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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19): 순국열사들의 고귀한 희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지구전을 최초로 언급

‘상해전투(淞滬戰役)’ 이후 일본군의 전략중점은 화북에서 남쪽으로 이동해 화중(華中)에 집결되었다. 일본군의 우수한 장비는 호수와 늪이 많은 강남 수향(水鄕)에서 그 위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일본군의 남하는 장개석의 전략적 배치에 빠진 것이다. 장개석은 “일본군벌은 비록 스스로 온갖 책략을 갖췄다고 여겼지만 사실 미련하고 융통성이 없다.” “그들은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했지만 사실 그들의 국가 정책과 전략이 전투가 시작된 이래 줄곧 우리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중국의 운명》)

하지만 상해가 함락되자 수도인 남경(南京)이 위험에 빠졌다. 11월 20일 장개석은 천도를 발표했다. “우리는 줄곧 폭력으로는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믿어왔다. 언젠가는 적들이 만든 폐허 속에서 참신한 국가가 나타날 것이며 지구가 존재하는 한 이 나라는 계속 존재할 것이다.”

12월 13일 격전 끝에 마침내 남경이 함락되자 일본군은 두 달에 걸쳐 미친 듯이 만행을 저질렀다. 무려 30만에 달하는 군인과 민간인을 학살했으며 역사에서는 이를 ‘남경대학살’이라 부른다. 하지만 국민정부의 천도는 일본으로 하여금 장개석이 항복하도록 핍박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 당시 사나운 일본 군대를 마주해 국민당 상층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대부분은 비관적인 정서로 중국이 전쟁에서 반드시 질 거라고 인정했다. 왕정위(汪精衛)를 수반으로 한 주화파는 일찍부터 일본에 투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장개석의 심복들 사이에서도 패배정서가 가득했다. 공상희(孔祥熙), 우우임(于右任), 호적(胡適), 채원배(蔡元培), 진포뢰(陳布雷) 등도 모두 강화를 주장했고 더 이상 싸우면 필패해 중국이 멸망할 것으로 여겼다. 당시 행정원에서 회의를 열고 보고가 끝나자 중국은 반드시 망할 것이며 중국이 망하지 않으면 천리(天理)가 없는 것이라는 등의 분개한 말로 끝이 났다. 장개석의 항전을 지지하던 동료나 국민들은 오히려 ‘큰소리로 허풍만 친다’거나 ‘히스테릭한 풍조’라고 비판당했다.

장개석은 일기에서 “보수파와 문인(文人)들이 동요하면서 평화협상을 하자고 주장했다. 저들은 지금과 같은 시기에 평화를 구하는 것은 항복이지 협상이 아님을 모른다.”라고 했다. 또 “여러 장령(將領)들의 전의가 완전히 사라져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적군은 사실 수도를 공격할 결심이 없었는데 우리 군은 너무 무력했다. 적들은 이제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게 되었다.” “늙다리 문인들은 군사적으로 불리하다며 모두 강화를 주장했고 고위 장령들은 전부 실의에 빠졌으며 관망하는 기회주의자들은 더욱 심해서 혁명정신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었다.”

장개석은 동포들에게 적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지속적으로 항전하도록 이끌었다. 1937년 12월 16일 남경이 함락되기 직전 그는 전 국민들에게 선포했다.

“중국이 지구전으로 항전할 것이며 최후 승리의 중심은 꼭 남경에 있는 게 아니며 그렇다고 다른 대도시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 전국 향촌(鄕村)과 광대하고 강고한 민심에 달려 있습니다. 전국의 우리 동포들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알리고 형이 동생에게 권해 사람마다 적개심을 갖고 걸음마다 방어에 나서야 합니다.… 유형무형으로 강인한 보루를 만들면 적을 제압해 사지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우리 군이 남경에서 퇴각하며 전 국민에게 알리는 글(我軍退出南京告全國國民書)》)

12월 18일 남경이 함락된 후 5일째 되는 날 장개석은 일기에서 “최근 여러 방면의 인사들과 주요 동지들이 모두 군사적인 실패를 이유로 빨리 협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거의 한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만약 평화를 말한다면 이는 멸망과 다르지 않다. 단지 외국의 침략을 감당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내란이 더 심해질 것이다. 저들은 단지 위험만 볼뿐 적이 우리보다 위험한 것을 모르는데 주관이 없다면 이런 난관을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는가!”(《진실한 장개석을 찾아서(找尋真實的蔣介石)》)라고 적었다.

