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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17):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의연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죽음 앞에서도 의연

정변(政變) 당일 장학량이 장개석을 만나러왔다. 장개석이 그에게 병변에 대한 태도를 묻자 장학량은 거짓으로 자신은 사전에 몰랐노라고 발뺌했다. 장개석은 “그대가 기왕에 정황을 몰랐다면 나를 즉각 남경이나 아니며 낙양으로 돌려보내라. 그러면 이 일을 수습할 수 있다.”라고 했다.

하지만 장학량은 자신의 조건을 들어줘야만 풀어줄 수 있다고 했다. 장개석은 곧바로 엄숙하면서도 정의로운 말로 그의 반역행위를 비난하며 “당장 나를 총살하라, 이 외에 다른 할 말은 없다.”고 했다. 장학량이 뜻밖에 “인민재판”에 넘기겠노라고 위협하자, 장개석은 분노가 극에 달했다. “내 몸을 죽이고 목을 자르거나 팔다리를 잘라낼 순 있어도 중화민족의 인격과 정기(正氣)를 지키지 않을 순 없다.”

장개석은 장학량에게 당장 자신을 석방하든지 아니면 현장에서 총살하든지 양자 중에서 택일하라고 요구했다. 장학량은 일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3일째 되는 날 그(장학량)의 말이 모호해졌고 반은 강요하고 반은 부탁하면서 그들이 공동으로 의결한 8가지 조건을 말하면서 나더러 서명만 하면 당장이라도 남경까지 호송해주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그대가 아무리 듣기 좋은 말로 청한다 해도 서안에 납치해서 협박하는 상태 하에서는 협상의 여지는 전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설사 그가 후회한다고 해도 공모한 공비(共匪 중공)들이 분명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길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 비적의 당에게는 생사의 관건이 달린 문제라서 나더러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위협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사지로 몰아넣어야 했다. 나는 이때 오직 사생취의(捨生取義 정의를 위해 목숨을 버림)하려는 결심을 내렸고 역도들과는 시종 그 어떤 정치조건에 대한 협상도 거부했다.”

당시 장개석의 처지는 마치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는 자신이 살아서 돌아갈 확률이 아주 적음을 알고 있었다. 12월 20일 반란 발생 8일이 되는 날, 송자문(宋子文 장개석의 처남)이 서안에 와서 장개석을 면회했다. 이때 장개석은 전 국민과 아내 및 두 아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각각 전달했다. 그는 아내(송미령)에게 두 아들(장경국과 장위국)을 친자식처럼 여기고 아들들은 부모에게 효순할 것을 당부했다. 또 아내더러 절대 서안으로 오지 말라는 말을 전달하게 했다.

그는 송자문에게 “지금 신속하게 출병하지 않으면 위험에서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하면서 또 직접 공격 전략을 알려주며 중앙에 전달하게 했다. 장개석은 “우리가 일을 하면서 완전히 공(公)을 위해야 하며 사사로움(私)을 따라선 안 된다. 만약 신속하게 서안을 포위한다면 나는 비록 위태로워도 편안히 여길 것이며 설사 희생될지라도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다.”(《서안 반달 기록(西安半月記)》)

국민에게 드리는 유언에서 장개석은 이렇게 말했다.

“중정(中正 장개석 본인)이 나라를 위해 자중하지 못하고 행동거지를 간단히 하는 바람에 반동파(反動派)들이 빈틈을 타 병변이 발생하게 했습니다. 지금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니 위로는 당과 나라에 아래로는 인민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오직 죽음으로 당과 나라에 보답하고 우리 인민들에게 보답해 혁명당원으로서 부끄럽지 않고자 할 뿐입니다. 제가 죽은 후에도 중화의 정기는 여전히 죽지 않을 것이며 중화민족은 언젠가는 다시 부흥할 날이 있을 겁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의연한 그의 태도는 쥐꼬리 같은 중공의 재간을 바닥나게 했고 장학량과 양호성은 호랑이 등에 올라타 내려오지 못하는 지경에 처했다. 국군(國軍)은 이미 토벌준비를 마쳤다. 12월 16일 당황해서 갈팡질팡하던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중앙 공군이 위남(渭南), 화현(華縣) 등 지역에 폭격을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장개석은 이 말을 듣고 크게 안도하며 일기에 “중앙에 반란을 평정하고 주관할 사람이 있음을 알고 마치 여행 중에 집안이 평안하다는 희소식을 들은 것 같았다.”라고 썼다.

