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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의 묵은 원한을 선해하다

작자/ 청풍(清風)

【정견망 2017년7월10일】

나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친척집에 보내졌다. 약 아홉 살 무렵 모친이 나를 보러왔는데 이치상으로는 어린이가 처음으로 모친을 만났으면 매우 기뻐해야 하는데 나는 어쩐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모친은 내게 많은 것을 사주었으며 떠날 때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나는 일종 알 수 없는 반감이 있었고 모친과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 때 나는 부모 곁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내게 웃는 얼굴을 보인 적이 별로 없었고 공부에도 가혹한 표준을 정해 놓았다. 때문에 서로 관계가 좋지 못했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다른 친구들은 주말이면 집으로 돌아가 매우 기뻐했지만 나는 못마땅했다. 집을 한번 떠나자 나는 조롱을 벗어난 새처럼 느꼈으며 학생 시대는 부모와 압제된 분위기에서 지나왔으므로 나는 그들에 대해 부모 자식 간의 정이 별로 없었다.

나중에 취업한 후 모친은 거의 매일 이런 말을 했다. “전생에 네게 진 빚은 다 갚았으니 너는 집에 의지하면 안 된다.” 그래서 나중에 나는 다른 지방에 방을 빌려 혼자 살았다. 일주일에 한번 돌아갔으며 역시 잠시 머물다가 떠났고 이러기를 몇 년이나 했다.

나중에 대법을 알게 되었고 법리를 통해 나와 부모님 간의 관계가 좋은 인연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전에 정말 나와 매우 큰 원한이 있었다. 나는 이따금씩 관계를 완화해보려고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때 비록 수련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근기 때문에 정을 담담하게 보았고 가능한 한 부모에게 진상을 말해주었다. 나는 그들을 미혹 중의 생명으로 보았는데 각종 원인으로 효과가 별로 없었다. 부친은 이따금씩 청성하다가도 모호해졌다. 모친은 아예 펄쩍 뛰며 욕을 했다. 그들은 극력 나의 수련을 반대했으며 동시에 천방백계로 내가 밖에 나가 진상 알리는 것을 저지했다. 한번은 내가 아버지 친구에게 진상 자료를 부쳤는데 부친에게 발각되어 한바탕 큰 욕을 들었다. 특히 한번은 직장에서 610의 지시하에 10일간 연금이 되었다. 모친이 나를 보러 와서 분노를 참지 못해 의자를 들고 나를 때려죽이겠다고 했다.

집에 돌아간 후 부친은 더욱 엄하게 집에 파룬궁의 물건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나중에 내가 감옥에 들어가자 그들은 사악에 적극 협력했고 심지어 내게 편지를 써서 전향하지 않으면 한 푼의 유산도 남겨주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가장 어려울 때 매일 십 몇 시간 씩 허리를 90도 굽혀야 했는데 이렇게 두달간 시달려도 나는 굴복하지 않았다. 나를 관리하던 죄수도 너 때문에 미치겠다고 했다.

감옥에서 부모를 오라고 불렀고 모친은 나를 ‘짐승’이라고 크게 욕했다. 그녀의 말은 내게 큰 번거로움을 가져왔다. 죄수들은 일반적으로 불효자에게 매우 반감을 갖는데 때문에 나는 더 크게 시달렸다. 나는 정말 압박을 견디지 못해 억지로 굴복했다. 그러자 부모는 단번에 웃음꽃이 폈다. 그들은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상의 빚진 것 때문에 나를 버리지 않으려는 것을 알았다.

다행히 나중에 우리집에 컴퓨터를 샀고 부친도 끊임없이 일부 진상을 알았으며 대법에 대해 태도가 많이 변했다.

내가 출옥 후 외지에 돈벌이 나갔는데 2년 여 동안 나는 그들에게 거의 전화를 하지 않았다. 전화가 와도 나는 얼버무렸다. 부모님은 내게 집을 사주었고 실내 장식을 해주셨지만 나는 전혀 그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하고 한마디씩 했다. 나는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늘 냉담했다. 그 2년간 혼자 지내며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봉쇄 싸이트를 돌파하는지 몰랐고 게다가 다년간 억울한 옥살이로 조성된 두려움에 수련도 해이해 졌으며 하다 말다했다. 나중에 사이트를 돌파하는 법을 배웠으며 시간이 긴박함을 알고 더 정진하기 시작했다. 나는 법에 대조해 부모님과의 관계 및 그들에 대한 태도를 돌이켜 보았다. 그것은 결코 그들에 대한 정을 완전히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쉽게 눈치 채지 못할 원한이 속에 있었는데 주요 원인은 다음 몇 가지다.

