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2. 끝내 강적을 이기다
“부친은 본래 관념이 세계적인 분이라 일본에 대해서도 원한을 덕으로 갚고자 하셨을 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동맹국들에게도 독일, 이탈리아에 대해 원한을 덕으로 갚자고 요구하셨다. 목적은 바로 유라시아 대륙 북부에서 공산세력을 차단해 공산세력이 태평양까지 이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다.”(《장위국 구술 자서전(蔣緯國口述自傳)》)
원대한 식견
항전 초기 중국군은 외로이 고군분투했다. 당시 미국은 중립을 지키면서 중일(中日) 어느 쪽에도 무기를 제공하지 않았다. 소련은 1937년 8월 ‘중소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한 후 한동안 중국에 공군 비행기와 조종사를 지원해주었고 무기도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1941년 일본과 ‘소-일 중립조약’을 체결한 후부터 지원을 중단했으며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해 등 뒤에서 일격을 가했다. 영국은 1940년 한때 일본의 압력을 받아 버마로드를 폐쇄해 중국의 유일한 대외무역통로를 차단해버렸다.
하지만 장개석은 중국의 항일은 고립된 게 아니며 영국 미국 소련 세 나라가 조만간 전쟁에 더 깊이 말려들 것으로 보고 유럽과 미국 등 외국의 동향에 대해 유심히 관찰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략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 대전이 발생했다. 장개석은 일기에서 “우리는 2년간 항전하면서 국제변화가 생기길 기대해왔는데 이제 그때가 되었다. 국제정세가 비록 험악하긴 하지만 만약 내가 잘 선택해 신중히 운용한다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여기서부터 부흥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당사개요(黨史概要)》 제3책)라고 적었다.
1940년 9월 16일 일기에서는 “독일과 소련의 균열이 점점 심해지면서 미국과 소련이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고 적었다.
1941년 연초 장개석은 일기에서 국제형세에 대해 9가지 장기적 ‘기대’를 제출했는데 그중 두 가지는 “소련이 독일과 전쟁하고 미국이 일본과 개전한다”는 것이다.
5월 10일 장개석은 미국 대사에게 일본이 잠시 군사행동을 중단한 것에 대해 “나의 판단과 최근 얻은 확실한 정보에 따르면 만약 한 달 반 안(즉 6월말)에 독일에 대한 미국의 형세가 악화되지 않고 현상황을 유지할 수 있다면 독일은 분명 한달 반 안에 러시아 침공을 시작할 것이다.”라고 알려주었다.
6월 16일 장개석은 중공 두목 주은래(周恩來)를 불러 소련 측에 “독일군이 6월 21일 소련을 침공할 것”을 알리게 했다. 실제로 6월 22일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했으니 장개석의 예측과는 불과 하루 차이였다. 이 정보는 소련에게 약 1주일 간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
(《대소 전쟁에 대한 장개석의 예측과 대응(蔣介石對蘇德戰爭的預測及因應》)
이후 벌어진 사태의 전개는 확실히 장개석의 영명함을 입증했다. 독소전쟁이 발발한 후 장개석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일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표명해 무기와 연료 공급을 중단하라고 설득했다. 일본군은 졸지에 식량과 연료공급이 끊긴 청전벽력과 같은 날벼락에 절망한 나머지 무리수를 두었다. 12월 1일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주재한 어전(御前)회의에서는 “미국은 이미 철두철미하게 장개석의 대변인이 되었으며” “청일전쟁, 러일전쟁 및 중국사변이래 모든 성과가 장차 물거품이 될 수 있다”고 인정했다.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미국, 영국, 네덜란드에 대한 개전을 결정했다.
12월 7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장개석은 일기에서 “항전 정략(政略)의 성과는 일본이 극한에 도달했으니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결국 반대로 돌아가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12월 9일 중국은 미국 영국 등 연합국과 동맹을 맺는 동시에 일본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독일, 이탈리아, 일본 추축국에 맞서 강력한 보루를 형성했다.
4년 전인 1937년 상해가 함락하고 남경이 위급해졌을 때 장개석은 중경으로 천도하기 전에 이렇게 예언한 바 있다. “지금 침략국들의 반대편에서는 분명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의 연합진영이 결성될 것이다. 국제형세는 이미 우리의 용맹한 항전으로부터 변했으며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노력한다면 반드시 각국이 극동의 일본을 적대시하고 일본을 포위하는 목적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일본을 확실하게 절대적으로 고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목적은 그리 멀지 않으며 아주 쉽게 달성될 것이다.”(《수도 이전과 항전의 앞길(國府遷渝與抗戰前途)》 1937년 11월 19일)
4년 후 그의 예언은 사실로 입증되었다.
