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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서의 세월 호탕한 사부님 은혜(2), 뉴욕법회를 회억

작자/대법제자 소엽

【정견망】


97년 일부 파룬궁수련생들이 사부님과 찍은 단체 사진

(1)

1997년 3월 20일 새벽 단체 연공이 끝난 후 보도원이 사람들을 한곳으로 소집한 후 말했다. “23일 사부님께서 뉴욕에서 설법하시니까 여권이 있는 사람들은 가급적 많이 참가하세요.”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온몸의 털이 다 솟구쳤고 긴장하여 하마터면 울음이 나올 뻔 했다. ‘이것이 인류에 대한 사부님의 마지막 한차례 설법이 아닐까, 나는 반드시 가야해!’

이때 법회 시작 시간이 겨우 사흘밖에 남아있지 않을 때였다.

집에 돌아온 나는 얼른 전화를 걸어 미국 불학회에 초청장을 요청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미국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기 위해 줄을 섰다. 줄은 매우 길어 몇백 명 되었다. 오후까지 줄을 선 후에야 겨우 사무실로 밀고 들어갔다.

실내에서도 세 줄로 섰는데 비자를 거부당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사람들은 마치 일찍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비자 거절당하는 것이 매우 정상적이라고 여겼으며 비자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안 되어 오히려 그들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어 비자 인터뷰하는 직원은 온화하게 나를 바라보며 무엇 때문에 미국에 가려고 하는지 물었다. 나는 초청장을 전해주며 가슴에 단 파룬뱃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미국의 법회에 참가해 사부님의 설법을 들으려 합니다.”

그는 내게 양식을 하나 주며 옆에 가서 기입하라고 했다. 내가 양식을 다 적은 후 그에게 건네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일 와서 비자를 가져가세요.”

나는 뜻밖의 태도에 너무 기뻤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부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사관을 나와서 나는 여행사로 달려갔다. 마침 22일 비행기 표가 아직 남아 있었다. 당시 표 한 장에 8천 위안이 넘었다. 나는 가격은 생각하지도 않고 예약했다.

그리고 부리나케 집으로 뛰었다. 평소 나는 집에서 돈을 관리하지 않았고 가사지출에 대해서는 물어본 적도 없었다. 8천 위안은 당시에도 매우 큰돈이었다. 남편이 마침 자리에 있었는데 속으로는 떨렸지만 겉으로는 가볍게 말했다. “어떻게 해요, 좀 도와주세요.” “뭘 도와달라고?” “미국 가는 비행기 표요.” “당신 미국비자도 없는데 어떻게 가려고?” 나는 신비하게 약간 득의만만하게 말했다. “(비자는) 받았어요.”

그래서 남편이 내가 미국으로 가는 비용을 ‘도와주었고’ 또 아버지가 일만 위안을 ‘찬조’하셨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모든 게 해결되었습니다! 22일 나는 순조롭게 미국으로 날아갔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입국할 때 직원이 나를 가로막았다. 이유는 나의 여권 유효 기간이 6개월이 안된다며 입국을 거절했다. 그러면서 한쪽에 남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같은 비행기에 동승했던 사람들 모두 비행기에 탔으나 나 혼자만 남았다. 나는 입국 심사대 직원에게 평온하게 말했다. “나는 이 규정을 전혀 몰랐고 당신들 대사관에서 비자를 주어서 왔습니다.” 동시에 내심 견정하게 일념을 가졌다. ‘이왕 내가 미국 땅을 밟았으니 사부님께서는 절대 나를 돌아가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그들은 마침내 나의 입국에 동의했고 95달러 벌금을 내고 들어가게 했다.

수속이 끝난 후 직원은 나를 데리고 짐을 끌고 힘껏 달렸고 나는 뒤에서 얼른 따라갔다. 멀리서 엔진의 굉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비행기는 진작에 대기 상태에 있었다. 내가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게이트에 달려가서 안정되기도 전에 비행기는 이미 활강을 시작했다. 비행기를 가득 채운 승객들은 나에게 열렬한 박수를 쳤다.

(2)

7월 22일 오전 우리는 뉴욕에 도착해 중국 유학생회관에 머물렀다. 각지에서 온 동수들도 속속 도착했다.

하루 일찍 도착했기에 많은 동수들이 다 밖에 나가 거리를 구경했다. 나와 같이 온 려려(丽丽)도 나를 끌고 나가려고 했다. 내가 말했다. “우리 아무데도 가지 말자. 만일 무슨 좋은 일이 있는데 우리만 빠질 수 없잖아.”

과연 정오가 막 지나자 불학회에서 전화가 와서 알려주었다. 사부님께서 오후 2시 경 오셔서 여러분을 만나보려 하시는데 장소는 바로 일층에 있는 작은 커피숍이었다.

전 유학생 회관이 들끓었다. 사람들은 기뻐하며 서로 알려주고 전화를 하여 나간 동수들에게 빨리 돌아오라고 했다.

