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장대산(張大山 대만 수련생)
【정견망 2003년 10월 19일】올해 연초에, 나는 “전 세계적으로 대륙의 청화(淸華)대학 출신 제자들을 구원하는 활동을 협조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정법수련은 엄숙한 것인 바, 자신은 이 기간 수련에서 확실히 착실하게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정진하기위해 노력해왔다. 그 당시, 나의 전반적인 상태는 확실히 좋았다. 법공부를 함에 있어서, 질 과 양을 거의 같이 중히 여겼으며,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어 연공을 하였다. 매일 시간을 좀 내어 사상 중의 좋지 않은 사상, 생각과 업력을 제거하였는데 어떤 때는 거의 반시간 씩 하였다. 시간이 있기만 하면 발정념을 연장하여 지속적으로 1시간을 하였다. 이러한 상태하에서 거의 앉아서 연공을 하거나 발정념을 할 때면, 조용해질 수 있었는데 잡념과 교란도 모두 머리 속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법을 외울 때, 마치 신(神)이 돕고 있는 듯 하였다. 어떤 때, 심지어는 20분이면 사부님의 경문 한 편을 외울 수 있었고, 사상 중에는 항상 사부님의 법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수련은 말하기는 쉽지만 하려면 어려운데, 자신은 그래도 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고험(考驗)이 잇달아 찾아왔다. 박사시험이 점점 다가왔고, 석사졸업을 위한 구술시험도 잇달아 다가와 나는 바빠서 어쩔 줄 몰랐다. 점점 법공부가 적어졌고, 발정념이 적어졌으며, 자기 청리(淸理)가 적어졌고 연공도 적어졌다. 그러니 진상알리기는 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낡은 세력은 바로 이렇게 당신이 조금이라도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는 당신 사람표면에 떼어버리지 못한 관념과 업력, 당신이 발견하지 못하는 마난으로 당신 수련 중의 정념과 확고함을 침식시킨다.
하루에 법공부가 10분간 적어진다면, 반 달 후에는 가능하게 한 시간이 적어질 수 있고, 하루에 한 장 공법을 적게 연마한다면, 반 달 후에는 가능하게 한 장 공법만 연마해도 만족해 할 수 있으며, 하루에 진상을 반시간 적게 말한다면, 반 달 후면 가능하게 진상을 하루만 한 것과 같을 수 있다. 오로지 정념이 부족하기만 하면, 늘 천 가지 이유가 따르는데 나는 바쁘다고 한다. 혹은 그래도 법공부와 발정념을 한다고 자신을 속인다. 이런 식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법공부 시간은 한 시간으로 줄었고, 심지어는 한 시간도 안 되었다.
법공부와 발정념이 공적인 사업(公事)을 보는 식으로 변질되었다. 수련은 엄숙한 것인바 속인의 사업의 아니다. 일단 사업으로 변 한 후, 수련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으로 변한다. 이때 나는 마치 수련인에서 점차 속인의 거센 흐름(洪流)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 했다. 사악의 교란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어떠한 누락이 있는 마음도 모두 사악이 뚫고 들어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5월, 6월 두 달 동안, 나는 전례 없는 저조(低潮)에 빠졌는데, 법공부가 적어질수록 상태가 더 나빠지는 일종의 악순환을 형성하였다. 예전에는 잘 넘기던 고비도, 지금은 전혀 넘기지 못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예전에 암기했던 법이 지금은 왜 한 글자도 생각나지 않는지? 씬씽(心性)도 지킬 수 없었으며 사부님의 법신상은 더욱 감히 볼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나는 속으로 사부님께 물었다. “사부님, 저는 안되는 건가요?” 나는 마치 빈 껍데기만 남아 있는 듯 했다. 나도 자신이 이미 대오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한심한 상태에서도 법공부를 해야 하고, 정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오늘 후회를 하지만, 그 다음 날 지나면 같은 일이 또 다시 반복되었다.
