟哉後世,改制易律(차재후세 개제역률)勞民爲君,役賦其力(노민위군 역부기력)舜漆食器,畔者十國(순칠식기 반자십국)不及唐堯,采椽不斫(불급당요 채연부작)世歎伯夷,欲以厲俗(세탄백이 욕이려속)侈惡之大,儉爲共德(치악지대 검위공덕)許由推讓,豈有訟曲(허유추양 기유송곡)兼愛尚同,疏者爲戚(겸애상동 소자위척)

《대주(對酒)》

술 앞에 두고 노래하세태평할 때는 관리가 문에 와서 불러대지 않는다네임금은 어질고 밝으며 재상과 대신들 모두 충성되고 훌륭하네모두 예를 알고 양보하니 백성들은 다툼이 없네3년 농사에 9년 치를 저장하고 있으니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차고노인은 짐을 지지 않네은혜로운 비가 내려 온갖 곡식 풍년이고좋은 말 끌어다가 분뇨를 비료로 쓴다네공후백자남 귀족들 모두 백성을 사랑해못난 이 내쫓고 현명한 이 승진시키니부형이 자식 키우듯 하네예법을 어기면 경중에 따라 벌하니길에는 남의 물건 줍는 이 없다네감옥은 텅 비어 동지에도 판결할 범죄가 없네모두가 천수를 누리니 은택이 널리 초목과 곤충까지 미친다네

對酒歌(대주가)

太平時,吏不呼門(태평시 이불호문)王者賢且明,宰相股肱皆忠良(왕자현차명 재상고굉개충량)咸禮讓,民無所爭訟(함예양 민무소쟁송)三年耕有九年儲,倉穀滿盈(삼년경유구년저 창곡만영)班白不負戴(반백불부재)雨澤如此,百穀用成(우택여차 백곡용성)卻走馬,以糞其土田(각주마 이분기토전)爵公侯伯子男,咸愛其民(공후백자남 함애기민)以黜陟幽明(이출척유명)子養有若父與兄(자양유약부여형)犯禮法,輕重隨其刑(범예법 경중수기형)路無拾遺之私(노무습유지사)囹圄空虛,冬節不斷(영어공허 동절부단)人耄耋,皆得以壽終(인모질 개득이수종)恩澤廣及草木昆蟲(은택광급초목곤충)

《대주(對酒)》는 창작시기가 《도관산》과 가깝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임금이 현명하고 신하가 충성스러우며 백성들이 예의로 양보할 줄 알면 기후가 고르게 되어 풍년이 들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줍는 사람이 없고 감옥이 텅 빌 것이며 노인도 제대로 봉양 받고 곤충에게까지 은택이 미친다고 노래했다.

조조는 난세에 홀로 큰 대임을 맡아 세상 풍속을 바로잡았다.

희평(熹平) 3년(177년) 조조 나이 스물에 효렴으로 천거를 받아 수도 낙양(洛陽)의 북부도위(北部尉)에 임명되었다. 조조는 부임할 때 오색 몽둥이를 깎아 현문(縣門) 앞에 좌우로 10여 개 씩 걸어두고 금지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 막론하고 몽둥이로 때려죽인다고 성명했다. 당시 환관 건석(蹇碩)이 영제(靈帝)의 총애를 누리고 있었는데 그 숙부 되는 자가 금지령을 어기고 밤에 함부로 다녔다. 조조는 부하들에게 즉각 때려죽이게 했다. 당시 이 사건은 낙양을 진동시켰지만 누구도 어쩌지 못했고 조조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높아졌다.

조조는 또 다스림이 청렴하고 공정했다. 중평(中平) 2년(185년) 조조는 제남국상(濟南國相)에 임명되었다. 제남국(지금의 산동성 제남 일대)은 당시 10여 개의 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장이나 현리들이 권문세족에 의지해 뇌물을 받아먹고 법을 어겼지만 역대 국상들은 이를 모두 불문에 부쳤다. 조조는 부임하자마자 단호하고 신속하게 법을 집행했다. 즉시 상소를 올려 열에 여덟을 파면시키자 제남이 진동했고 탐관오리들이 앞을 다퉈 달아나거나 숨었다.

정(正)과 사(邪)는 분명하다. 제남에서는 음사(淫祀)가 아주 성행해서 한나라 초기 제후 유장(劉章)을 모시는 사당만 6백여 개에 달했다. 사당 안에는 온갖 음란하고 난잡한 것들이 들어와 사악한 영체(靈體)가 진흙으로 만든 우상을 점거하고 세상을 어지럽혔다. 조조가 일러 진흙으로 만든 우상과 사당을 부수고 관민들이 멋대로 정도(正道)에 부합하지 않는 제사를 지내는 것을 두절시키고 저령(低靈)과 난잡한 귀신들을 제거했다. 정교(政敎)가 크게 행해지자 군(郡)전체가 청정해졌다. 젊은 조조는 처음 관직에 나아가 과감하고 단호하게 왕자(王者)가 세상을 다스리는 풍모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나중에 한나라의 승상이 된 조조는 음사를 널리 제거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