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행자(幸紫)
【정견망】
덕우(德佑 남송 공제의 연호로 1275~1276년) 2년 2월 19일 나는 우승상 및 추밀사(樞密使)에 임명되어 여러 로(路 송나라 지방행정단위)의 병권을 총괄하게 되었다. 당시 원나라 병사들이 이미 수문(修門 남송 수도 임안의 성문 이름)밖까지 밀어닥쳐 적과 싸울 수도 성을 지킬 수도 그렇다고 수도를 옮길 수도 없었다. 조정의 관리 대부(大夫)들과 병사들이 좌승상부에 모였지만 아무도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양국의 사신들이 바삐 오가는 가운데 북측(원나라) 진영은 우리 조정에서 국정을 주관하는 사람과 만나고 싶어 했다. 여러 사람들이 내가 대표로 가면 나라의 재앙을 완화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나는 내 한 몸만을 돌볼 수 없었고 또 나의 언변으로 북측을 움직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처음에 사신이 왕래할 때는 북측에 억류된 경우가 없었기에 나도 북측을 한번 살펴보고 돌아와 나라를 구할 방책을 내고자 했다. 이에 재상의 인수를 사양해 받지 않고 이튿날 자정전(資政殿) 학사( 역주: 송나라 관직으로 보통 퇴직한 재상에게 주는 명예관직)의 신분으로 출발했다.
막 북측 진영에 가서 격앙된 어조로 의견을 말하니 (원 진여의) 위아래가 깜짝 놀랐고 북측에서도 함부로 우리나라를 무시하지 못했다. 불행히도 여사맹(呂師孟 병부상서로 1년 전 원나라 진영에 찾아와 화평을 구걸해 송나라에 불리한 형세를 조성함)이 내가 출사하기 전에 (나에 대해)나쁜 말을 했고 가여경(賈餘慶 문천상이 원나라 진영에 간 다음 곧바로 투항하는 표를 올림)이 내가 출사한 후에 적에게 아첨하는 바람에, 나는 억류되어 돌아올 수 없었고 마침내 나라 일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벗어날 수 없었기에 나는 곧장 적장에게 나아가 신뢰를 잃었다고 꾸짖고 여사맹 숙질(여사맹의 숙부 여문환이 양양을 시키다 적에게 투항해 원나라 참지정사로 임명됨)의 반역한 죄상을 열거했다. 오직 죽기만을 바랄 뿐 개인의 이해득실은 따지지 않았다. 북측에서는 겉으로는 나를 공경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화를 냈다. 지위가 높은 두 명의 두목을 명목상 ‘관반(館伴 사신을 접대하는 관리)’으로 삼았으나 밤이면 병사들로 숙소 주변을 에워쌌기 때문에 나는 돌아올 수 없었다.
얼마 후 가여경 등이 기청사(祈請使 2월 초 공제가 정식으로 원에 투항하며 가여경 등을 기청사로 파견해 조서를 받들어 대도로 파견해 송조의 사직을 보존할 수 있도록 요청하게 했다)의 신분으로 원나라 도읍으로 갔다. 이에 북측 진영에서 나를 위협해 함께 보내려했으나 나는 사신의 명단에 없었다.(문천상은 정식으로 기청사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원나라 군사들로부터 북행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나는 마땅히 자진해야 했으나 꾹 참고 행동했다. 옛사람은 “장차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경구(京口 지금의 강소 진강鎮江)에 이르러 빈틈을 이용해 진주(眞州 지금의 강소 의정현儀征縣)로 달아나, 북측의 허실을 동서 변방의 두 장군(당시 남송은 회동淮東과 회서淮西 두 지역에 국경 수비대에 해당하는 제치사制置使가 있었는데 회동제치사 이정지가 양주에 주둔하고 있었다)에게 알려 병사를 크게 일으키기로 약속했다. 중흥할 기회는 거의 여기에 달려 있었다.