한시가 막 지났을 때 우리는 커피숍에 모여 의자를 준비해놓고 앉아서 사부님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흥분, 초조하게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2시, 2시 반, 3시가 지나도 사부님은 오시지 않았다. 불학회에서 전화가 와서 사부님께서 다른 일이 있어 오실 수 없으니 시간을 5시로 정정한다고 알려주었다.

거의 5시가 다 되자 사람들은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유학생 회관 입구로 달려가 사부님을 영접하려고 했다.

3월 말의 뉴욕은 찬 기운이 제법 쌀쌀했고 봄비가 줄줄 내리고 있었다. 동수들은 조용히 그곳에서 기다렸다.

한 대 승용차가 달려오더니 맞은편에 멈추었고 사부님이 나타나셨다. 사람들은 흥분해서 고함을 질렀다. “사부님이 오셨다!” “사부님이 오셨다!”

나는 왜 아무도 사부님을 위해 앞뒤에서 호위하며 우산을 펴는 사람이 없는지 놀랐다. 사부님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 속에 넣고 종종걸음으로 큰 길을 건넜는데 뒤에는 수련생 한명만이 따랐다. 나는 매우 감격했다. ‘사부님은 정말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한 대로 하시며 가식이라곤 조금도 없으시구나.’

커피숍에 들어오자 맨 앞줄 자리는 사부님과 대략 2-3미터 떨어져 있었고 입구에는 동수들이 꽉 차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의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부님은 사람들을 앞으로 오라고 불렀으며 바닥에 앉게 하셨다. 사부님과의 거리는 불과 1-2자 정도였다.

사부님은 매우 기뻐하셨고 우리에게 몹시 친근하셨다. 우리도 마음이 편안했고 정말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것 같았다! 무슨 문제가 있어도 있는 대로 다 말했고 사부님은 인내심 있게 일일이 자세히 답을 해주셨다. 웃음과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는 통쾌하게 “특별대접”을 받았다. (미국법회설법 뉴욕 좌담회설법)

그 후 수련생들은 또 사진을 찍자고 했고 사부님은 흔쾌히 응낙하셨다. 단체 사진만이 아니라 매 한 사람마다의 청을 들어주셨다.

사부님을 둘러싸고 장을 떠나니 거의 9시가 되었다. 또 질문을 하는 수련생이 있었고 사부님은 여전히 인내심 있게 대답해주셨다.

비록 이미 매우 늦었지만 동수들은 흥분이 가시지 않아 전혀 쉬려는 생각이 없었다. 여행의 피로나 시차로 인한 고생은 다 사라졌고 열렬하게 대화하며 사부님과 함께 있었던 행복한 시각을 회억했다.

내일은 법회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나는 부득불 빨리 잠을 자기로 했다. 내일 사부님 설법을 잘 들어야 하고 절대 졸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3)

7월 23일 정식법회에는 일천여 명이 와서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법회는 아침 8시에 정확히 시작되었다. 열렬한 박수소리와 함께 사부님께서 강단에 오르셨다.

오전 내내 사부님 설법이 있었고 오후에는 질문과 해답으로 무려 11시간이나 걸렸다 (자세한 내용은 《미국법회설법》〈뉴욕법회설법〉을 볼 것.)

정오 휴식할 때 대청에서 나는 식당의 주방장을 만났다. 그는 30에 가까운 젊은이였다.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 소림사에서 수행한 적이 있다고 했는데 이번에 사부님을 우연히 만나자 사부님께서 직접 서명한 《전법륜》을 주셨다고 했다. 나는 정말 부러웠으며 또 그를 위해 기뻐했다. 나는 그에게 반드시 소중히 간직하라고 당부했다.

오후에 사부님께서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실 때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많은 동수들이 어찌된 일인지 고개를 떨어뜨리고 졸고 있었다. 나는 조급해져서 생각했다. ‘사부님 설법을 듣기가 얼마나 얻기 어려운가! 그런데도 당신들 어떻게 졸고 있는가? 빨리 얼어나세요.’

귀국 후 내가 대법연구회 동수들에게 이 일에 대해 원망조로 말했더니 그들이 알려주었다. “사부님은 공을 가지고 설법하시며 해외수련생에게 신체를 조정해주시는 거에요. 해외의 한 차례 보고회는 국내의 9일 강의에 해당합니다. 사부님께서 더 빨리 더 강하게 더 힘을 내서 하신 겁니다.”

나중에 사부님께서는 또 현장에서 여러 사람들의 천목을 열어주신다고 선포하시자 전 회의장은 곧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천목이 열린 수련생은 손을 들어보세요.” 내가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많은 동수들이 손을 들었다. 나는 그들이 정말 부러웠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므로 나의 근기가 너무 차한 것에 풀이 죽었다.

질문 쪽지가 한 무더기씩 위로 보내졌고 사부님께서는 또 끊임없이 해답해주셨다. 마침내 대회 일꾼이 사부님께서 너무 피곤하실 게 염려되어 더 이상 쪽지를 올리지 않았다.

