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민족의 죄인
3월 이극농(李克農)과 장학량의 첫회담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이미 군통(軍統 역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의 준말로 정보기관에 해당)에 의해 탐지되었다. 당시 동북군 67군 내부에 잠복한 군통 유종한은 자신이 모은 정보를 대립(戴笠 군통 책임자)에게 보고했고 여기에는 두 사람이 달성한 구체적인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67군 내부에서 배포된 중공의 ‘중공소비에트정부와 중국공산당이 항일구국을 위해 전체 동포에게 알리는 글’ 역시 대립에게 보내왔다.
대립은 이 정보를 장개석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그는 이 내용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해 조사를 계속하게 했다. 이후 장학량의 비서와 막료로 있던 송려(宋黎), 유란파(劉瀾波), 마소주(馬紹周), 손달생(孫達生) 등 4명의 공산당 분자들이 학생운동을 선동하자 성(省) 당부(黨部 국민당 위원회)에서 장개석의 명령에 따라 이들 네 명을 체포했다. 그러자 장학량이 동북군을 파견해 당부를 습격하고 공산당원 및 비밀 자료들을 빼앗아갔다.
1936년 12월 4일 장개석은 서안에 와서 장학량, 양호성과 공비토벌에 대해 상의했다. 이때 장학량, 양호성 등은 사사로이 중공과 내통해 어떻게 장개석의 비적토벌 계획을 역전시킬 것인지 상의했고 소련에 의존하고 중공과 연합해 서북을 할거할 생각을 했다. 이에 앞서 장학량은 여러 차례 장개석에게 서북 공비토벌을 포기하라고 ‘간언’했다.
하지만 장학량의 ‘연공항일(聯共抗日 공산당과 연합해 일본에 대항)’은 장개석의 반대에 부딪혔다. 장개석이 보기에 중국에서 내란을 제거할 최후의 시각이 눈앞에 다가왔다. 반면 장학량의 주장은 오직 나라에 해를 끼칠 뿐이었다. 장개석은 자신의 의형제가 이미 비밀리에 중공에 가입신청서를 냈다가 코민테른에 의해 거부당한 사실을 몰랐고 공산당의 책동하에 장학량이 모반을 꾀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양호성은 장학량과 모의했다. “드디어 장공(蔣公)이 서안에 오면 우리는 천자를 옆에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여천재는 장학량에게 “사자가 되라”고 권했는데 다시 말해 스스로 자립해 장공을 배반하라는 뜻이다.
장개석은 ‘서안 반달의 기록(西安半月記)’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12월 11일…여천재 등이 갑자기 나를 만나러 왔는데 사전에 약속이 없어서 아주 갑작스럽게 여겼다. 그는 담화 도중 공비토벌 방침에 대해 회의를 표시했는데 어제 한경(漢卿 장학량)이 어제 했던 말과 같은 맥락이었다. 나는 그가 독해 받은 것이 이미 심각함을 알고 통렬히 꾸짖었다. 이날 저녁에 장학량, 양호성, 우학충(于學忠 동북군 장성) 및 수하 장령들과 함께 행영(行營 야전사령부)에서 회식하며 토벌계획에 대해 상의하기로 했다. 아직 양과 우가 오지 않았는데 한경의 오늘 행색이 몹시 바쁘고 정신이 없어 보여 나는 아주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마 어제 나한테 꾸중을 들어 기분이 나쁜게 아닐까? 아니면 이미 내가 여천재를 꾸짖었단 말을 듣고 불안한게 아닐까?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런 생각을 했지만 끝내 그 원인을 확실히 알진 못했다. 시간이 늦어서 그냥 두었다.”
12월 11일 저녁 여천재는 임동(臨潼)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고 얼마 후 장학량의 전화를 받았다. 그가 서둘러 장학량의 공관에 달려왔을 때는 이미 10시가 훨씬 넘었다. 장학량은 문을 열고 산을 바라면서 자신의 결심을 분명히 밝혔다. “며칠 전 자네가 나더러 순한 양이 되지 말고 사자가 되라고 하지 않았나? 이제 대답하겠네. 오늘부터 나는 사자가 되려하네.”(《항일전쟁연구(抗日戰爭研究)》 2000년 3월)
12월 11일 저녁, 장학량과 양호성은 원래 계획에 따라 납치행동을 진행했다. 각각 동북군과 17로군 고급 장령들을 만난 후 다음날 새벽 소위 ‘병간’(兵諫)을 진행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구체적인 배치는 숙소인 화청지(華淸池)와 서안에서 임동 사이의 경계병 포위는 동북군이 맡고 서교(西郊)시내와 농해로(隴海路)의 서안역과 서교비행장 및 중앙 헌병・특무・경찰 및 상술한 지역에 주둔한 중앙군의 무장해제를 포함해 비행기 억류 서경(西京)초대소 및 각 지역의 남경 군정대 억류는 모두 양호성이 지휘하는 17로군이 맡기로 했다.