속인 중의 압력은 거의 나로 하여금 신심(信心)을 잃게 하였다. 나는 마치 사악에게 머리를 숙이고 보증(保證)을 쓴 듯 했다. 마지막에는 심지어 자포자기하면서 생각하기를 “그만두자! 어째든 박사시험과 석사논문을 다 해놓고 보자. 속인의 일을 잘 원용(圓容)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원용인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속인 중의 명예를 구하는 것이었다. 전반 사람은 이미 이런 상태에 이를 정도로 마비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법수련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 法은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고, 法은 일체 사악한 것을 타파할 수 있으며, 法은 일체 거짓말을 제거해 버릴 수 있고, 법은 정념(正念)을 확고하게 할 수 있다. ” ( <<정진요지(2)>> “교란은 배제하자”)
내가 머리가 멍해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을 때나, 방황하고 있을 때는, 먼저 법공부를 하자, 법공부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줄 수 있으며, 법공부는 내가 다음에 어떻게 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다. 줄곧 우리는 이렇게 뚫고 나아갔던 것이 아닌가? 오로지 법공부를 해야 만이 우리가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있는데 이번에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한 차례 법공부 중, 우연히 다음과 같은 경문을 보았다. <<법륜불법(뉴질랜드법회에서의 설법) >>중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기를, “이미 대법을 만난 이상, 그것을 상관해서는 뭘 하겠는가?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지금은 숨이 붙어 있고 정념이 있지 않는가? 대법 중에서 수련하라. 예를 들면, 당신이 정말 기타의 부분을 지켜내지 못 할 때, 최저한도로 정념 이 한 부분만은 지켜낼 수 있지 않는가! 하물며 당신은 장래에 원만해야 하는데 그러한 일들을 상관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당신은 이런 일들에 되게 집착하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대해야 한단 말인가?” 이 문장은 나에게 몽둥이 한 방을 맹렬하게 갈겼다. 사부님께서는 <<2003년 정월 대보름 미국서부법회에서의 설법>> 중에서 “잘못하였으면 어디에 잘 못하였는가를 보아야 하는데 알았다면 다음 번에 다시 잘하면 된다. 넘어진 후, 그냥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대체적인 뜻 임) 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렇다! 수련인은 바로 고생 중에서, 어려움 중에서 자신의 위덕(威德)을 세우는 것이다. 집 안에서 차를 마시고 다리를 꼬고 앉아 수련되어 올라 온 사람은 없다. 다른 한 방면으로 놓고 말하면, 만약 당신이 기장 어려울 때, 걸어 나오지 못한다면, 사실 가장 편안할 때에도 당신은 마찬가지로 걸어 나오지 못한다. 진정한 수련은 바로 당신이 마난(魔難) 앞에서 불법(佛法)을 선택하는가 아니면 집착(執著)을 선택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보기에는 깨달은 듯 하였으나 나는 여전히 기어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자비로운 사부님께서는 줄곧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으며 늘 내 신변에서 온갖 방법을 쓰시면서 나를 잡아당기셨다. 사부님께서 시카코 설법을 하신지 얼마 안되었을 때, 나는 꿈에서 사부님을 뵈었다.
깨어난 후, 나는 지금의 대법제자들은 마땅히 주동적으로 가서 사악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왜 나는 많은 시간 낡은 세력에게 엄중하게 박해받고, 심지어 끌려 다니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시시각각 법으로 자신의 언행을 대조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법으로 자신의 언행을 대조해 보지 못했을 때, 시시각각 낡은 세력의 통제 속에 있었던 것이다. 난(難) 중에 있을 때, 그 당시에 자신이 사부님의 법을 생각할수만 있다면, 사부님의 한 마디 말씀이라도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곧 바로 정법수련 중에 있는 것이다.
나는 또한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시시각각 24시간 정념(正念)을 유지하라고 하셨음을 깨달았다. 예전의 나는 늘 이것이 불가능하며 최저한도로 잠은 자야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때 나는 이미 낡은 세력의 소굴에 들어섰던 것이다. 대법제자는 마땅히 시시각각 정념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깨달은 후, 나는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존(師尊)이시여! 제자는 예전에 잘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당신께 엄정성명(嚴正聲明)을 발표합니다. 이후, 꼭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표준에 도달하겠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포용 하에 나는 깨어났다! 깨달았으면 해야 한다! 이리하여 나는 될수록 자신에게 법공부와 발정념을 대량으로 할 것을 요구했다. 사부님의 최근 설법과 해법을 가급적 외웠는데 더욱이 겨냥성이 있는 부분을 외웠다. 