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양숙평(梁淑萍)
【정견망 2007년 12월 6일】
1. 습관을 버리고 단체 법학습에 녹아 들어가
과거에 나는 줄곧 단체 법공부에 참가했는데 모두 동수 몇 명이 모이는 작은 교류였다. 비록 비교적 큰 단체 법공부에 참가하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집에서 멀고 또 시간이 맞지 않아 늘 이렇게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섬에 사는 어느 동수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사는 곳은 대법제자가 자기 혼자밖에 없어 몇 년동안 동수와 교류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연공이 수련이라고 오인하였다. 나중에 대만에서 일 년을 살면서 독서회에 참가한 후에야 비로소 대법제자는 법공부 외에도 발정념하고 진상을 알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대만을 떠나기 전날 의미심장하게 사람들에게 이런 좋은 수련환경을 소중히 여기라고 한 말이 내게 감동을 주었다. 만약 내가 대법제자가 한명 밖에 없는 환경에 놓인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대만은 도처에 연공장이 있고 도처에 독서회를 찾을 수 있으나 나는 오히려 이런 환경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구실을 찾았는데 바로 집에서 가깝고 시간이 맞아야만 비로소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수련을 시작한 이후 근시 도수가 해가 갈수록 감소했다. 한번은 아이를 데리고 시력검사를 하러 가서 나도 재미삼아 검사를 했는데 또 좋아져 있었다. 원래 325도 였던 것이 300도가 되었다. 의사는 나더러 새 안경을 쓰라고 했다. 새 안경을 써보니 어쩐지 느낌이 분명하지 않았는데 의사는 비록 도수가 300도 이긴 하지만 눈이 이미 장기적으로 325도 안경에 습관이 되어 옛날 안경을 써야 한다고 했다. 의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모두 이미 습관이 되었군요.” 나는 사존께서 그의 입을 빌어 점화하신 것임을 깨달았다.
무릇 일은 습관이 되면 안 된다. 자연스럽게 습관이 되면 마비되어 정진하지 못한다. 몇 년 동안 작은 독서회에 습관이 되어 교류하는 동수들이 적고 장기적으로 가다보니 심성의 제고에도 한계가 있었다. 소형 독서회를 중단했을 때는 간혹 근본적으로 혼자 수련하는 상태였다. 부지불각 중 이런 상태에 이미 습관이 되어 돌파하려고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환경”은 매우 귀한 것이다.
사존께서는 『아태지역 수련생 회의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단체 법공부는 내가 당신들에게 열어 놓은 일종의 환경이자 남겨 놓은 이러한 형식이다. 내 생각에 여전히 이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실천 속에서 걸어 온 것으로, 이렇게 수련하면 수련생들이 가장 빨리 제고할 수 있다. 혼자서 수련하면 제고하는데 촉진하는 요소가 없다.”
흔히 더 많은 사람이 단체 법공부에서 교류하고 더 많은 동수들이 법에서 체험을 말하며 그 장을 원용한다면 개인의 사상이 계발 받는 깊이와 넓이가 더욱 크다.
이 점을 깨달은 후 나는 돌파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전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던 대형 독서회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독서회 당일, 분명 차로 반시간이면 갈 수 있는 길이었음에도 나는 오히려 길을 잃었다. 나는 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저는 길을 잃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 길은 제가 인정하고 깨달은 것이니 반드시 노력해서 걷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미로에서 벗어나 독서회를 찾을 수 있었다.