이틀을 머물었지만 유양(維揚 양주) 사령관(당시 양주성의 회동제치사 이정지는 문천상이 이미 원나라에 몰래 투항했다고 여겨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에게 축객령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바꾸고 종적을 감추며 들판을 걷고 노숙을 해야 했다. 낮마다 북측 기병들과 장강과 회수 사이에서 서로 나타나고 숨기를 거듭했다. 고생스럽고 굶주린 데다 의지할 곳은 없고 현상체포는 또 다급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멀어 큰 소리로 외쳐 봐도 미치지 못했다.
나중에 작은 배를 얻어 장강의 모래섬을 피해 북해(北海 장강 하구의 북방)로 나왔다. 그리고 나서 양자강(揚子江 장강의 하류)을 건너 소주양(蘇州洋 지금의 상해 동남쪽 해안)으로 들어가 사명(四明 절강 은현鄞縣) 천태(天台 절강 천태현) 일대를 전전하다 영가(永嘉 절강 온주溫州)에 도착했다.
오호라 내가 죽을 고비에 이른 것이 몇 번인지 알 수 없구나! 적의 두목을 욕할 때 마땅히 죽었어야 했고, 반역자를 욕했을 때 마땅히 죽었어야 했으며 적의 대장과 20일간 함께 있으면서 시비를 다툴 때 마땅히 죽었어야 했다. 경구를 도망쳐 나오면서 비수(匕首)를 품고 불의의 상황에 대비했는데 하마터면 자살해서 죽을 뻔했고, 원나라 함대부근 십여 리를 지날 때는 순찰선의 수색을 받아 하마터면 물고기 밥이 될 뻔했다.
진주에서 성문 밖으로 쫓겨나서는 방황하다 죽을 뻔했고, 양주로 가자면 과주(瓜州 양주 남쪽 양자강 북쪽의 모래섬) 양자교(揚子橋 양주 남쪽 15리 지점의 다리)를 지나야했는데 뜻밖에 원나라 초병을 만났다면 꼼짝없이 죽어야 했다. 양주성 아래에서는 진퇴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업ㅆ었다.
계공당(桂公塘 양주성 서쪽의 작은 언덕)의 흙담장 안에 앉아 있을 때는 적의 기병 수천 명이 문 앞을 지나갔는데 하마터면 적의 손에 죽을 뻔했고, 가가장(賈家莊 양주 북쪽의 장원)에서는 순찰병에게 능멸과 핍막을 당해 죽을 뻔했다. 밤에 고우(高郵 강소 고우)로 달아나다 길을 잃어 하마터면 적의 함정에 빠져 죽을 뻔했고, 날이 밝을 무렵 초병을 피해 대나무 숲속에 들어가 있었는데 순라병 수십 명을 만나 하마터면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할 뻔했다.
고우에서는 제부(制府 군무를 관장하는 제치사)에서 공문이 내려와 하마터면 체포되어 죽을 뻔했다. 성자하(城子河 고우현 동남쪽 강)를 건널 때는 어지럽게 떠 있는 시체 속을 통과하는데 우리 배와 적의 초병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하마터면 마주쳐서 죽을 뻔했다. 해릉(海陵 강소 태현泰縣)에 도착해 고사(高沙 고우 서쪽 지명)로 가는데 항상 헛되이 죽을까 두려웠다.
해안(海安 강소 해안현)과 여고(如皋 강소 여고현)를 거쳐가자면 무릇 삼백리 길이 되는데 원군과 도적들이 그 일대에서 왕래해 죽지 않을 수 있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통주(通州 강소 남통시)에 도착해서는 받아주지 않아(성문은 닫혀 있고 적의 추격을 받아) 죽을 뻔했다. 작은 배에 의지해 거대한 파도를 건넌 것은 어찌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나왔지만 죽음은 이미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죽고 사는 것은 잠깐 사이의 일로 죽으면 죽는 것이지만 위급하고 험악한 상황이 연이어 나타나고 교차해 출현하니 진실로 일반인이 견뎌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통이 가라앉은 후 당시 고통을 되새기니 비통함이 어떻겠는가!
