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신우(辛雨)
【정견망】
자고로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이해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우리 수련인이 보기에 행복은 끝없는 재물을 갖거나 뛰어난 명예, 완벽한 애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일상생활 중에서 조금씩 자신을 수련하고 반본귀진의 큰길에서 한걸음씩 앞으로 매진하는 것이다. – 서문
나는 1980년대 초,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끝나고 입시가 부활된 후 대학에 입학했다. 동년배 중 매우 운이 좋은 편으로 꿈에 그리던 대학에 들어왔다.
당시 중국은 막 문화혁명이 끝나고 수십년 간 중국인들을 압제하던 사상의 둑이 단숨에 터졌다. 과거 모든 사람들이 숨죽여 지내던 사상계에서도 일순간 한꺼번에 각양각색의 목소리가 다 튀어 나왔다. 마치 백가쟁명의 춘추시대를 맞이한 것 같았다. 서양 사조의 영향으로 대학 교정에서 학문을 추구하던 우리 대부분은 과학과 민주주의의 충실한 신도가 되어 가슴 한가득 이상과 열정을 품고 뜻을 ‘덕선생(德先生 민주주의)’과 ‘새선생(賽先生 과학)’을 중국으로 불러들였다. 중국인들이 전제(專制)와 낙후함과 완전히 고별하도록 했다.
당시 우리는 순진하게도 중국의 ‘르네상스’가 우리 손으로 완성될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다. 우리의 이상은 반드시 실현될 수 있으며 그것도 아주 빨리 실현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깨어나게 했다. 거의 1959년과 같은 상태를 방불케 했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중국 사상계의 봄날은 짧은 운명을 맞았다.
이상이 심하게 좌절당하고 게다가 감정생활이 순조롭지 못해 나는 인생에 대해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은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해답을 찾기 위해 나는 동서고금 성현의 가르침을 찾아다니느라 진력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비록 몇몇 치밀한 견해는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나를 완전히 설복하진 못했다. 이렇게 나는 지난 날 이상을 가득 품고 있던 청년에서부터 점점 정신적으로 돌아갈 곳 없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길은 어떻게 연속되는지 모르며 마음으로 어떻게 여정에 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의 그런 고통과 절망을 유사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체험하기 어려울 것이다.
굳건하게 지킬만한 신앙이 없었기에 사회에 진출한 후 다가온 상품경제의 큰 흐름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러다 자신의 일생에 대해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고 있을 때 우연히 대법을 만났다.
그것은 1995년 봄날의 저녁이었다. 저녁을 먹고 잠시 산보하다 인근 서점에 들러보기로 했다. 전에 나는 몇 가지 기공을 가볍게 연마한 적이 있었다. 기공에 대한 흥미가 좀 있었기 때문에 매번 서점에 갈 때마다 나는 새로운 기공서적이 있는지 찾아보곤 했다. 그날 밤 평소처럼 기공서적 코너의 서가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둘러보는데 익숙한 책 더미들 중에 전에 본 적이 없던 <전법륜>이란 책을 발견했다.
책을 뽑아 살펴보니 우선 보이는 것은 속표지에 실린 저자 근영이었는데 매우 친절하고 선량해보였다. 다시 목록을 펼쳤는데 좀 이상함을 느꼈다. 이전에 읽었던 기공서적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동작을 어떻게 하는지 하는 기공 공법 위주였는데 이 책에서는 동작을 언급한 것은 한글자도 없었다. 내가 전에 읽었던 기공서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강렬한 호기심이 일어나 즉시 책을 구입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고향의 밤은 실제 너무 더워 견디기 어렵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는 구입한 후 줄곧 책꽂이에 놓아두었던 <전법륜>을 꺼내 펴보았다. 뜻밖에 이번에 읽고는 다시는 내려놓을 수 없었다. 이틀 밤을 연달아 나는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책을 한꺼번에 다 읽어버렸다.
조금도 과장 없이 말할 수 있는데 나는 당시 <전법륜>을 읽을 때 지난날 나를 괴롭히던 각종의 인생에 대한 의혹이 전부다 해결되었다. 우울한 몇 년간의 마음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사부님은 책에서 말씀하셨다.