2. “마지못해” 전화를 걸다
내가 참여한 비교적 많은 정법항목은 뒤에서 간접적으로 진상을 알리는 일이었다. 뒤에서 하는 일을 오래하자 중생구도에 대한 긴박감이 부족하기 쉽다. 한번은 전화 팀 동수와 함께 식사를 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전화진상을 해왔고 매우 정진하는 동수였다. 나는 몇 년간 전화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드문드문하여 견지하지 못했는데 한번 중단하자 다시 전화기를 들 때 더욱 곤란을 느꼈다. 거의 마지못해 전화를 건 셈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중 한 동수가 말했다. “아주 정상입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마지못해” 전화를 하고 있답니다.” 나는 매우 놀랐는데 매일 전화를 하는 동수 역시 이런 느낌이 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말인가요?” 그는 말했다. “그럼요. 하지만 나는 마지못해 하는 느낌이 좋습니다. 모두 자신의 집착심을 버리는 것이니까요.”
그날 집에 돌아와 밤새 잠을 못 이루고 내내 이 한마디를 생각했다. “왜 나는 마지못해 전화를 거는 것을 두려운 일로 생각했는데 남들은 오히려 같은 느낌을 심성을 고험하고 층차를 제고하는 좋은 기회로 여기는가? 차이가 너무 크지 않은가?” 그날 밤 나는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고 속으로 생각했다. “날이 밝으면 반드시 전화를 걸어야 겠다. 다시는 도망가지 않겠다!”
그때 이후 나는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내가 전화를 거는 것에 대해 구세력의 교란이 때때로 나타났다. 한번은 휴대폰에 전기가 없어 충전하려고 하다가 깜짝 놀랐다. 집에 있던 5대의 충전기가 전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탁자 위는 텅 비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냉정해진 다음 나는 이것이 구세력의 교란임을 깨달았다. 아마 내가 전화하려는 결심을 고험하는가 보다 생각했다. 휴대폰으로 걸 수 없다면 그럼 집 전화로 하자. 비록 전화요금이 좀 비싸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남은 전화번호를 다 걸었다. 밤에 남편이 돌아와 말하기를,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충전기를 모두 직장에 가지고 가서 충전했다고 말했다. 나는 듣자마자 이것은 불합리한 논리라고 느꼈다. 충전기 모델이 다 달라 내 충전기로는 남편의 휴대폰을 사용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정념을 강하게 하여 전화 거는 것을 더욱 견지했다.
나는 보통 낮에 학교에 있을 때 여가 시간을 이용해 전화를 한다. 한번은 몇 개의 전화번호를 내려 받아 마지막 한통을 걸었는데 시계를 보니 수업이 끝날 시간이 되어 계속 걸까 말까 망설였다. 수업이 끝나면 전교에서 방송이나 음악이 나오고 게다가 초등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매우 시끄럽기 때문에 이런 잡음 속에서 전화로 대화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걸지 않으면 진상할 기회를 놓칠까 염려되었다.
사부님께서는 『2005년 샌프란시스코 법회』에서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는 이미 거의 각 지역에서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이것을 고려한 후 나는 전화를 걸기로 했다. 전화를 걸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고 방송이 나오기 전에 빨리 탈당을 시키려고 나는 진상을 아주 빨리 말했다. 그 후 관건적인 내용을 말했다. “만약 당신이 당이나 단, 대에 가입한 적이 있으면 제가 당신을 도와 아명으로 탈당하도록 도와주겠습니다. 하시겠습니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좀 다급해져서 몇 차례 물었다. “하시겠습니까?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이 때 전교에 방송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음악이 울렸는데 소리가 커서 나는 상대방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고 그가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고민했다. “전화를 끊고 잡음이 작아지면 다시 할까?” 결국 나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상대방의 반응을 들을 수 없었으므로 혼잣말 한 것으로 치자 하고 반복적으로 원고를 두 번 읽었다. 바로 이 때 시끄러운 음악 중 한 소절 사이에 갑자기 소리가 낮아지는 순간이 있었다. 나는 이 기회를 붙잡고 얼른 말했다 “방금 제가 한말을 알아들으셨어요? 탈당해 드릴까요?” 몇 초가 조용히 지난 후 매우 낮은 목소리로 답하는 것이 들렸다 “좋습니다.”