1941년 래티모어가 루스벨트의 추천으로 중경에 와서 장개석의 정치고문으로 취임했다. 그는 장개석 부부와 1년 넘게 접촉했고 나중에 친공(親共)적인 관점 때문에 장개석과 사이가 멀어져 이임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회고록에서는 여전히 장개석에 대해 “진정한 애국자”로 “국가의식이 몹시 투철하고” 때로는 “루스벨트나 처칠보다 더 멀리 내다보는 안목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전구(戰區) 사령관
1942년 1월 1일 중국 미국 영국 소련 등 26개국이 워싱턴에 모여 침략에 반대하는 선언에 서명하면서 장개석을 연합국 ‘중국전구 최고사령관’으로 추천해 중국, 태국, 베트남 등의 지역에서 연합군 작전을 총지휘하게 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해 6월 1일 표지모델로 장개석의 사진을 싣고 간단한 설명을 더했다. “장 총사령관: 지극히 힘들고 어려운 5년을 지나왔지만 가장 곤란한 시기가 아직 남아 있다.”
1942년 2월 장개석은 부부동반으로 영국령 인도 총독의 초청을 받아 인도를 방문했다. 이것은 중국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해외를 방문한 일이었다. 인도는 원래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성웅(聖雄)인 간디가 영도하는 민족독립으로 종주국인 영국과 마찰을 겪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전투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추축국인 일본과 독일도 활발히 움직이며 인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남아시아에서 중요 전략으로 삼았다.
장개석의 이번 방문 목적은 바로 영국과 인도가 서로 타협하도록 주선해 인도의 빠른 독립을 돕고 이를 통해 인도가 안정적으로 연합국 측에 가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장개석은 간디, 네루, 지나(파키스탄 독립운동 지도자) 등 민족 지도자들을 방문하며 그들과 진솔하게 속내를 터놓고 대화를 나눴다.
장개석은 이 과정에서 인도는 중국과 많은 유사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두나라 모두 열강의 무시를 당하는 약국(弱國)이지만 유구한 문명을 지녔으며 또 ‘전통적인 정신역량’을 믿었다. 인도의 독립운동과 영국 사이를 알선한 장개석의 행동은 영국의 처칠 당국이 보기에는 ‘내정간섭’의 혐의가 있었다. 때문에 영국의 양보를 얻어내지 못했다. 장개석은 인도 독립의 정의를 지지하기 위해 연합국 맹주인 영국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표현한 정의와 동정심은 많은 인도인들을 감동시켰다. 인도의 여러 지도자들 역시 그에게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을 지지하지 않겠노라고 보증했다. 인도를 떠나기에 앞서 송미령은 영어로 장개석의 ‘인도 국민들께 드리는 편지’를 발표해 중국과 인도 양국 국민들은 운명이 서로 같기 때문에 마땅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워야 한다고 했다.
한편, 진주만 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2달 만에 일본군은 남아시아의 여러 섬과 도시들을 잇따라 점령했다. 1942년 2월 중순에는 홍콩(영국령), 마닐라(미국령), 싱가포르(영국령)가 함락되었다. 5월에는 필리핀(미국령),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미얀마(구 버마)가 잇따라 함락되었다. 일본군이 여러 차례 동남아시아에서 뜻을 이루면서 점차 중국을 포위하는 형상이 되었다.
남양(南洋)을 휘젓고 다니는 일본군 때문에 외부의 지원과 공급이 줄어들자 중국은 더욱 곤경에 처했다. 1942년 초 장개석은 설악(雪岳)에게 30만 국군을 지휘해 장사(長沙)에서 12만 명의 일본군을 포위하게 했고 이중 약 5만 7천명을 섬멸하는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반면 중국군의 손실은 2만 8천에 불과했다.
미국의 종군기자 해리슨 포만은 전장을 취재한 후 쓴 기사에서 “3차례에 걸친 중국의 장사대첩(長沙大捷 역주: 장사 전투는 1차 2차 3차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고 3번째 전투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뒀다.)은 한가지 원칙을 입증하는데 그것은 바로 중국군의 장비가 일본군과 비슷하다면 그들이 아주 쉽사리 일본군을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장개석은 흥분해서 1월 4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일본군의 동남아 침략은 파죽지세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뒀지만 오직 장사전투에서 최대의 참패를 당했다. 이에 영미 정부 및 그 여론이 일본 침략자들의 강한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그에 맞선 우리나라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42년 2월 일본군이 미얀마(당시 이름은 버마)의 수도인 양곤을 점령하자 버마 주둔 영국군이 중국전구 사령관 장개석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2월 16일 중국정부는 원정군을 파견해 미얀마에 들어가 작전하게 했다. 이것은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파병된 이후 중국 군대가 외국에 파견된 최초의 작전이었다. 장개석은 두 차례에 걸쳐 미국식 장비로 무장한 최정예 원정군을 버마와 인도에 각각 파견했다. 지휘는 미국에서 파견된 참모장 스틸웰 장군이 맡았고 영국군과 협력해 일본군과 혈투를 벌이며 서부의 생명선을 지켜냈다.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