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情緣”에 대한 깨달음을 다시 논함
작자:묘필연화(妙筆蓮花)
[정견망]
최근 情緣 등에 대한 일부 깨달음이 있어 동수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전에 한 동수는 “情”이란 일종의 물질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나 역시 깊은 감수가 있다. 내가 조용히 “정”이란 어떤 물건인지 사고할 때 나는 그것이 眞我가 아님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내 신체 주위에 하나의 場을 형성했는데 일종 밀도가 아주 큰 물질이었으며 또 일정한 에너지가 있었다. 法 중에서 나는 三界내의 사람은 정 속에 빠져 있음을 아는데 마치 사람이 물속에 떠 있는 것과 같다. 사람은 피동적으로 “정”에 의해 이끌리는데 정말로 이러하다. 정신이 淸醒할 때 나는 “정”과 “진아”를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여 집착심이 일어나면 나는 곧장 “정”에 이끌려 “진아”를 잃고 아무것도 모르게 됨을 느꼈다.
나는 사람은 세간에 미혹된 것으로 “정”은 이 미혹을 위해 만들어졌음을 깨달았다. 사람이 사랑과 미움, 得과 失에 집착할 때 그는 곧 “정”에 이끌려 사고가 어지러워지며 진아를 잃게 된다. 나는 젊은이들이 사랑에 빠질 때 이성을 잃는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이런 상태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면서 조용히 어리석게 미혹하는 이 사상의 내원을 생각해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진아가 내보낸 것이 아님을 발견했다. “진아”는 淸靜하고 無爲한 것으로 발광하는 그런 표현은 집착심이 정, 관념, 사상업력 등에 의해 이끌린 후 주왠선이 헷갈린 표현이다.
사부님께서는 “사람은 主元神(주왠선)이 주재(主宰)하는데, 主元神(주왠선)이 마비되고 관념으로 대체되었을 때, 그렇다면 당신이 무조건적으로 투항한 것이며 생명은 이러한 것들이 좌우지하게 된다.”(《전법륜(권2)》)고 말씀하셨다.
“정”은 에너지를 지녔으며 한 수련인으로서 다만 그것을 투철히 간파해야만 그것이 “진아”가 아님을 똑똑히 분간할 수 있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하며 금강(金剛)처럼 견정하고 순정한 의지가 있어야만 그것을 극복하고 닦아 버릴 수 있다. 한 속인으로서는 정에 대해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속인 가요의 가사 중에서 “정파욕해(情波慾海)”란 말을 듣고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전율을 느꼈다. 이 단어를 자세히 생각해보니 “情” “慾”을 진실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정의 파도와 욕망의 바다”속에서 발버둥치면서 방향을 잃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정”에 이끌려 사랑, 미움, 원한을 위해 無知하게 업을 지으면서 생명은 한걸음 한걸음씩 빠져 들어간다. 사람은 또 정과 사랑에 대해 확고하다고 여기며 좋은 일이라고 집착하면서 일체를 아끼지 않고 추구한다.
만약 佛法을 만나지 못한다면 영원히 삼계 내에서 윤회하며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생명 역시 소훼(銷毁)될 수 있는바 정에 대한 집착은 너무나도 두려운 것이다! 정이 무엇인지 분명히 본 후에야 나는 비로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삼계는 험악(險惡)한 곳이며 이곳의 이치는 반대로 되었고 수련인이 조금만 부주의하여 자신을 느슨히 하면 곧 정마(情魔)에 이끌려 이곳에서 훼멸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을 제거하는 과정은 확실히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었다. 수년 전 어느 날 나는 문득 “정”이 진아가 아님을 깨달았으며 그것이 내 가슴 위에 단단히 달라붙은 일종의 물질임을 분명히 느꼈다. 내가 일념을 움직여 그것을 떼어 내려 했을 때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이 있었는데 너무나 아팠다. 나는 한순간 포기하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나는 당시 기연(機緣)을 잃은 것을 후회한다. 그러므로 수련인이 정을 제거하려면 정말이지 반석(盤石)과 같은 굳센 의지와 결심이 있어야만 한다!
여기서 또 “연(緣)”을 말해보자. 나는 “연”의 존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연은 다른 공간에서 사람의 몸에 묶인 한 가닥 선(線)으로 나는 “연”과 업력(業力)이 상호 의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이 삼계에서 윤회전생하는 것은 德과 業에 의해 결정된다. “연”은 어떤 경지 중에서 이런 표준을 유지하고 있다. 소위 “인연관계”란 지은 빚은 갚아야 하고 외상은 청구해야 하는데 어떻게 빚을 갚고 어떻게 청구하는가? 내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인연”에 의해 배치된다.
연의 결과 역시 다만 두 가지뿐인데 하나는 은연(恩緣 좋은 인연)이고 다른 하나는 얼연(孽緣 나쁜 인연)이다. 인간세상에서 천년간 떠돌면서 끊임없이 사랑, 미움, 원한을 연기하는 것 역시 바로 은원(恩怨 은혜와 원한) 두 글자에 불과한데 모두 연에 따라 이끌린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면 누가 누구의 親人이고 누가 누구의 원수인가? 생명의 본질로부터 말하자면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바로 업력과 인연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아들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다음번에 거꾸로 되는데, 바로 이렇게 돌아오고 돌아간다.”(《전법륜》)고 말씀하셨다.