“고층차에서 보면, 사람의 생명은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의 생명은 우주공간 중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우주의 眞(쩐)・善(싼)・忍(런) 특성에 동화한 것이며, 본성은 본래 선(善)하고 선량한 것이다. 그러나 생명체가 많아진 후에 그도 일종의 사회적 관계가 생겼다. 그리하여 그중 일부분 사람들은 이기적이거나 좋지 않게 변해, 아주 높은 층차에 있을 수가 없어 아래로 떨어졌으며, 한 층차 중으로 떨어졌다. 이 층차 중에서 그는 또 좋지 않게 변해 또다시 아래로 떨어지고 떨어져, 최후에는 속인 이 층차 중에 떨어져 내려왔다. 이 층차에 떨어지면 사람을 철저히 없애버려야 하지만, 그런 대각자(大覺者)들은 자비로 가장 고통스러운 환경 중에서 사람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로 결정하여, 이런 공간을 창조했다.”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은 모두 이런 신체가 존재하지 않고, 그는 떠오를 수 있으며, 그는 또 크게 변하거나 작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공간에서는 사람에게 이런 신체, 우리 이 육신이 있게 했다. 이 신체가 있은 후, 추워도 안 되고, 더워도 안 되며, 힘들어도 안 되고, 배고파도 안 되는데, 어쨌든 고생이다. 병이 있으면 당신은 괴롭고, 생로병사(生老病死)해야 하는데, 바로 당신에게 이런 고생 속에서 업을 갚게 하며, 당신이 또 되돌아갈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려고, 당신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바로 그래서 사람은 미혹 중에 떨어져 온 것이다. 이 속에 떨어져 온 후에 당신에게 이 한 쌍의 눈을 창조해 주어, 당신이 다른 공간을 보지 못하게 하고, 물질의 진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당신이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가장 고생스러운 것도 가장 진귀한데, 미혹 중에서 깨달음에 의거해 되돌아 수련하는 데는 고생이 매우 많아 되돌아감도 빠르다. 당신이 더 나빠진다면 생명은 곧 없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볼 때 사람의 생명은,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금 반본귀진하여 되돌아가게 하는 데 있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나는 이것이야말로 내가 애타게 찾았지만 줄곧 찾지 못했던 “진경(眞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행운이 있어서 대도(大道)를 수련할 수 있는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을 큰 행운으로 느꼈다. 이렇게 매우 기쁜 심정으로 나는 기다림 없이 수련의 문에 들어섰다.
대법 수련 후 나는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간 적이 없지만 전에 앓았던 각종 질병이 저절로 다 나아버렸다. 온몸이 가뿐했다. 더 중요한 것은 법공부와 심성 수련을 통해 하나씩 집착을 버렸고 심성관을 하나씩 넘어왔으며 도덕 수준이 날로 높아졌다.
아직도 기억이 새로운 일이 있다. 수련을 처음 시작했을 때 중대한 심성 고험을 만났다. 인터뷰 중에 받은 봉투(뇌물)를 어떻게 하는가 였다.
1990년대부터 중국 언론계에서는 돈을 받는 풍조가 갈수록 심해졌다. 한편으로는 매스컴에 부탁할 필요가 있는 회사나 개인이 자신을 선전하기 위해 분분히 기자에게 달려와 봉투를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들어오는 돈이 갈수록 많아지자 기자나 편집자들이 거절하지 않고 심지어 직접 요구하기도 했다. 부정한 풍조는 언론계에 있던 내게도 파급되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내게 봉투를 주었을 때 내 마음은 꽤 두근두근 불안했다. 하지만 날이 길어지자 이런 경력이 많아지자 점점 마음이 편해지고 보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처럼 봉투를 챙기기 시작했다. 매번 봉투를 받으면 늘 기분이 좋았다. 외출하여 활동에 참가하며 이따금씩 주최자가 사람들에게 봉투를 돌리지 않으면 그 사람이 째째하며 규범을 모른다고 나무랐다. 그러니 내가 당시 봉투에 대한 집착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명확히 요구하셨다. 한수련인으로서 우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며 더욱 좋은 사람, 더더욱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또한 <전법륜>에서 알려 주셨다. “사람의 전반 수련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집착심을 버리는 과정이다.”