법회는 저녁 7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숙소로 돌아오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욕실의 꽃무늬 타일을 보았다. “어? 어떻게 입체적이 되었지?” 자세히 다시 보니 큰 수풀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으며 한 층 한 층씩 들어갔다. 볼수록 공간이 더 많았으며 무수한 층이어서 끝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천목 역시 열렸음을 알았고 격동해마지 않았다. 북경에 돌아온 후 벽이나 탁자를 보아도 모두 입체적이었고 다차원적이었다. 이 상태는 매우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4)

7월 24일 새벽 많은 동수들은 이미 짐을 싸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불학회에서 또 전화가 왔다. “저녁에 교류가 있으니 가급적 많은 분들이 참가해주세요.”

동수들이 기어이 나더러 사부님께서 오시는 지 여부를 확실히 물어보라고 했다. 만약 (사부님께서) 오신다면 비행기 표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표를 바꿀 수 있으면 가급적 바꾸세요.”라는 대답을 얻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들은 대로 전달해주었다. 유학생 회관은 다시 들끓었다. 전화를 걸거나 표를 바꾸려는 사람들로 왁자지껄 했다. 모두를 즐거워하면서 기쁨에 넘쳤다.

시간이 정말 느리게 갔고 겨우겨우 저녁이 되었다.

사람들은 맨해튼에 있는 차이나타운의 일선(逸仙)중학교에 모였다. 사부님께서 또 오셨다. 사부님께서는 또 다시 문제 해답을 해주셨다.

80대의 한 무림고수가 위풍당당하게 첫째 줄 맨 중간에 앉아 있었다. 사부님께서 그에게 첫 번째 문제를 물어보라고 하셨을 때 그는 매우 오래 말했으며 자신의 것을 많이 주장했다. 사부님은 인내심 있게 다 들으신 후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당신은 아직 내려놓지 않았군요. 아직 내려놓지 못했어요.”

선전에서 온 한 아주머니는 사부님께 이번 법회에 참가하려는데 남편이 매우 반대했다고 했다. 자신을 때릴 뿐만 아니라 《전법륜》을 찢고 사부님 법상을 밟아서 아주머니는 매우 조급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부님께서는 “그럼 당신이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라고 하셨다.

아주머니는 “저는 다 참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부님의 법상을 밟았는데….”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

아주머니는 흐느끼는 소리로 몹시 억울한 듯 “사부님 저는 참을 수 있지만….”라고 말했다.

사부님은 마치 어린 아이를 달래듯이 말씀하셨다.

“보세요, 당신은 울고 싶으면서도 자신이 참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시 정말 아주머니가 불공평하다고 느꼈으며 거의 눈물이 나올 뻔했다.

사부님께서는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어떤 경우에도 다 참아야 합니다.”

나는 맹렬하게 고개를 들었고 속으로 비할 바 없는 진감이 있었다. ‘우리의 제고를 위해, 또 우리의 수련성취를 위해 사부님께서 얼마나 지불하고 계신데 어떻게 참을 수 있단 말인가?’

사부님의 이 말씀은 내게 각골명심하게 했다!!

그 자리에 앉은 많은 동수들은 수련 기간이 얼마 안 되는 동수들이라 제출한 문제들은 매우 깊이가 얕았다. 심지어 일부 수련과 무관한 질문도 있었지만 사부님께서는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모두 인내심 있게 대답해주셨다.

회의 후 사부님께서는 모두에게 또 서명을 해주셨다. 나는 대륙에서 막 나온 작은 《전법륜》 책을 들고 사부님께 서명을 부탁드렸다. 사부님께서는 서명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건 참 괜찮네요. 휴대에 편리 하군요, 좀 많이 만들면 좋겠어요.(귀국 후 나는 일하는 사람에게 사부님의 건의를 전해주었다)”

3일간의 법회 활동 기간에 나는 세 번이나 사부님을 뵈었다. 처음에 ‘특별대접’을 받았고 둘째 날 법회에 참가해 신체를 청리해주셨고 공능을 열어주셨으며 사부님과 함께 사진을 찍고 서명을 받은 등등.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며 수확이 가득했고 너무나 기뻤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무나 잘 대해주신다! 주시고 또 주실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이 주신다.

사부님은 제자가 가급적 빨리 수련하고 빨리 제고해 올라오도록 가지해주신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수련에 대해서, 또 대법 법리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가 또 어떻게 사부님의 깊은 마음씀씀이를 깨닫고 체험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에 와서 회상해보니 정말이지 후회의 눈물이 얼굴을 가린다!

후기

법회가 끝난 후 사부님께서는 뉴욕주재 중국 총영사관의 초청을 받으셨다. 사부님께서는 영사관 직원들에게 파룬따파를 소개해주시고 또 현장에서 그들의 신체를 청리해주셨다.

현장에 있던 모든 직원들은 사부님께 매우 우호적이고 존중했으며 반응이 뜨거웠다. 또 많은 문제들을 질문했다. 사부님께서는 모두 웃으시면서 인내심 있게 일일이 대답해주셨다.

이 전반 과정은 다 영상으로 촬영되었고 나는 국내에서 이 영상을 보았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1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