내가 거의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때면, 자신에게 묻곤 하였다. “너는 사부님께 뭐라고 결심하였으며, 사부님께 뭐라고 말씀드렸었는가? 너는 지금 또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즉각 법을 한 번 외운다. “사부는 때로 당신들이 한 그런 일을 볼 때 정말로 아주 상심한다. 그러나 정말로 나보고 당신을 포기하라고 하면 사부도 정말로 마음이 아프다. 정말로 쉽게 당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도 향상(上進) 할 줄 모른다! 그렇게도 분발할 줄 모른다. 또 대법에게 먹칠을 하고 있으며 “인(人)” 글자에 마저도 부족한 일을 하고 있는데 당신이 말해보라. 당신은 그래도 당신이 대법제자라고 말하는가!” ( <<대 뉴욕지역법회에서의 설법과 해법>> ) “오늘날의 인류는 사실 정법이 아니라면 일찍이 훼멸되었을 것이다. 인류의 사상 표준은 이미 지옥아래에 있다. 법을 바로 잡기 때문에 나는 삼계 내 일체 중생의 죄를 속죄하였다. (박수) 그럼 여러분 생각해 보라. 우리 수련생들로 말하면, 내가 당초에 당신들을 지옥으로부터 건져온 것과 같다. (박수) 나는 정말로 당신들을 대신하여 당신들이 저지른 천백 년의 죄를 감당하였다. 단지 이러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나는 이로 인하여 또 당신들을 신으로 제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나는 당신들을 위하여 온갖 고심(苦心)을 하였으며, 동시에 당신들이 그처럼 높은 신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에게 그처럼 높은 신의 영예와 당신들에게 그처럼 높은 층차에서 갖춰야 할 일체 복을 주려고 한다. (박수) 천지개벽이래 어떠한 신도 감히 이처럼 하지 못하였고, 역시 여태껏 이러한 일이 있어본 적 없다. ” ( <<2003년 정월 대보름 미국서부법회에서의 설법>> )
사부님께서 우리들에게 쏟아 부은 고심(苦心)과 간곡한 기대를 생각하면 자신이 잘하지 못할 이유가 또 무엇이 있겠는가? 워싱턴 DC법회 전, 가부좌를 하던 중, 사부님께서 내 곁에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되었다. “네가 나와 체결한 약속은, 단지 이것뿐만이 아니다.” 나는 사부님의 간곡한 눈길을 보았고 사부님의 기대시하는 말을 들었다. 가부좌 중, 자신이 이전에 잘하지 못한 일들이 떠올랐다. 나는 고통스러워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괴롭고 후회스러웠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깊이 미혹 속에 빠졌었던가? ! 사부님께서는 《대 뉴역지역법회에서의 설법과 해법》중에서 “매 개인이 자신의 길을 잘 걷지 못하면, 자신에 역사에 오점을 조성할 수 있으며, 자신의 미래에 보충할 수 없는 손실을 조성할 수 있다.”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속으로 말하기를 “사존이시여! 제자는 지금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정법을 하려는 마음만 가지고 왔습니다. 제자는 한때 빗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꼭 당신과의 사전의 서약을 실행하겠습니다!” 하면서 나는 자신이 주불(主佛)과 서약을 체결하는 장면과 엄정성명을 발표하던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천상이든 인간세상이든 지간에, 주불(主佛)과 체결한 서약은 조금도 에누리가 없는 것이다!
법회에서 나는 사부님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지녔다. 이 몇 년 래의 수련은 한 막, 한 막의 광경이 되어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역사의 장래에 이 한 막, 한 막의 정법의 길은 바로 우리들이 중생에 대해, 새로운 우주에 대한 책임의 견증(見證)이며, 우리들이 홍대한 대궁(大穹)의 역사 중, 사부님 및 중생들과 사전에 체결했던 서약의 실현이다. 나는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어디서 잘못하였으면 바로 그곳에서 일어나야 한다!
이 중에서 나는 더욱 똑똑히 깨달았다. 법공부는 단지 사람 이면에서 알고 있는 우주 특성에 동화되는 것만이 아니다. 사실상, 당신이 법공부를 하기만 하면, 법은 마치 보호막과 같이 당신을 감싸는데, 사악은 당신에게 접근하지 못한다. 아무리 미세한 고험이 올지라도 우리는 모두 법으로 가서 대조하여 가장 정확한 선택을 해야 한다.
나는 예전에 늘 짜투리 시간에 법공부를 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렇게 법공부를 하면 효과가 한정된다고 생각하여 연속으로 통독할 수 있는 시간을 찾아 법공부를 하였다. 지금 발견해보건대, 원래 그것은 바로 내가 어려움 속에서, 시간이 긴박한 중에서 견정(堅定)할 수 없었던 한가지 원인이다. 사실 대법은 원용한 것이다. 마음이 법에 있기만 하다면 법의 위력은 어디에서든 모두 나타난다. 만약 이렇게 바싹 틀어쥐지 않으면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아주 많은 미세한 일들, 작기로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상, 아마 다만 다른 사람의 한 마디 말일지라도 그 한 마디 말이 곧 당신의 정념을 동요시킬 수 있으며, 가능하게 당신으로 하여금 끝까지 떨어지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정말 시시각각 신변의 사물들에 주의해야 한다.
정법 중에서 나타난 일체는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미혹 중에서 법공부가 적을 때, 사악은 그것을 가지고 쳐들어오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오래되어 일단 마비되면 사악의 박해도 그다지 민감하지 않게 되는데 수련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법공부는 바로 미혹을 타파할 수 있는 관건이다!