송미령(宋美齡)은 서안사변의 군사적 해결에 동의하지 않았다. 사변이 발생한 다음 날 개인고문이자 호주인인 도날드에게 비행기로 서안에 가서 장학량을 만나 평화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평화적인 해결방안에 대해 국민당의 일부 고위관리들과 의견이 달라 군사행동을 저지하기는 아주 어려웠다. 어떤 이는 심지어 그녀에게 남편을 구하려는 마음이 간절한 것은 아녀자의 소견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미령은 이런 의견에 흔들리지 않았고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해 장개석을 구하고 그가 항일전쟁을 영도하길 원했다. 그녀는 이에 남편과 생사를 같이할 결심을 내리고 직접 서안으로 향했다.

장개석의 동맹이나 정적을 막론하고 모두들 장개석이 사라지면 중국은 장차 지도자가 없는 난국에 빠져 내전이 발발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일본이 가장 큰 이득을 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공의 능력은 당시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만약 일본이 전면적으로 중국을 침입하는데 장개석의 영도가 없다면 항일 능력이 전혀 없는 중공 역시 매국노가 되거나 망국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송미령은 장개석이 이 어려움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장개석은 신의 보우를 받아 죽음의 관문을 넘어설 수 있었다.

“남편은 ‘내가 비록 당신더러 절대 서안에 오지 말라고 당부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당신을 막을 수 없다고 느꼈소. 오늘 새벽 성경을 읽는데 여호와는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셨으니 곧 여자가 남자를 보호하리라는 구절을 읽고 있었는데 마침 당신이 이곳에 왔소.’라고 말했다. 남편은 납치되어 그간 겪은 일들을 들려주었고 또 그 와중에도 그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으며 나한테도 무슨 문서에 서명하라는 권유를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저는 본래 남편의 안전보다는 국익을 중시하니 제가 당신에게 굴복을 권고할까 염려하진 마세요.’라고 말했다.”

(《송미령:서안사변 회고록(西安事變回憶錄)》)

장개석은 죽어도 타협하지 않았다.

“22일 부인이 갑자기 서안에 왔다. 나는 그녀를 만나자마자 첫마디로 ‘열흘 동안 반도들이 매일 각종 수단을 동원해 나더러 조건에 서명하기만 하면 남경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했소. 당신이 와서 고난을 함께 하려는 것은 공(公)을 위해서지 결코 사(私)를 위함이 아니오. 모든 것은 반드시 나라를 중심으로 해야 하오. 만약 반도들이 조건을 내걸고 내 결심을 바꾸도록 권고하라는 부탁을 받고 왔다면 반드시 매섭게 거절하시오. 차라리 우리가 죽을지언정 저들에게 응답할 순 없소.’ 부인은 이에 결심을 내리고 내게 대답했다. 그녀는 나의 인격을 심지어 내 목숨보다 중시하며 결코 나의 평소 소망과 행동을 어기도록 권하지 않겠노라고 했다. 그녀는 단지 나와 생사를 같이하길 원한다고 했다.”(《중국 안의 소련》)

송미령은 서안에 온 후 장개석에서 “적을 죽이느니 차라리 항일하게 하라”고 권했다. 송 씨 남매는 장개석을 대표해 장학량과 중공에게 양보해 공비토벌을 중지하고 그들을 재편해 국민혁명군에 편입시키고 위원장의 지휘 하에 항일을 준비하자고 제안했다.

장학량은 서안사변 이후 스스로 죄를 청했고 서안에서 남경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고별편지를 썼다.

편지 앞부분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나는 진심으로 나라를 구할 뜻을 품었지만 지금에 와서 오히려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평생 신의(信義)를 자부해왔건만 뜻밖에 오늘에 이르렀다. 내가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일본놈들을 기쁘게 했다는 것이다. 나는 나라가 망하는 일을 보고 싶지 않으며 차라리 내가 죽어 그가 일을 잘 마무리하길 바란다. 또한 국정을 맡은 여러분들이 양심에서 깨어나기를 바란다. 장공(蔣公)께는 내가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렸다. 장공은 총명하신 분이니 다시 한 번 내 말을 살펴주시길 머리 숙여 바라는 바이다.”