바로 그 후 매우 시끄러운 음악이 또 울리기 시작했다. 그 한마디에 나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런 환경의 충돌 속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포기할 생각을 했다면 나로 말하자면 단지 전화를 끊는 것과 수화기를 잡고 통화하는 차이에 불과하지만 전화를 받는 상대방으로 말하면 내가 전화를 끊으면 그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같고 그가 구도될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니 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그때부터 나는 다시는 내가 하루에 몇 명을 탈당시켰는가 기뻐하지 않았고 진정 내심에서 우러나와 상대방이 악당에서 탈퇴하여 도태를 면하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위안을 느꼈다.
매일 “마지못해” 전화를 걸긴 했지만 다시는 도망가지 않았다. 또 “마지못해” 전화를 거는 느낌이 갈수록 가벼워졌고 두려운 마음도 날이 갈수록 적어졌다. 나는 내가 전화로 진상을 시작한 것이 아주 늦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북미순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정법 이 일은 아직 결속되지 않았는바 여러분을 놓고 말하면 모두 아직 다시 새롭게 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오로지 박해가 하루 끝나지 않으면 그 하루는 바로 기회이다.”
이전에 나는 늘 자신의 오성이 괜찮다고 느꼈는데 지금 보니 오성이 너무 차하여 몇 년 전에 마땅히 해야 했던 일을 내내 깨닫지 못하고 잘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사존의 자비로 제자에게 다시 잘할 기회를 주셨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더 좋을 때일수록,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는데 기연(機緣)도 더 적어지게 된다.” (『2003 캐나다 밴쿠버 법회 설법』) 그러므로 정말 사람에서부터 걸어 나와 갈수록 사람의 관념을 버려야만 비로소 보다 많은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3. 문장을 쓰는 중에 승화
처음 문장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대부분 수련 심득이었는데 명혜망에 투고하여 많이 게재되었다. 나는 마치 내가 쓴 것이 괜찮은 것 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우리 지역에서 홍법활동을 하는데 나더러 보도문장을 쓰게 했다. 나는 매우 피동적이었고 그다지 진지하지 못했다. 다른 동수들은 활동이 끝나면 일이 없고 집에 돌아가 법공부하고 휴식하는데 나는 또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몇 차례 원고를 보냈음에도 다른 동수들이 보고는 내용이 너무 짧고 글이 풍부하지 않으니 다시 쓸 것을 요청했다. 나중에야 나는 깨달았다.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사실 사심(私心)이 장난을 친 것임을. 다른 사람들이 법공부하고 휴식하는 것을 보고 나도 가서 하려고 하는데 마치 법공부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책임을 미루는 것으로, 간단한 것을 골라서 하고 어렵거나 번거로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도 역시 법을 실증하는 것으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몇 년 동안 글을 썼으나 대기원에는 글을 쓰지 않았다. 수련심득을 오래 썼기 때문인지 “속인에게 친근한 것”을 쓰려면 무미건조하여 쓰기가 아주 힘들었다. 그러다 한 차례 기연이 닿아 내가 쓴 시리즈 문장이 대기원에 전재되었고 대기원 동수와 연락이 되어 일부 글을 써서 대기원에 주었다. 처음에는 “영감이 있으면 쓰고 없으면 쓰지 않는다”는 생각을 품어 부정기적으로 원고를 보냈는데 이 일을 내가 법을 실증하는 항목으로 치지 않았다. 그 때 느낌은 부업 비슷하게 가볍게 여겼다. 아마도 내가 이 일을 중시하지 않고 장기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 있어 내가 대기원에 가서 일부 실제적인 일을 책임지게 되자 나는 과거와 같은 타성으로 생각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 영감이 있어도 써야 하고 없어도 써야 했다. 흥미 있는 재료가 있어도 써야 했고 흥미 있는 재료가 없어도 써야 했다. 원고가 부족할 때는 동수에게 원고를 써달라고 부탁해야 했는데 동수가 바쁘다고 하거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면 인내심 있게 그의 말을 들어주어야 했다. 결국에는 그에게 될 수 있으면 제발 원고를 써달라고 부탁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흥미를 잃게 했다. 문장을 쓰는 것이 “규정”이 되어버렸고 “몇 월 몇 일까지 완성해야 했으며” “속인들은 어떤 것에 비교적 흥미가 있으니 이번 제목은 무엇이다.”라는 등이었다.
