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學習)의 본질
글 / 대법제자
[정견망 2003년 7월 12일]
1. 색채(色彩)에서 “삼(三)”
한번은 친구에게 회화에 관한 심득(心得)을 담론하는 편지를 쓰던 중에 적황남색이 삼원색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우주특성은 진선인으로 조성된 것이고 원색도 3종이라면 그 가운데 어떤 필연적인 연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중에서, 특별히 제 5강에서 여러 차례 색[顔色]에 관해 언급하셨다. 물론 《전법륜》에 쓰신 까닭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법리(法理)를 알려주신 것이지 색채학을 설명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위에 보이는 그림 1은 삼원색의 연계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서 보면 적색+황색=주황색[橙黃], 황색+남색=녹색, 남색+적색=자색이며 물질의 색채 중에서는 적색+황색+남색=흑색이 되어 백색은 없고, 빛의 색에서는 삼원색을 더하면 백색이 되어 흑색이 없게된다. 그 중에 황색과 자색, 남색과 주황색, 적색과 녹색은 서로 포함하는 색이 없기에 서로 보색(補色)이 된다고 한다. 《전법륜》에서 사부님께서는 다른 공간에서 황금색이 이 공간에 대응되어 오면 황색에 해당하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황색이 이 공간에 대응되어 오면 등황(橙黃)색에 해당한다.
나는 황색은 이해하기가 쉽다고 생각하는데 , 법륜(法輪) 중에 있는 5개의 만(卍)자 부호는 모두 황금색이다. 그런데 불가는 선을 닦으며 황금색은 사람들에게 온난(溫暖)한 감각을 주므로 색채 중에서 선(善)의 성질을 체현한다. 그렇다면 적색과 남색은 어떻게될까? 나는 계속 생각해 보았다. 법륜 안에는 4개의 태극이 있는데 선천대도(先天大道)나 일반적인 의미의 도(道)를 막론하고 모두 한 극(極)에 적색(赤色)이 있다. 그런데 도가는 모두 진(眞)을 수련한다고 말하고 사람들은 적성(赤誠, 역주: 원래 붉을 적(赤)은 벌거벗은 갓난아이의 색을 의미하므로 거짓이 없고 진실하다는 의미가 있다), 적담충심(赤膽忠心 역주: 적담(赤膽)이란 성실하고 충성심이 있다는 의미로 적담충심을 합하면 무한한 충성심을 의미한다)을 말하듯이 적색은 사람들에게 진실하고 정성스런 감각을 주므로 색채 중에서 진(眞)의 성질을 체현한 것이다. 또한 유교는 도가에 포함된 것으로 참을 인(忍)을 말한다. 선천대도(先天大道) 중에 하나의 극(極)이 바로 남색인데 남색은 사람들에게 냉정한 느낌을 주므로 색채 중에서 인(忍)의 성질을 체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태극이 빠른 속도로 돌아서 그 안에 있는 양극(兩極)을 잘 볼 수 없을 때에 적색과 남색이 같이 조화를 이루면 곧 자색(紫色)으로 보이는데, 내 생각에는 도가를 대표하는 색이 자색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법륜의 중심에 있는 황금색 만(卍)자는 우리 수련의 기점(基点)이 선(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황·남에서 황색이 중간에 위치하는 것은 진·선·인에서 선(善)이 중간에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중간을 취하라[取中]”고 말씀하셨는바, 그렇다면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일을 직언하여 어긋나지 않게 말을 해도 좋고 아니면 참고 말을 하지 않아도 좋은데, 우리는 마땅히 선을 취하여야하며, 어떻게 하던지 간에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해야한다.
진선인(眞善忍)이 만사만물(萬事萬物)을 만들어 내듯이, 삼원색(三原色)은 풍부한 다채로운 대천세계를 구성한다.
2. 입자 중에서 “三”
위와 같이 색채 중에서 진선인 우주특성을 체현해 낼 수 있다면 기타 사물 중에서는 어떻게 체현될까? 모두 삼(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중에서 여러 차례 각종 입자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중학교 교과과정에서 모두 원자는 양성자, 중성자, 전자로 구성되어있다고 배웠다. 그렇다면 이런 명사들이 대법서적 중에 나온다면 당연히 법리(法理)가 있을 것이다.
그림4는 헬륨원자의 모형이다. 기왕에 태극중의 적색이 +이고 양(陽)이라고 한다면 양성자가 +극을 띠고 있으니 태극중에서 +극이자 양극(陽極)이 되므로 나는 적색으로 양성자를 표시하였다. 그렇다면 원자 중에서 진(眞)의 성질을 체현한 셈이다. 태극 중의 남색(藍色)은 음(陰)이고 전자도 음극(陰極)을 띠므로 태극 중의 음극에 해당하므로 남색으로 전자를 표시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원자 중에서 인(忍)의 성질을 체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중성자는 어떻게 될까?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적색과 남색을 더하면 하나의 태극이자 하나의 만자 부호가 된다. 또한 양성자와 전자의 질량을 합하면 기본적으로 중성자와 같아지므로 그러므로 중성자는 법륜 중의 만(卍)자에 해당하며 원자 중에서 선(善)의 성질을 체현한 것이다.