첫째, 내가 감옥에서 고생한 것에 부모님이 일부 책임이 있고 게다가 사악에 적극 협력해 나를 박해했다.

둘째, 그들은 다른 동수 가족처럼 나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년간 무신론의 주입을 받아 종교나 수련 따위의 일은 전혀 몰랐고 허무하고 아득한 환상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늘 말했다 “(수련한다고) 네가 뭘 얻을 수 있니?” 부친은 그래도 교육 수준이 높아서 자기를 버리고 대의를 취하는 일에 대해 다소간 이해가 있었다. 하지만 모친은 아무리 해도 말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현실 이익만 찾으며 나를 바보라고 했다. 이렇게 많은 대가를 치렀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수련하기 전에 몸이 매우 건강해 대다수 동수들처럼 원래 신체가 나빴는데 연공하여 나은 그런 직접적인 설득력이 없었다. 또 나는 닫혀서 수련하므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깨달은 법리를 그들 속인 층차에서는 차이가 너무나 커서 알아듣지 못한다.

셋째 그들이 속인의 명리에 대한 집착에 실망한 것이다. 그들은 이 방면의 것을 매우 중시했다. 비록 어려서부터 내가 옆에 있진 않았지만 나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 출옥 후에 여러 번 내게 가정을 꾸리고 사업을 해서 발전해보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명리는 이미 내려놓았기에 이런 심태가 마침내 그들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는 원한으로 변했다.

넷째 부친은 삼퇴 문제에서 나를 실망시켰다. 내가 여러 번 말했기 때문에 그도 공산당이 나쁘고 파룬궁이 좋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탈당은 인정하지 않았다. 최후 한번 내가 간절히 애걸하며 거의 부자관계를 끊으려 하자 그는 겨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인해 나는 삼퇴를 권하는 믿음에 많이 충격을 받았다.

나도 정말 지난 세의 업보를 많이 만났다. 나는 어느 한 세에 부모와 함께 수련한 적이 있음을 은은히 보았다. 나 때문에 부모가 수련 성취하지 못했고 그들은 마지막 대법이 전해질 때에 나의 부모가 되어 나를 저지하겠다고 맹세했다. 게다가 또 다른 원인이 있어서 이번 세에 피차간의 여러 표현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문제를 찾은 후 나는 이런 원한을 내려놓아야 함을 깨달았다. 비록 역사상의 각종 은원이 있지만 이 일세에 이왕 부모와 자식이 되었으니 마땅히 법에서 수련한 자비로 일체를 화해해야 한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피차간의 빚은 이미 결산했고 더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 두 가지 원인은 그들의 층차 때문이다. 사람마다 명리를 내려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수련인의 표준으로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속인의 표준으로 내게 요구하는 것처럼 옳지 못하다. 사람에게는 각자 운명이 있으니 억지로 요구할 수 없다.

마지막 네 번째 문제는 역시 내가 수련에 정진하지 못해 말의 위력이 부족하고 사람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것이니 나의 문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련인으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비심이 있어야 한다. 감옥에 들어간 몇 년간 부모님도 그리 쉽진 않았을 것이다. 특히 부친이 몇 차례 병이 나서 까딱하면 응급치료도 못 받고 돌아가실 뻔 했다. 이제는 내가 자유로우니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

정념이 나오자 효과가 있었다. 내가 전화를 했더니 부친은 마침 건강보조식품을 사려고 했다. 나는 옳지 않다고 느껴 즉시 말렸다. 부모님은 좀 주저했지만 나중에 좀 알아보니 이런 약들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내 전화가 때를 잘 맞춰 사기를 피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기뻐했다. 부친은 내게 여러 차례 인터넷 쇼핑을 요청했으며 내가 즉시 사드렸는데 쌍방이 비록 떨어져 있지만 덕분에 교류가 좀 많아졌고 좀 융합이 되었다.

나는 자비심으로 부모와의 숙원을 선해했지만 여전히 아직 부족하다. 이제 부모님은 내 수련에 대해 더 뭐라 하진 않는다. 비록 나가서 진상하는 일에 찬성하진 않지만 전에 비해 많이 변하셨다. 이 역시 내가 더 노력해서 개변할 필요가 있는 점이다.


원문위치
: https://www.zhengjian.org/node/238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