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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18): 전면항전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4장 일제에 저항해 중국을 지키다

1. 전면항전

“우리는 장기간 광대한 공간을 고수해야 하며 광대한 공간으로 항전 시간을 연장해 적의 실력을 소모하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장개석)

약자가 강자를 이기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은 노구교(盧溝橋)사건을 도발해 전면적으로 중국침략전쟁을 시작했다. 일본은 10만 대군에 비행기, 탱크 등을 더한 대규모 병력으로 화북(華北)을 침범해 ‘석 달 안에 중국을 멸망시킨’다는 야욕을 실현하려 했다. 북평(北平 지금의 북경)과 천진이 잇달아 함락되었다.

사변 발생 다음날 장개석은 일기에 자신의 최저한계에 대해 적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동서남북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나라를 위해 분투하려는 결심을 품고 결사적으로 적과 싸워야 한다. 만약 중도에 타협하여 한 치의 땅이라도 상실한다면 우리는 중화민족 역사상 죄인이 될 것이다. 군인은 땅을 지킬 책임이 있으니 전투에서 최후 1인에 이르더라도 반드시 끝까지 적과 싸워야 한다.”((《장개석일기》,1937년 7월 8일)

하지만 일본의 오만방자함은 결코 허장성세는 아니었다. 일본은 당시 세계 제 6위의 경제대국이었으며 해군 실력만 놓고 보면 세계 제 3위(미국과 영국 다음)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무사도 정신으로 강인한 전쟁기계들을 훈련시켰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패자(霸者)를 칭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중국과 러시아 두 대국을 크게 격파시킨 일본은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열강들도 모두 일본을 자극하려 하지 않았고 소련 역시 극동지역에 대한 일본의 위협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일본은 9.18 만주사변 이후 동북 3성을 점령해 만주국(滿洲國)이란 괴뢰국을 수립했으며 사기가 아주 높았다. 반면 중국은 원래 국력이 약한데다 국민들은 가난했고 내란이 끊이지 않아 인심마저 황황했다. 물질적인 실력만 보자면 당연히 일본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잔인무도한 일본 군대를 마주한 중국은 거의 막아낼 힘이 없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은 모두 기회주의적으로 형세를 관망하고만 있었다. 이에 대해 장개석은 민족을 위해 죽음의 위기에서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함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일찍이 1934년 장개석은 여산(廬山)군관훈련단에서 ‘민족전쟁에서 승리하는 요결’이란 제목의 강연에서 이렇게 명확히 지적했다. “전장(戰場)에서 보자면 작전의 승부는 비록 군대의 전투에의해 결정되긴 하지만 전투 위에는 또 전술이 있고 전술 위에는 또 전략이 있으며 전략 위에는 또 정략(政略)이 있다. 만약 전투에서 적을 이길 수 없다면 전술로 이겨야 하며, 전술에서 적을 이길 수 없다면 전략에서 이겨야 하고 만약 전략에서도 이길 수 없다면 우리는 반드시 정략에서 이겨야만 한다.” 약자인 중국이 강자인 일본을 이길 수 있는 법보(法寶)를 말했다.

일본의 침략은 의롭지 못하고 중국의 자위(自衛)는 정의이며 압박을 받아 일어선 애병(哀兵)은 반드시 승리한다. 일본은 속전속결을 추구해 장기간의 작전준비를 하지 않았으니 중국은 지구전을 펼쳐야 했다.

장개석은 1928년 제남(濟南)사건 때부터 일본에 대한 전투를 준비해왔다. 일본은 사방이 다 적이지만 중국의 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일본뿐이다. 또 일본은 군사와 정치가 분리되어 있었고 호전적인 군인들이 정부를 겁박했으며 심지어 육군과 해군 사이의 협력도 서로 원활하지 못했다. 반면 중국은 국방최고위원회를 설치해 장(蔣)위원장이 당정군(黨政軍)의 대권을 장악했고 총괄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당시 중공군을 제외하면 각 계통의 군인들은 민족의 대의에 따라 대부분 장개석 위원장의 명령에 복종했다. 장개석은 어떻게 해야 정략(政略)의 우세를 발휘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일본 군벌에겐 이런 식견이 없었다.

7월 13일 장개석은 북평(北平) 행정수반 송철원(宋哲元)에게 전보를 보냈다.

“중앙은 이미 전력을 다해 항전하기로 결심했으며 구차하게 살기보다는 명예롭게 죽어 우리나라의 인격을 지킬 것이다.”

7월 17일 장개석은 유명한 여산담화를 발표해 세계에 선포했다.