이렇게 되자 나는 글 쓰는 것에 대해 갈수록 흥미를 잃었고 나중에는 삽화에 비교적 흥미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독학으로 컴퓨터로 그림 그리는 책을 사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모방만 하다가 마침내 표면적인 것은 좀 배웠다. 그래서 한 편의 글을 쓰고는 진지하게 삽화 한 폭을 그렸는데 이렇게 하면 더 많은 독자를 흡인 할 것으로 생각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효과가 확실히 괜찮았고 동수들도 그렇다고 했다. 이렇게 한 동안 그림을 그리다보니 한 동수가 나더러 기본기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림이 성숙하지 못하고 아름답지 않으니 그림은 그만두고 전문적으로 글만 쓰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듣기 싫어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글을 쓸 생각도 없었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하려 하는데 어째서 나를 못하게 하는가? 나는 좀 자포자기 했다.
나중에 법공부를 하다가 『미국수도법회설법』을 읽었다.
“그러므로 대법제자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잘해야 한다. 장래가 어떠하든지 간에 자신이 마음속으로 알고 있으면 된다. 마음속에 법이 있으므로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면 곧 무엇을 해야 하며, 대법이 수요하므로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무엇을 하면 된다.”
그렇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진 않든 대법이 요구하는가, 아닌가를 보면 되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보아서는 안 된다. 비록 삽화에 미련이 남긴 했지만 내가 법공부를 하면서 내심에서 진정 집착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심신이 즐거워졌다. 이전에 강제로 그림을 포기하여 내심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 때는 진정한 고통이었다.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그러나 진정한 제고는 버리는 것이지 얻는 것이 아니다.”(『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 법회 설법』)을 보고 깨달았다. 나는 역사문장을 쓰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마땅히 여기에 남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사명이다.
이렇게 한바퀴 돌아 나는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몇 주 전 정식으로 주필을 맡아 명함을 받았을 때 나는 더욱 책임이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 동수는 모두들 노력해야 하며 부간 조회 수가 150만이 되는지 보라고 했다. 어떤 동수는 정념이 좀 강하면 아마 내일 바로 150만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당시에 모두 웃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우스갯소리가 아님을 안다. 만약 자신을 부업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얼마나 많은 중생이 이 글을 읽고 구도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으로 매 한 사람이 모두 전력을 다하고 정념이 충족하다면 나는 부간 150만 클릭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4. 맺는 말
매번 사존께서 층층 걸어 내려오신 그 단락의 법을 읽을 때마다 나는 영문도 모르게 울고 싶어진다. 아마 나의 명백한 일면이 이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짧은 시간에 우리는 정말 잘하고 수련을 잘해야 한다. 물론 맡은 일이 매우 힘들고 심성 고험이 뼈를 도려내는 듯 하지만 생생세세 겪어온 고생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사존의 『유럽 스톡홀름법회에게』에 나오는 한 단락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세상의 일체는 모두 정법을 위해 창립된 것이다. 대법제자는 곧바로 오늘날 풍류인물이다. 옛적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각계 중생들은 모두 기대하고 바라고(期盼) 있다. 당신들이 구도할 중생을 받아들이고 구원하라. 정념정행 하여 일체 장애를 해체시키고, 진상을 널리 전하라. 신은 사람 속에 있다.”
사부님, 여러분 감사합니다!
발표시간 : 2007년 12월 6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7/12/6/4970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