나는 환난 중에 틈틈이 시로 내가 겪은 일을 기록했고 지금 그 원고를 보존하고 있는데 차마 버리지 못했다. 도중에 손으로 직접 베껴 썼다. 북측 진영에 사신을 출발해서 북관밖에 억류되어 있을 때까지가 한권이고, 북관 밖을 출발해 오문(吳門 강소 오현) 비릉(毗陵 강소 무진武進)을 지나 과주(瓜州)를 건너 다시 경구로 돌아올 때까지 지은 것을 한권으로 만들었다. 경구를 탈출해 진주, 양주, 고우, 태주, 통주에 이를 때까지 지은 것을 한권으로 하고 해로로 영가에 왔다가 삼산(三山 지금의 복건성 복주)에 이를 때까지 지은 것을 한권으로 만들었다. 장차 집에 보관해 후세사람들로 하여금 책을 읽고 나의 뜻을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오호라! 내가 살아난 것은 다행이지만 이는 무엇을 위함이었던가? 신하가 되기를 구했다면 임금이 모욕을 당하면 신하로서 죽는다 해도 남는 죄가 있을 것이요, 효성스런 자식이 되길 원구했다면 부모가 남겨준 몸을 가지고 모험하다 죽어도 남는 책임이 있을 것이다. 임금에게 죄를 청하려 해도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어머님께 죄를 청해도 허락하지 않으시니 조상의 묘에서 죄를 청한다.
살아서 나라를 구하지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악귀(厲鬼)가 되어 적을 공격함이 의(義)이다! 하늘의 영험과 종묘의 복(福)에 힘입어 우리의 무기를 정비하고 임금을 좇아 전쟁에 나아가 선봉이 되어 종묘사직의 치욕을 씻고 고조(高祖 송태조 조광윤)의 대업을 회복해야 한다. 소위 “맹세코 적과 함께 살아남지 않고(誓不與賊俱生)” 소위 “나라를 위해 부지런하고 신중히 온힘을 다해 죽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다(鞠躬盡力,死而後已)”고 한 것 역시 의이다!
아! 나 같은 사람은 장차 어딜 가도 죽을 곳을 찾지 못할 일은 없으리라. 지난 날 만약 내가 황야에 뼈를 버렸다면 내가 비록 광명정대해 부끄러움이 없다 해도 임금과 부모에게 자신의 잘못을 감출 수 없으니 임금과 부모가 나를 어떻게 말하겠는가? 진실로 뜻밖에 나의 원래 관직으로 돌아와 밝은 세상을 다시 보니 설사 당장 고향에서 죽는다 해도 또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또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이해 여름 5월 연호를 경염(景炎 단종의 연호)으로 바꿨는데 여릉 사람 문천상이 시집에 서문을 쓰고 이름 하여 《지남록(指南錄)》이라 한다.
【원문】