때문에 수련 후 나는 재빨리 더 이상 전처럼 돈봉투에 집착해서는 안 됨을 의식했다. 속인의 층차에서 말하자면 인터뷰를 하고 원고를 쓰거나 편집하는 것은 기자 본연의 일이며 이 일을 완성한 후 우리는 월급으로 보수를 받는다. 그렇다면 돈봉투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일종의 뇌물이 아닌가? 이런 불투명한 수입은 신문기자의 직업윤리를 위배한 것이다. 하지만 수련인이 봉투에 열중하면 분명히 이익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수련인은 자기에 대한 요구가 일반인 보다 높아야 하니 당연히 받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봉투를 거절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중국신문계통에서는 이미 당연한 사회 풍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가지는데 당신이 함께 가진다고 해도 아무도 잘못이라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갖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반대로 불가사의 하다고 할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생각했다. ‘이왕 거절하기 힘들다면 받으면 받는 것이다. 그러나 받은 후 마음을 절대 움직이지 말고 더욱이 적극적으로 원하지 말자.’
그러나 수련이 깊어짐에 따라 나는 점차 의식하게 되었다. 이 봉투 문제에서 단순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나서서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필경 봉투는 일종 부정한 수입이니 가져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왜 거절하지 않는가? 좋은 대인관계를 위해서라거나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 외에 내 마음 깊은 곳에 돈봉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익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게 아닌가? 더 높은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하며 철저하게 내심에 남은 집착을 내려놓게 되자 나는 다른 사람이 다시 돈봉투를 주었을 때 그 자리에서 거절할 수 있었다. 때로는 동행이 있어 바로 거절하기 어려울 때면 나중에 기회를 보아 돌려주었다. 아울러 그들에게 나는 파룬궁을 수련하기 때문에 돈봉투를 받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만약 이렇게 해도 거절하기 어려울 경우 나는 돈을 희망공정(가난한 아동 돕기)에 보냈다.
또 한동안의 날들이 지나자 나는 봉투를 거절하기만 하고 거절할 수 없는 봉투를 희망공정에 보내는 것으로는 부족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평소 돈봉투 외에도 사회활동에 참가할 때 늘 선물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했다. ‘이런 선물은 비록 돈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부정한 수입이 아닌가? 수련인은 이런 수입을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점을 의식한 후 다시 선물을 받을 때면 가능한 한 모두 거절했다. 정 거절하기힘들면 선물을 등가의 돈으로 바꿔 희망공정이나 다른 자선단체에 보냈다.
몇 년간 내가 희망공정에 기부한 돈이 수만 위안이 되자 “희망공정 선진개인”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동료들 중에 나처럼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것은 절대 나의 도덕 표준이 다른 사람보다 높아서가 아니라 단지 내가 대법을 수련하여 사람이 되는 도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일 대법 수련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절대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법을 얻어 지금까지 수련하는 길에서 이런 심성 고험이 아주 많았다. 어떤 고험은 관을 넘었고 어떤 것은 한때 넘지 못해 아직까지 넘고 있다. 하지만 관을 넘었는 지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한가지를 깊이 체험했다. ‘수련은 우리 생활 중 매 사건을 반본귀진의 원대한 목표와 함께 연결시킨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설령 아무리 자그마한 일일지라도 그속에는 모두 수련의 요소가 들어있다. 모두 수련인더러 집착을 내려놓게 하고 제고해 올라올 기회를 포함하고 있다. 생각해보라 이렇게 생활하는 것보다 더 충실하고 행복한 생활이 어디 있겠는가?’
내 평생 가장 충실하고 행복한 시간을 주신 대법과 사부님께 감사드린다.
http://www.zhengjian.org/2016/03/10/151607.一生中最充實幸福的時光.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