“반드시 적들이 전선을 더 진입하게 하고 더욱 곤경에 처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국제변화가 어떻게 될지는 기대할 수 없다 해도 반드시 왜구의 약점이 더욱 폭로될 것이며 적군의 병력 배치를 감당하지 못하고 진퇴양난에 빠져 숨 돌릴 틈도 없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하면 각국이 반드시 일본의 지친 기색을 보고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외적과의 전투를 중단한다면 내전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국내가 크게 혼란해지는 것보다는 항전하다 크게 패하는 게 낫다.”

일본은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한편 비밀리에 협상하는 강온양면책을 구사했다. 장개석은 적의 계략을 역으로 이용해 몇 차례 대표를 파견하며 일본과 비밀 회담을 가졌다. 1938년 10월 중국 측 대표 소진영(蕭振瀛)과 일본 군부를 대표한 와치 다카지(和知鷹二)가 비밀회담을 가졌다. 장개석은 중국측 선언에서 “우리 정부의 화전(和戰)방침은 이미 여러 차례 성명했다시피 7.7(노구교사건) 이전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할 수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일본은 11월 2일 히로다(廣田) 외상이 정식으로 협상조건을 제시했다. 일본의 부탁으로 중재를 맡은 독일 대사 트라우트만이 11월 5일 장개석을 면담하는 과정에서 전달한 일본측의 강화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내몽골에 자치정부(실제로는 일본의 괴뢰국) 수립

2. 화북에 자치정부 수립.

3. 만주국 국경에서 하북의 영정하(永定河) 경계까지 중립지대 확대.

4. 상해정전협의에서 결정한 중립지대를 확대하고 국제경찰이 치안 유지.

5. 중국과 일본의 경제협력과 대일 관세경감.

6. 일본을 배척하거나 저항하는 교육을 단속하고 공동으로 공산당을 방어한다.”

12월 28일 장개석은 국민정부 내의 대표적인 주화파 왕정위와 공상희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국민당의 혁명정신과 삼민주의는 오직 중국을 위해 자유와 평등을 구하는 것으로 적에게 항복할 수는 없다. 받아들일 수 없는 각종 조건에 서명하게 되면 나라와 민족에 영원한 속박을 증가시킬 것이다. 만약 불행히도 완전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혁명의 실패는 부끄러울 게 없으며 오직 우리 국민정부가 적을 이롭게 하지만 않는다면 적은 어찌할 도리가 없고 우리나라는 언제든 주권을 회복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결국 장개석, 왕정위, 공상희가 협의하에 계속해서 항전하고 적이 제시한 강화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일본은 당연히 장개석의 강화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7.7사변 이후 일본군이 거둔 전과를 전부 폐기하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장개석이 자신들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1938년 1월부로 국민정부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정하고 대신 괴뢰정권에 희망을 걸었다. 1940년 왕정위 괴뢰정권이 설립된 후에야 일본은 비로소 자신의 대리인을 확립했다.

장개석은 일본에 대한 항전은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신속히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일찍이 1932년 2월 25일 하응흠에게 항전계획을 준비하게 하면서 장개석은 “왜구와 지구전(持久戰)을 펼쳐야 하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적의 지나친 야심을 없앨 수 없다.”고 했다. 1938년 1월 장개석은 “우리는 장기간 광대한 공간을 고수해야 하며 광대한 공간으로 항전 시간을 연장해 적의 실력을 소모하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항전 필승의 조건과 요소》)라고 말했다.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