德佑二年二月十九日,予除(拜官)右丞相兼 樞密使(掌管全國軍政兵權),都督(統領)諸路軍馬。時北兵(指元兵)已迫修門(南宋首都臨安城門名)外,戰、守、遷皆不及施。縉紳、大夫、士萃(聚集)於左丞相府,莫知計所出。會使轍(使者的車輪軸)交馳(指兩國使者往來不停),北邀當國者(元兵邀請南宋主持國政者)相見,眾謂予一行爲可以紓禍(減緩國禍)。國事至此,予不得愛身;意北亦尚可以口舌動也(以外交言論勸退元朝)。初,奉使往來,無留北者,予更欲一覘北(覘,窺刺),歸而求救國之策。於是,辭相印不拜,翌日,以資政殿學士(宋官名,退職的宰相,多由皇帝授與此尊榮官職)行。
初至北營,抗辭(直言)慷慨,上下頗驚動,北亦未敢遽輕(隨意輕視)吾國。不幸呂師孟構惡於前,賈餘慶獻諂於後(呂師孟,爲宋兵部尚書,倡和議,於前一年出使元營乞和,造成宋朝形勢不利;賈餘慶,時繼文天祥爲右丞相,文天祥奉使至元營,賈餘慶隨即呈獻降表至元營),予羈縻(被羈留)不得還,國事遂不可收拾。予自度不得脫,則直前詬虜帥失信,數呂師孟叔侄(呂師孟的叔父爲呂文煥,守襄陽,以城降,元人任爲參知政事)爲逆,但欲求死,不複顧利害。北雖貌敬,實則憤怒,二貴酋(指元將唆都、忙古歹)名曰“館伴”(名義說是就館陪伴,實則監管),夜則以兵圍所寓舍,而予不得歸矣。
未幾,賈餘慶等以祈請使(二月初,宋恭帝正式降元,派賈餘慶等人擔任祈請使,奉表往元京,以祈求保存宋朝社稷)詣北。北驅予並往,而不在使者之目(文天祥未被列入祈請使,但仍被元兵脅迫北行)。予分當引決(自殺),然而隱忍以行。昔人雲:“將以有爲也。”
至京口(今江蘇鎮江),得間(乘隙)奔真州(江蘇儀征縣),即具以北虛實告東西二閫(國門;指防界守將;二閫,指當時南宋淮東、淮西兩路制置使),約以連兵大舉。中興機會,庶幾(希望)在此。留二日,維揚(指揚州)帥下逐客之令(駐揚州城淮東制置使李庭芝,懷疑文天祥已密降元朝,不肯收留及舉兵)。不得已,變姓名,詭蹤跡,草行露宿,日與北騎相出沒於長、淮間。窮餓無聊,追購(懸賞追捕)又急,天高地迥(遠),號呼靡及。已而得舟,避渚洲(長江的沙洲),出北海(長江口東海的北方),然後渡揚子江(長江下遊),入蘇州洋(上海東南方的海面),輾轉四明(今浙江鄞縣)、天台(今浙江天台縣),以至於永嘉(浙江永嘉;溫州)。
嗚呼!予之及於死者不知其幾矣!詆(辱罵)大酋(元朝的將帥)當死;罵逆賊(指呂師孟叔侄)當死;與貴酋處二十日,爭曲直,屢當死;去京口,挾匕首以備不測,幾自剄死;經北艦(穿越元兵船隊)十餘裏,爲巡船所物色(根據通緝圖貌以盤查),幾從魚腹死(差點投水自殺);真州逐之城門外(指被李庭芝誤爲元諜,而驅逐出境),幾彷徨死;如揚州,過瓜州、揚子橋,竟使遇哨(元人哨兵),無不死;揚州城下,進退不由,殆例(恐怕)送死;坐桂公塘土圍中,騎數千過其門,幾落賊手死;賈家莊幾爲巡徼(巡察)所陵迫死;夜趨高郵,迷失道,幾陷死(幾乎受困而死);質明(天剛亮時),避哨竹林中,邏者數十騎,幾無所救死;至高郵,制府檄(官方文書)下,幾以捕系(捕系)死(指李庭芝通令各地關守擒拿文天祥的文書);行城子河(在高郵東南),出入亂屍中(當時宋兵與元兵在城子河血戰,此役元兵大敗,積屍水邊),舟與哨相後先,幾邂逅死;至海陵(今江蘇泰縣),如高沙,常恐無辜死(常擔心又被懷疑爲間諜而無辜遇害);道海安、如皋,凡三百裏,北與寇(元兵與盜匪)往來其間,無日而非可死;至通州,幾以不納死(當時文天祥變換姓名,被疑爲元兵奸細,被盤查數日);以小舟涉鯨波(指海浪)出,無可奈何,而死固付之度外(意度之外;不再多想)矣!嗚呼!死生,晝夜事也(死生如日出日落,是人生必然的現象),死而死矣,而境界危惡,層見錯出,非人世所堪。痛定思痛,痛何如哉!