장학량이 가족들에게 당부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형(또는 아버지)은 성격이 곧고 미련해 나라를 구하려는 마음으로 일을 도모해 서북에서 일어섰지만 애초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원래 내가 온 것은 나라를 구하고 일본제국주의를 기쁘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오늘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내 한 몸을 남겨 사변을 다시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내가 비록 직접 사람을 죽이진 않았지만 나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 있으니 내가 마땅히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장씨 집안의 자손들이 나라와 가문을 위하고 일본과는 같은 하늘아래 살 수 없는 원수임을 대대로 잊지 말기 바란다. 동생들과 아들 딸 및 조카들 모두에게 전해주기 바란다.”

12월 25일 성탄절, 장개석은 장학량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서안을 떠났고 이튿날 남경으로 돌아왔다. 위원장의 영웅적인 개선에 남경 민중들은 뛸 듯이 기뻐했고 폭죽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면서 전국적으로 위아래를 막론하고 많은 민중들이 환호했다.

일본 역사가 마츠모토 카즈오(松元一男)는 《장학량과 중국》에서 “서안사변에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것은 중국공산당이다. 공산 비적들은 서안사변을 통해 되살아났고 발전해 천하를 얻게 된다.”라고 했는데 이는 사실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장개석이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해졌으니 중국에겐 불행 중에서도 큰 다행이었다. 신은 그를 보우해 죽음의 고비를 넘게 했다.

일본이 전면적으로 중국을 침략했을 때 장개석은 필사의 기개와 초인적인 식견으로 중국을 영도해 5천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호국(護國)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장학량이 영수를 납치하고 병변으로 협박한 것은 사실 죽어 마땅한 죄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며 처벌을 원했고 자수하여 사건을 처리했으니 정세에는 이미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장학량은 일찍이 동북에서 기치를 바꿔 중원대전의 승리에 큰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장개석은 측은한 마음을 품고 그를 사면해 죽이지 않았다. 장개석은 장학량을 후대했고 책을 많이 읽으라고 당부했다.

장학량은 나중에 장개석을 추모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에 대해 “깊은 관심과 정은 혈육과 같았지만 정견의 다툼은 마치 원수 같았다.”고 했다.

장개석은 1937년 간증에서 “사변이 평정되고 반란 두목이 스스로 행동이 거칠고 무책임하여 나라에 재앙을 끼친 거동임을 알고는 몹시 부끄럽고 황송해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께서 77차례 사람을 용서하신 교훈을 따라 당연히 잘못을 고칠 기회를 주었다.”(《예수의 수난이 내게 준 교훈》)

간사한 공산당

전 미국 외교관 제이 테일러(Jay Taylor)는 《장개석과 현대중국》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은래가 연안(延安 중공 근거지)에 와서 보고했을 때 모택동은 장개석이 단지 구두보증만으로 내전을 중단할 것으로 믿지 못했다. 그는 며칠 전까지 손바닥 안에 들어왔던 이 큰 적이 이제 통제를 벗어났으니 신속하고 잔혹한 보복을 받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자 주은래는 장개석은 ‘식언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롱하는 말투(주은래는 이런 품격을 허영심으로 보았다)로 ‘장개석은 스스로 영웅인물이라 자부하니 말을 했으면 반드시 실천할 겁니다.’라고 했다.