1938년 3월 13일 장개석은 일기에 “항전은 결코 일시적인 승부나 득실이 아니며 동아시아 천백세(千百世)의 화복(禍福)이 달려있다. 그러므로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전란이 끝나는 시기는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1938년 3, 4월 장개석의 배치에 따라 국군 제5전구 사령관 이종인(李宗仁)의 지휘 하에 산동과 강소 경계지역인 태아장(台兒莊)에서 일본군에 큰 타격을 가하고 적병 만여 명을 사살했다. 비록 국군은 여전히 전략적인 후퇴 상태에 있었지만 태아장 대첩은 “황군(皇軍 천황의 군대)은 이길 수 없다”는 일본의 망언을 파탄시켰다.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장개석은 산동성 주석이자 제5전구 부사령관 한복구(韓複矩)가 서주(徐州)전투 중에 무단으로 도망가 제남(濟南) 및 황하방어선을 포기했다는 이유로 총살시켰다. 이 사건은 당시 국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고 일선 병사들의 항전의지를 크게 고무시켰다.

1938년 6~10월 사이 100만여 명의 국민혁명군이 장개석의 지휘 하에 임시수도 무한(武漢)을 지키는 전투에 나섰다. 큰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장개석은 전국에 중계된 라디오 방송에서 “중국인민과 정부에 대한 일본침략자들의 모욕과 압박은 이미 마지막 한도에 도달했고 중국군은 민족의 생존을 위해 무한 지역에서 일본군과 결사항전을 결심했습니다.” “우리 군은 이번 작전에서 한 도시나 한 지역의 득실과 진퇴를 중시하지 않으며 능동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작전지역을 선택해 적의 전력을 섬멸하는 목적을 달성할 것입니다.”라고 각오를 밝혔다.

일본은 속전속결로 무한을 차지하기 위해 한차례 큰 도박을 감행했다. 이 전투에 걸린 시간은 넉 달 반이었다. 국군은 얼마 남지 않은 해군 공군까지 총동원해 일본군과 사투를 벌였고 일본군 사상자만 20만 명에 달했다. 허둥거리던 일본군은 급기야 국제법을 무시하고 독가스를 살포했다. 이 때문에 국군 40만 명이 사상했고 해군은 전멸했으며 비행기도 거의 남지 않았다. 순국열사들의 고귀한 희생과 웅대한 뜻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10월 21일 광주(廣州)가 함락되자 일본군은 월한(粵漢)철도를 단절시켰고 무한은 앞뒤로 적에게 포위당했다. 이튿날 장개석은 어쩔 수 없이 무한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무한은 정치, 군사, 산업에서 이미 철수계획을 끝마치고 서남쪽 대후방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10월 24일 심야 장개석은 부인 송미령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무창을 떠났다. 이튿날 일본군이 무한을 함락했다. 사학자들은 무한전투는 항전에서 아주 중요한 전기로 인정하는데 쌍방이 이때부터 대치국면에 들어간다. 일본은 비록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전략에서는 패배했고 중국이 전면적으로 항전하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다.

장개석은 국민정부를 더 서쪽인 중경(重慶)으로 옮기도록 배치해 파촉(巴蜀)의 험한 지형을 이용해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중국인들의 눈에 중경은 중화민족이 부흥하는 ‘희망의 성’이었다. 아울러 일본군은 한편으로는 서부전선을 공략하는 동시에 중경에 대해 무려 6년에 걸친 광적인 폭격을 개시했다. 장개석의 항전지휘부를 꺾고 중국의 항전결심을 흔들리게 하려는 의도였다. 당시 군사, 정치, 경제적인 측면이나 중국인들의 심리적 측면을 막론하고 항전의 정세는 밝지 않았고 중화민족의 운명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중국에서 장개석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1938년 6월 일본 외무성 동아시아국장 이시이 이타로우(石射豬太郎)는 한 보고서에서 “만약 국민정부를 부채에 비유한다면 장중정(蔣中正 장개석)은 실로 부채의 사북(접었다 폈다 하는 부채 교차된 곳에 박아 돌쩌귀처럼 쓰는 물건)에 해당한다. 민족의식을 지닌 대부분의 중국 지식인들에게 있어 장중정은 국가생존과 민족부흥의 호걸이며 특히나 중국민중들에게는 민족의 영웅이다. 만약 중국 국민의 우상을 타도하려 한다면 만주의 장학량이나 다른 지방군벌의 토벌과는 다를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