이 점을 분명히 볼 수 있다면 여전히 親情과 愛情에 집착할 수 있겠는가? 한바탕 연극에 불과할 뿐이다! 무대의상을 벗어버리면 각자 자신의 길을 가는데 업력에 의해 배치된 다음 생으로 전생하며 누구도 누구를 알아보지 못한다. 사람이 “情緣”에 집착하는 것은 가련하고 비참하기 그지없다!
정을 언급한 김에 정에서 파생되어 나온 色慾心을 말해보자. 많은 동수들이 쓴 문장에서 이 마음을 마치 하나의 물질처럼 언급했다. 그러나 최근에 내가 수련 중에 깨달은 것은 慾과 色은 별개의 물질이며 완전히 같은 일이 아니었다. 사부님께서는 “욕(慾)과 색(色), 이런 것은 모두 사람의 집착심에 속하기에 이런 것들을 마땅히 모두 제거해야 한다.”(《전법륜》)고 말씀하셨다.
나는 진정으로 사람을 이끌 수 있고 사람을 통제하며 사람의 얼을 빠지게 하는 것은 바로 이 “慾”임을 깨달았다. 그것 역시 밀도가 아주 큰 일종의 물질이다. “정”도 사람을 미혹시킬 수 있으나 “욕”은 더욱 사나운 것으로 소위 “욕망의 불꽃이 몸을 불태운다”는 것은 사람이 욕의 생각을 움직여 그것에 의해 이끌릴 때면 정신이 혼란에 빠져 스스로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무엇이 사람인고 온 몸에 정욕이로다.”(《홍음》)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욕” 역시 사람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물질요소의 하나임을 깨달았다. 칠정육욕이라 “욕”에 포함되는 것은 아주 많은데 가령 食慾, 色慾, 貪慾 등이며 욕을 끊는 것은 사람의 人皮를 벗겨내는 것처럼 환골탈태해 생명의 본질로부터 개변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神은 욕이 없고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색욕은 神이 가장 중시하는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이 마음을 닦아버리려면 여전히 “욕을 끊는데” 공력을 들여야 한다. 마음이 이런 情慾에 이끌려 시끄러울 때 그것이 진아가 아님을 청성하게 가려낼 수 있으며 금강과 같은 굳센 의지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것을 닦아 버릴 수 있다.
“色”은 내가 생각하기에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일종의 집착(執迷)이다. 가령 사람은 미녀, 꽃미남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마치 일종의 관념과도 같으며 동성 중에도 好色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여자가 예쁜 아가씨를 보고 좋아하는 것도 일종의 색이다. 수련이 고층차에 이르면 모두 닦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속인사회 중에는 부부생활이 있어서 비로소 인류사회로 하여금 후대가 번창하게 할 수 있다.”(《전법륜》)고 말씀하셨다. 어떤 동수는 부부생활은 근본적으로 말해 神이 인류에게 후대를 번창하게 하기위해 비로소 정한 것임을 깨달았다.
정견망 神傳文化를 보면 古人들은 부부사이에도 예의(禮義)를 중시했으며 이런 욕망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야만 진정한 사람의 행위이다. 구세력(舊勢力)은 사람을 훼멸시키기 위해 사람의 色慾을 강화하고 사회상으로도 도처에 음란하고 삿된 것들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이는 大法弟子의 수련에도 아주 커다란 교란을 조성했으며 때문에 우리는 청성하게 법리에서 그것을 간파하고 초탈해야 한다.
몇 년 전에 한 동수가 쓴 “정연을 깨닫다(道悟情緣)”는 문장을 읽고 감수가 아주 깊었다. 동수는 오직 “진정하게 수련하고 고생스럽게 수련해야만” 비로소 집착을 제거한 후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에 와서 이 말을 생각해보면 정말 진귀하기 그지없다! 항심(恒心)을 지니고 수련하지 않으면 정이란 난관(難關)을 벗어나기가 아주 어렵다.
최근 많은 동수들이 情色을 닦아 버리는 체험에 대해 썼기 때문에 붓을 들어 자신이 느낀 깨달음을 적어보았다. 나는 동수들이 이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원인은 바로 투철하게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만약 수련의 각도에서 “정(情), 연(緣), 색(色), 욕(慾)”이 어떤 물건인지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을 잘라 버리는 것 역시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 色慾心을 제거할 때 이 마음을 확대하고 강화시킨 구세력을 해체해야 하는데, 구세력이 역사상 우리에게 배치한 색욕방면의 一思一念을 부정하고 해체하며 그것들이 “진아”가 아님을 분명히 갈라내야 한다. 색욕심 등의 욕망(慾望) 역시 다른 공간에서는 거대한 산으로 체현(體現)되는데 다만 대법 중에서 진정하게 수련해야만 근본적으로 그것을 해체할 수 있다.
이상은 개인의 깨달음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바르게 지적해주기 바란다.
발표시간:2011년 5월 9일
정견문장: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1/5/9/7427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