모택동은 자신도 전에 이런 식으로 장개석의 천진함을 풍자한 적이 있음을 떠올렸다. 모택동은 장개석에 대해 마치 아큐(阿Q)처럼 자신의 미덕과 진솔함 및 중국의 전통에 대해 환상이 가득하다고 여겼고 중공은 그의 이런 천진함을 잘 이용해야 한다고 했었다. 공산당은 겉으로는 위원장에게 공손하고 존경하는 것 같았지만 내심으로는 조용한 가운데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개석은 확실히 그 어떤 조건도 공개적으로 승낙하지 않았고 신속하게 대군(大軍)을 동원해 연안을 포위했다. 당시 섬북(陝北)에 있던 중공 홍군병력은 겨우 5만 명에 불과했고 이중 2만 9천650명만 총이 있었고 공군은 아예 없었다. 반면 장개석은 202만 9천 명의 대군을 통솔했고 이중 30만 명이 독일식 훈련을 거쳤으며 8만 명은 독일무기로 잘 무장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그는 314대의 비행기와 6백여 명의 전투기 조종사들이 있었다. 에드거 스노우(Edgar Snow 친중공 성향 미국 기자)는 심지어 ‘그가 안전하게 위험에서 벗어나 후 전 국민의 지지가 아주 높아서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그의 지위는 하늘의 태양과 같았고 중국 현대사에서 그 어떤 지도자보다 월등했다.’라고 했다. 민의를 말하자면 이는 공격을 발동할 가장 좋은 시기였다.”

“하지만 장개석은 주은래의 예견처럼 약속을 지켰고 공비토벌을 중단했다. 심지어 매달 230만 위안의 자금을 중공부대에 지급했다.”

“국민당 중앙위원회는 통일전선에 대한 서명을 거절하고 반드시 반공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다시 주장했다. 적지 않은 중앙위원들도 여전히 공산당보다는 일본과의 합작이 중국 주권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고집을 부려 서북의 홍군 근거지에 대해 무역을 개방하고 일부 우편업무를 재개하게 했다.”

장개석은 중공 당원들도 중국인이니 나라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중공에 대해 성의를 표시한 것이다.

“나는 당시 공산당이 잘못을 뉘우치고 공동으로 외침을 막으려는 성의가 있다고 실제로 믿었다. 아울러 내가 줄곧 비적의 군대를 토벌한 의도는 중공당원도 중국인이라 결국에는 중국을 사랑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단지 정부에서 적당한 제재를 가하기만 하면 그들을 명령에 따르게 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무장 폭동을 포기하기만 하면 다른 정당과 마찬가지로 합작해서 혁명구국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고 여겼다. 때문에 민국 19년(1931년) 비적토벌을 시작할 때부터 25년(1936년) 중단할 때까지 공산당에 대한 나의 방침은 줄곧 토벌과 위무를 병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함께 국난에 대처하자는 공산당의 이번 선언이야말로 우리 정부의 정성에 감화한 실제적인 효과라고 보았다. 당시 일반적인 애국 지식인들들도 이것을 정부 정책의 성공이라고 믿었으니 다시 말해 민족항전이 승리할 조짐이라고 여겼다.”

“뜻밖에도 공산당의 이후 행동은 그들이 한 약속과는 정반대였다. 이는 실로 나의 믿음이 너무 컸기 때문인데 끝내 중대한 좌절을 겪어야 했고 또한 공산당 무리는 필경 공산당 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입증했다. 그들은 소위 조국을 사랑한다거나 민족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었다. 저 공산당 무리는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었고 심지어 공산주의 조국인 소련을 위해서라면 나라가 망하거나 민족이 멸종되거나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다. 이 사실이 주는 엄중한 교훈은 비록 나 개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치욕이었지만 오늘날 자유세계의 반공투쟁에 대해서는 공헌한 가치가 없다고 할 순 없다.”(《중국안의 소련》)

“중공은 전 당원들에게 비밀공고를 발표해 통일전선은 책략에 불과하며 항일을 구실로 천백배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진정한 목표라고 했다. 장개석 역시 이 공고를 보았다. 그는 이것이 ‘공산당의 간사함을 드러낸 것’이라 여겼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관점을 공개적으로 알리지 못했고 계속해서 중공을 충성심을 가진 어린 동생으로 대했다. 그는 또 군벌세력을 약화시키려던 노력도 포기하고 오직 항일준비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에게는 전국적인 단결과 소련의 군사원조가 필요했다.”(《장개석과 현대중국》)

중공은 ‘약속실천’을 보여주기 위해 새로운 토지몰수 정책은 중단했지만 그렇다고 이전에 차지했던 토지를 돌려주진 않았다. 또 반(反)국민당 선전을 중단하고 손중산의 삼민주의를 옹호했다. 스노우의 관찰에 따르면 이런 변화가 “중공의 기본이론과 방안 내지는 자주적인 지위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장개석은 이 일체에 대해 마음속으로 다른 계산이 있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