이것이 바로 무엇 때문에 순정한 법공부 수련환경이 있어야 하는 이유인데 많은 제자들은 모두 이러한 체득이 있다. 바로 우리들이 단체적인 법공부의 교류, 혹은 대형 법회에 참가하고 난 후, 모두 전반 사람이 껍질이 한 층 벗겨진 듯한 느낌이 있으며, 원래 상태가 좋지 않던 사람도 자신이 정진하고 있으며 변화가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우리의 그 층층의 집착들을 벗겨 우리들의 가장 원시적인 본성을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반드시 법공부를 중시하고 환경을 형성하며 법공부를 하는 속도를 집착에 가려지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하여(역주: 집착에 빠지기 전에 법공부를 한다는 의미이다) 진정으로 원래 가장 순정한 자신을 수련해 내어야 한다.
이 기간에 중국 대사관 발정념에 참여하였다. 발정념에 나서자 사악의 마당이 즉각 앞으로 다가왔다. 잘 닦은 그 한 면이 사악 물질 마당 중에서 큰 작용을 하자 사람의 이 한 면도 따라서 활기를 띠었다. 비록 처음 발정념을 할 때는 잠을 잘 자지 못했지만, 일단 이 교란을 의식하여 연공을 하고 발정념을 하는 중에서 즉각 배제할 수 있었다.
중국 영사관 앞에서 사악은 확실히 매우 사납게 날뛰었는데 조금이라도 사상(思想)이 맞지 않으면 그것은 당신에게 확대시킨다. 친척의 정, 동수사이의 인정(人情), 속인 중의 명리(名利) 등. 당신에게 이런 것들이 있기만 하면, 모두 당신이 발정념을 할 때, 변화해 내보낸다. 마치 연극무대를 연출하는 것과 같이 당신 눈앞에 생생하게 존재하게 한다. 당신더러 그 속에 미혹되어 자신의 관념과 인정(人情)이 장난치는 것을 보게 한다. 음악이 울리기 시작해서야 비로소 발정념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 이것은 내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경문을 생각나게 하였다. <<도법(道法)>> 중에서 사부님께서는 “사실 이것은 사람의 일면으로, 법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으로, 인위적으로 당신들 신(神)의 일면을 억제시켰다. 다시 말하여 당신들이 이미 수련된 그 부분을 억제시켜 그들이 법을 바로 잡음을 저애하였다. ” ” 대법제자로서 당신의 일체는 곧 대법(大法)이 구성시켜 준 것이며 가장 바른 것으로서, 오로지 일체 바르지 못한 것(不正)을 가서 시정할 뿐인데, 어찌 사악에게 머리를 숙일 수 있는가? ” ( <<정진요지 (2) >> “대법은 견고하여 파괴될 수 없다”) 사람 중의 어떠한 마음도 마에게 이용당할 수 있어 우리들의 신의 그 일면을 약하게 할 수 있다. 나는 법공부를 하고 나서 발정념을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후에, 사악이 어떻게 몰려와도 나의 머리 속에서는 똑똑히 알고 있다.
“여래는 진리여의를 밟고 온 이런 하나의 세인의 칭호인데, 진정한 부처는 우주의 보호자인바, 그는 우주 중의 일체 바른 요소를 위해 책임진다” ( <<도항>> “미국 서부법회에서의 설법” ) 법 중에서 우리는 바로 새로운 우주의 일체 바른 요소를 위해 책임지는 대각자(大覺者)이기에 법리를 명백히 한 제자를 사악은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 사부님께서는 <<북미순회설법>>에서 “대법제자가 두 가지 정황 하에서, 그것들은 움직일 수 없다. 하나는 단호하기로 반석과도 같은 것인데, 그것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은 알고 있는바 당신이 낡은 세력이든 좋고, 낡은 이치이든지 좋은데, 이 제자가 바르게 가고 잘 하면, 누가 만약 가서 박해한다면 나는 절대로 그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번에 돌아온 후, 나는 내가 무언가 한가지 이전보다 많아졌음을 알았다. 그것은 바로 확고함(堅定)이다. 사부님에 대해, 법에 대해 승화된 후의 확고함인데 어떠한 것도 대체할 수 없다! 이것은 내가 예전에 부족했던 것이다. 이전에 나는 늘 “자아”를 가장 크게 보았으며, 첫 자리에 놓는 것은 영원히 자신의 승화와 원만이고 법이 아니었지만, 나 자신은 여전히 승인하기 싫어했다. 지금에야 비로소 정법 중에서 “자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자아가 없으면 넘기지 못할 고비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내가 넘어진 후에 기어 일어선 심득(心得)으로 동수(同修)들과 교류하는 바이다. 대법제자는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후,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
<<2003년 워싱턴 DC 법회에서의 설법>> 중의 한 단락으로 여러분과 함께 격려하고자 한다. “무엇이 대법제자인가? 대법제자란 가장 위대한 법이 만들어낸 생명이며, (열렬한 박수) 견고하기로 반석 같고 금강불파(金剛不破) 한 것이다.”
발표시간:2003년 10월 19일
문장분류: 정법수련>수련체오(修煉體悟)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3/10/19/240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