予在患難中,間以詩記所遭,今存其本,不忍廢,道中手自抄錄。使北營,留北關外(指杭州城以北的元營),爲一卷;發北關外,曆吳門(今江蘇吳縣)、毗陵(今江蘇武進),渡瓜州, 複還京口,爲一卷;脫京口,趨真州、揚州、高郵、泰州(海陵)、通州,爲一卷;自海道至永嘉、來三山(指福建福州),爲一卷。將藏之於家,使來者讀之,悲予志焉。
嗚呼!予之生也幸,而幸生也何所爲?求乎爲臣,主辱,臣死有餘fJ;所求乎爲子,以父母之遺體行殆(不敢以父母賜給的身體做危險的事)而死,有餘責。將請罪於君,君不許;請罪於母,母不許;請罪於先人之墓。生無以救國,死猶爲厲鬼以擊賊,義也!賴天之靈、宗廟之福,修我戈矛,從王於師,以爲前驅,雪九廟之恥(指曆代皇帝受元人欺侮之恥),複高祖(指開國君主趙匡胤)之業,所謂“誓不與賊俱生”,所謂“鞠躬盡力,死而後已”,亦義也!嗟夫!若予者,將無往而不得死所矣。向也(往昔),使予委骨於草莽,予雖浩然無所愧怍,然微以自文(無法自己掩飾過錯)於君親,君親其謂予何?誠不自意返吾衣冠(使宋朝恢複其官職),重見日月,使旦夕得正丘首(反葬故鄉),複何憾哉!複何憾哉!
是年夏五(夏季五月),改元景炎(宋端宗年號),廬陵文天祥自序其詩,名曰《指南錄》。
【심득체회】
《지남록(指南錄)》은 문천상의 시집으로 모두 4권에 180수의 시가 실려 있다. 문천상은 송나라 공제 덕우 2년(1276년) 사신으로 원나라 군영에 가서 협상을 벌이다 억류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경구에 이르러 탈출에 성공한 후 남쪽으로 돌아왔는데 여정 중에 죽음을 넘나드는 온갖 고생을 겪는다. 이것을 시로 기록해 자신의 소감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지남록’이란 제목은 양자강(揚子江)이란 그의 시에서 유래한다.
며칠 동안 바람 따라 북해에서 노닐다양자강 큰 물결 따라 돌아왔노라.신하의 마음은 지남석과 같아서남쪽 가리키지 않으면 멈추지 않노라.
幾日隨風北海遊 기일수풍북해유回從揚子大江頭 회종양자대강두臣心一片磁針石 신심일편자침석不指南方不肯休 부지남방불긍휴
이 글은 나중에 《문문산선생전집(文文山先生全集)》 13권에 수록되었다. 끝부분의 서문을 제외하고 서술한 것은 대부분 작자가 어지러운 시국 속에서 온갖 고생을 겪으며 유망한 과정을 적고 있다. 세 걸음마다 위기가 닥치고 다섯 걸음마다 난(難)에 처했으며 가는 곳마다 도처에 위기가 잠복해 한걸음 한걸음이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험난했으니 진실로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육체적인 시달림과는 별개로 심성(心性)상의 어려움은 더욱 견디기 힘들고 첨예했다. 적에게 감금되고 억류되어 북으로 끌려가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같은 편에게 원나라에 투항한 간첩이란 오해를 받아 쫓겨나거나 거절되기 일쑤였고 심지어 이것 때문에 체포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이렇게 오도가도 못하고 힘겨운 상황 속에서 그는 생사를 내려놓고 “죽음과 삶은 밤낮이 바뀌는 일에 불과하며 죽으면 죽는 것!”임을 크게 깨달았다.
하지만 필경 문인이며 진사출신이었던 문천상은 환난 중에서도 ‘시(詩)’를 잊지 않았 위험한 지경에 처해서도 ‘문(文)’을 폐기할 수 없었다. 이에 자신이 겪은 일을 시로 기록한 ‘지남록’을 만들고 또 뒤에 지금 우리가 감상한 후서(後序)를 적었다. 문천상은 문신임에도 수습하기 힘든 난세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병사들을 이끌고 의병을 모집해 원나라에 저항했다. 물론 여러 번 패배했는데 왜냐하면 무인의 일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고 천상(天象)의 변화가 송나라의 복이 다하고 조대가 바뀌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상 그가 연기해야 했던 비극적인 역할이며 그가 풀어낸 것은 고립무원의 신하와 사랑을 받지 못한 서자의 ‘충정지절’이었으며 힘껏 위험한 상황을 만회하는 ‘크게 두려움 없는 정신’이었으며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행한 ‘영웅의 기개’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74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