“우리가 아는 전국이 응전한 이후의 정세는 다만 어떤 희생이 있을지라도 결코 요행으로 구원받을 일은 없다. 만약 전쟁이 시작된다면 남북의 지역을 나누지 않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며 그 누구든 모두 영토를 지키고 항전할 책임을 갖고 모든 것을 희생할 결심을 품어야 한다.”(《노구교사건에 대한 엄정표시》 1937)

북남에서 동서로 적의 작전선을 바꾸다

“부친은 확실히 중국대륙의 지형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적 일본에 대항하자면 우선 중국에 대한 일본의 공격계획을 바꿔야 한다고 결정하셨다. 만약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다면 북쪽에 공격기지를 두고 북에서 남으로 공격해 국군을 동남해안으로 밀어내기만 하면 석 달 안에 중국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의 대책은 바로 북에서 남으로 공격하는 일본군의 작전선을 동에서 서로 바꾸고 우리의 공격기지를 대후방(大後方 운남 귀주 사천)에 놓는 것이다. 기지의 뒷문이 열려있기만 하면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엄청난 노력을 들여 서남로드, 버마로드(滇緬公路) 및 인도로드(雷多公路)를 개발했던 것이다. 만약 부친이 중국의 고대 전쟁사를 숙지하지 않았다면 아마 중국의 지리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장위국구술자서전(蔣緯國口述自傳)》)

“항전이 발발한 후 아버님의 전쟁지휘는 북에서 남으로 향하는 일본군의 작전선을 타파해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압력을 감소시키는 동시에 일본의 작전선을 동서방향으로 바꾸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서남지역(즉 대후방)을 이용할 수 있었다.”(《장위국구술자서전》)

당시 중국에 파견되어 있었던 독일군사고문 팔켄하우젠(Falkenhausen) 장군이 중국 국방을 시찰한 후 1935년 건의한 비밀문건 ‘시국에 대응할 대책에 대한 건의’에서 “일단 군사적인 충돌이 발생하면 화북(華北)은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게 될 것이며 만약 싸우지 않고 화북을 포기한다면 농해로(隴海路 감숙성 난주에서 강소성 연운강까지 동서로 이어지는 철도선) 및 인근의 주요도시들이 최전방 지역이 된다.”고 지적했다. 팔켄하우젠 장군은 중국은 당연히 서주(徐州), 정주(鄭州), 무한, 남경 등 지역의 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장개석은 이에 대해 “국군은 북평과 천진 남쪽의 평원에서 결전의 기회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지형에서는 일본의 군대보급이 쉬워 기동성과 화력의 우세를 발휘하기 쉽다.”라고 했다.

공간으로 시간을 벌다

한편 8월 13일 상해에서는 ‘상해전투(淞滬戰役)’가 터졌고 국군은 양쪽에서 적과 맞서야 했다. 장개석은 장계취계(將計就計 적의 계략을 역이용해 상대방을 공격하는 방법)로 상해전투를 확대시켜 일본의 주력군을 남하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면 일본군의 주력을 북에서 남으로 가는 방향에서 동에서 서로 공격하게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기지를 등지고 공격하는 한편 후퇴했다.… 이렇게 공간으로 시간을 버는 작용을 할 수 있었다.”(다큐멘터리 《일촌산하일촌혈(一寸山河一寸血)》에서 장위국의 말.)

사실 일본은 원래 화남(華南)에 대규모로 병력을 동원할 계획이 없었다. 일본군 참모본부가 노구교 사건 이후 만든 ‘화북시국에 대한 처리 요령’에 따르면 “만약 항일행동이 화중과 화남까지 파급되면 육군병력을 출병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했다. 일본군 참모본부는 소련에 대한 방어 전략에 중점을 두면서, 화북지역을 차지해 한 지역을 차지하는 색채가 강해지면 중국 측이 장차 전면적인 항전을 할 능력이 없을 거라 여겼다.

7월 29일 일본 참모본부가 제정한 ‘대중국 작전계획 대강(對華作戰計劃大綱)’에 따르면 “첫째 중국 주둔군으로 작전을 진행하고 평진(平津 북평과 천진)지역에서 중국군대에 대해 가급적 심각한 타격을 입힐 것, 둘째 정황상 부득이 할 때에 한해 청도(靑島)와 상해 부근에서 작전할 것”이라고 했다.

장개석은 상해지역에 대군을 배치해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강력하게 싸워야 한다.”고 했다. 전세가 불리한 상황임에도 장개석은 스스로 제3전구 사령관이 되어 직접 전선에 나가 지휘했다. 한번은 상해전선에 나갔다가 자신이 탄 열차가 일본 비행기의 공격을 받아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적도 했다. 송미령(宋美齡 장개석의 부인) 역시 국군을 위문하러 상해로 가던 도중 일본군 폭격기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

일본은 땅과 바다는 물론 하늘에서 막강한 화력을 동원해 중국 측에 10만이 넘는 사상자를 발생하게 했고 최종적으로 상해를 점령했다. 반면 열세에 처한 국군도 완강히 저항하면서 6만이 넘는 사상자를 만들어 일본군의 예봉을 크게 꺾어놓았다. 1937년 상해전투는 “석 달이면 중국을 멸망시킨다”던 일본의 계획과 “장개석을 압박해 화해를 청하게 한다”는 망상마저 모두 깨뜨려버렸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