나는 미시적으로 원자와 그 이하의 작은데 까지, 거시적으로는 우주와 그 이상의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로 같은 규율로 구성되었음을 알게되었다. 《논어(論語)》 중에서 “그렇다면 “불법”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전에는 줄곧 “그는 우주의 특성 “眞,善,忍(쩐?싼?런)”이 부동한 층차에서의 부동한 논술로서, 다시 말해서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도(道)”이자,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법(法)”이다.”에만 집중해서 보았는데 비교적 이해가 잘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앞의 한 구절, 즉 ” “불법”은 입자(粒子) 분자(分子)로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더욱 작은 데로부터 더욱 큰 데 이르기까지의 일체 심오한 비결을 꿰뚫어 보는 견해로서, 포괄되지 않은 것이 없고 누락된 것이 없다.”를 다시 보게되었으며 새로운 이해가 있게 되었다.
우리 이 공간의 만사만물(萬事萬物)은 모두 원자로 이루어진 분자(分子)로 구성된 것이다. 처음에 법을 공부할 때는 강철도 선(善)을 체현할 수 있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공기의 미립자·돌·나무·흙·강철·인체·일체 물질 중에 모두 眞,善,忍(쩐?싼?런)이란 이런 특성이 존재한다. 고대에서는 오행(五行)이 우주의 만사만물을 구성한다고 하였는데, 모두 眞,善,忍(쩐?싼?런)이란 이런 특성이 존재한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백해졌다.
당연히 양성자, 중성자, 전자도 또한 더 미시적인 입자로 구성된 것이며 그러므로 그들 각자도 진선인의 특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마치 《선을 알기 쉽게 해설(淺說善)》에서
“善은 우주의 특성이 부동한 층차, 부동한 공간에서의 표현이며 또한 大覺者들의 기본 본성이다. 그러므로 한 수련자는 반드시 善을 수련해야 하며 眞 善 忍(쩐·싼·런) 우주특성에 동화되어야 한다. 방대한 天體는 우주의 眞 善 忍(쩐·싼·런) 특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대법이 전해 나오게 됨은 그가 우주 중의 생명들에게 준 선천적 역사특성의 재현이다. 대법은 원용(圓容)한 것으로서, 眞 善 忍(쩐·싼·런) 세 글자를 갈라놓아도 마찬가지로 眞 善 忍(쩐·싼·런)의 특성을 완벽히 구비하고 있다. 왜냐하면 물질은 미시적인 물질로 구성되었으며 미시적 물질은 또 더욱 미시적인 물질로 구성되어 줄곧 끝없기 때문이다. 그럼 眞 역시 眞 善 忍(쩐·싼·런)으로 구성되었고, 善 역시 眞 善 忍(쩐·싼·런)으로 구성되었으며, 忍은 마찬가지로 眞 善 忍(쩐·싼·런)으로 구성된 것이다. 도가에서 眞을 수련함은 어찌 眞 善 忍(쩐·싼·런)을 수련함이 아니겠는가. 불가에서 善을 수련함은 또 어찌 眞 善 忍(쩐·싼·런)을 수련함이 아니겠는가. 사실 표면형식만 다를 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선의 역량은 상당히 큰 것이다.”(《싱가폴 법회에서의 설법》)
이전에 한 동수가 발정념을 할 때 사부님께서 공중에 뜨신 채로 발출(發出)하신 것이 모두 하나 하나 “선(善)”이라는 글자임을 보았는데, 보고나서 그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사부님께서 《전법륜》중에서 말씀하신 “강대한 열중자”를 방출하셨다는 말씀과 또한 중성자는 에너지가 큰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선(善)이었던 것이다.
또한 기왕에 물질과 정신이 일성(一性)이라면, 우리가 심리적인 평형을 이루지 못할 때에 우리 자신의 물질도 분명히 평형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인체를 하나의 원자(原子)로 비유한다면, 어떤 사람이 울분을 참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忍氣呑聲] 감히 사악한 세력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러면 그는 응당 먼저 일부분의 전자(忍의 체현)를 양성자(眞의 체현)로 전환시키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더 많은 양성자를 닦아 내야할[修出]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만족스럽지 못한 일을 보면 사나운 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던 말던, 자기 스스로는 상대방에 대해 책임을 진다고 여기면서 정의를 위해 의로운 주장을 한 것[仗義執言]이라고 여기지만, 결과적으로 상대방은 견디기 어렵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는 응당 먼저 일부분의 양성자를 전자로 변하게 하거나 혹은 직접 전자를 닦아내야[修出] 하며 자신의 참지 못하는 성격을 참을 수 있게 만들어야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겉으로는 평형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과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 아주 적지만, 단 내심(內心)으로는 모순이 첩첩이 쌓여있다면 그렇다면 일부 양성자와 전자를 중성자로 만들어서 진정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지금 다시 대천세계를 보니 아! “법은 없는 곳이 없구나[法無處不在]”
이상은 개인의 인식일 뿐이니 단지 참고로 제공합니다.
영문위치 : http://www.pureinsight.org/pi/articles/2003/8/11/1769.html
발표시간 : 2003년 7월 12일
문장분류 : 문명신견>언어문화
원문위치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3/7/12/2245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