12월 12일 새벽 5시 반, 장학량의 동북군이 장개석의 행영으로 들이닥쳤고 위원장 경호부대가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전투경험이 풍부했던 장개석은 총소리를 듣고 앞문과 측면에 반란군이 있지만 오직 뒷면에만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비서의 보호 하에 창문을 넘었고 뒷문을 통해 담을 넘어 여산(驪山)위로 올라갔다. 동북군은 한참을 공격해도 이기지 못하자 장개석이 도주했을까 몹시 두려워했다. 이에 경기관총을 맹렬히 난사해 총알이 비처럼 쏟아졌고 문과 창을 뚫고 실내로 들어왔다. 장개석을 호위하던 67명의 경호원들이 난을 당했다. 반군은 산을 수색한 후 장개석을 납치했다.
서안에서 발생한 병변(兵變)은 중국은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호적(胡適), 주자청(朱自清), 풍우란(馮友蘭), 문일다(聞一多) 등 저명인사들이 앞을 다퉈 장학량과 양호성이 “항일을 구실로 스스로 장성(長城)을 무너뜨려 국가와 민족의 죄인이 되었으며 통일을 파괴한 죄악이 분명히 드러났다”며 비난했다. 12월 20일 발표된 ‘장학량의 국가배반’이란 문장에서 호적은 이렇게 말했다. “장개석 선생은 지금 중국의 중요인물이며 정말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중요인물이다.”
저명한 언론인 장계란(張季鸞)은 ‘서안군인사회에 보내는 공개편지’에서 “전 세계 국가들이 모두 그를 대중(對中)외교이 중심으로 간주한다. 이런 인재 및 지위와 명망은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없고 또 그런 인재를 다시 배양할 기회도 없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들 중에서 이 사건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국민정부는 남경에서 병력을 준비해 장학량 양호성의 반군을 토벌할 준비를 했다.
층층이 팔아넘기다
공산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층에서 저층의 희생을 대가로 한다. 코민테른과 소련은 공산당 전체의 이익을 위해 중공의 국부적인 이익을 희생시켰고, 중공은 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장학량을 희생시켰다.
처음에 중공은 뜻밖의 이 사건에 대해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며 적극적으로 장개석을 죽일 것을 주장했다. “우리는 이들 중공 중앙 책임자들이 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모두들 만약 장 씨를 살려둔다면 우환을 남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여겼다. 어떤 사람은 인민재판을 통해 이 반공 원흉을 죽여 후환을 없애자고 했다. 어떤 이는 엄밀하게 구금해 인질로 삼고 남경 정부 측에 항일을 강요해 서안의 군사적 우세를 만들자고 했다.”
(장국도,《나의 회억》)
하지만 스탈린은 이 사건이 소련에 재앙을 초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만약 장개석이 피살된다면 하응흠과 왕정위가 친일정부를 구성할 가능성이 아주 커지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급히 중공에 전보를 쳐서 소련은 이 음모에 찬성하지 않는다—이는 일본인이 배후에서 책동한 것임을 암시한다—고 명확히 표시했다. 그는 모택동에게 장개석과 우호적으로 대화해 평화적인 해결방안을 찾고 국민당 영수를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후 모택동, 주은래, 주덕은 전국에 통지해 중공은 ‘서안사변’의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며 그 어떤 경솔한 행동도 “오직 일본인의 뜻대로 될 뿐”이라고 선포했다.
이틀 전에 떠났던 주은래가 다시 나귀를 타고 연안으로 달려와서는 비행기를 타고 서안에 갔다. 그는 장학량을 보자마자 “(장개석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려선 안 된다.”고 했다. 원래 장학량과 반장(反蔣) 밀약을 맺었던 주은래가 이제와서는 도리어 중국은 장개석의 영도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스탈린과 코민테른은 위원장(장개석)이 계속 중국을 영도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주은래는 14일 장학량과 밀담을 나눈 후 소련은 대체적으로 서안을 원조하지 않을 것임을 표시했다. 장학량의 최초 반응은 몹시 분개했다. 그는 자신이 마치 공산당을 위한 매국노가 되었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중공이 소련의 원조를 받을 수 있다고 부추겨놓고는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태에서 출전을 앞두고 다리를 걸면서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1년 후인 1939년 12월 왕명(王明 친소련 중공지도자)이 모스크바에서 연안에 왔을 때 우리에게 이 전보의 내력에 대해 설명해준 적이 있다. 그는 서안사변 이후 영국과 미국 등 각국의 모스크바 대사들이 일찍이 소련외교부에 이 사건에 대한 소련정부의 태도를 문의한 적이 있다고 했다. 당시 소련 외교부는 이것은 일본의 음모이며 소련은 사전에 이런 일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 찬성하지도 않는다고 답변했다. 뒤이어 스탈린이 직접 초고를 써서 중공에 전보를 보냈고 또 왕명에게 해명하길 대체적으로 장학량은 그릇이 크지 못한데 어떻게 전국 항일의 영수가 되겠는가 중공 역시 단기적으로는 항일을 영도할 능력이 없다고 했다. 장개석은 비록 가증스런 적이지만 그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희망이 있는 항일영수로 항일 중에서 그는 아마 우리의 협력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장국도,《나의 회억》)
“장문천(張聞天 역주: 전 중공 총서기)은 전에 내게 ‘이것은 코민테른과 소련의 전체적인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중공의 국부적인 이익을 희생한 것’이라고 지적했다.”(장국도,《나의 회억》)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