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절 : 정법으로 창궐하는 사악을 제거
우주 중의 정사대전(正邪大戰)
제 4기 43 수
영문:
Arms will be heard clashing in the sky:
That very same year the divine ones enemies:
They will want unjustly to discuss the holy laws:
Through lightning and war the complacent one put to death.
공중에선 무기가 충돌하는 소리가 들린다.
같은 해에 신성한 것이 적이 된다.
그들은 불공정하게 신성한 대법을 토론하고
번개와 전쟁이 자만하는 자를 죽음에 몰아넣는다
이 시는 1999년 우주에서 사악한 “구세력”이 지상의 가장 악한 무리-강택민을 두목으로 하는 중공사악을 조종해 파룬궁을 박해하고 우주중의 한바탕 정사대전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 이 대전은 인류사회에 박해와 반박해의 투쟁뿐 아니라 각각의 우주 공간에서 정의와 사악한 세력 사이의 결전을 표현한다. 이 정사대전은 또 우주 중생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본시의 첫구 “공중에선 무기가 충돌하는 소리가 들린다.” 는 것은 인류 공간에서의 공중전이 아니고 우주 공간의 구세력이 대법제자에게 진행하는 교란과 파괴를 말한다. 각 공간에 모두 대법을 파괴하는 사악한 생명이 있어서 인간세상의 사악을 조종해 파룬궁을 박해한다. 이런 썩은 귀신과 마의 교란을 제거하자면 파룬따파 정법의 역량이 각 우주공간에서 이런 마들을 직접 제거해야 한다. 대법제자들의 발정념은 바로 대법이 부여한 신통(神通)으로 직접 악을 제거한다. 이것이 바로 다른 공간의 격렬한 전투인 것이다.
제 2구, 3구
“같은 해에 신성한 것이 적이 된다. 그들은 불공정하게 신성한 대법을 토론하고”
는 1999년 7월 후 사악한 구세력이 파룬따파와 적이 되어 형식상 “신성한 대법을 토론”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요소를 정법의 길에 집어넣으려는 것이며 대법과 사부를 파괴하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불공정”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우주와 우주 중의 중생은 모두 파룬따파란 “신성한 대법”으로 구도해야 하고 중생은 이 대법에 동화해야 하는 것이지 우주 과거의 법리로 “신성한 대법을 토론”해서는 안 되고 심지어 최후에 신성한 대법을 고험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구절 “번개와 전쟁이 자만하는 자를 죽음에 몰아넣는다”
는 말은 이런 자만하는 구세력이 우주 정사의 대전에서 제거되어 소멸된다는 뜻이다.
비록 1999년 7월 이후 사악 세력이 매우 창궐했지만 이 한 수의 시에서는 우주대전의
“번개와 전쟁” 중에서 자만하는 구세력이 사망해 떨어진다는 것을 예언해 놓았다.
박해와 계시
제 2기 27수
영문:
The divine word will be struck from the sky,
One who cannot proceed any further:
The secret closed up with the revelation,
Such that they will march over and ahead.
신성한 언어가 하늘로부터 공격당할 것이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비밀은 계시(록)에 감춰져 있다.
그들은 여전히 앞으로 전진할 것이다.
이 시에서 말하는 것은 신성한 대법이 어느 시기에 “천상에서 온” 우주 구세력의 공격을 당
할 것이며 이 공격의 비밀은 성경 계시록에서 말하는 아마겟돈–최후의 정사대전–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성한 언어(The divine word)” 는 바로 파룬따파를 가리키며 우리는 앞의 3장 5절 제3기 2수에서 “신성한 언어는 모든 물질에 전할 것이다(The divine word will give to the substance).” 라고 한 곳에서 “신성한 언어”도 역시 파룬따파를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신성한 언어가 하늘로부터 공격당할 것”은 바로 1999년 7월 파룬따파가 하늘에서 온 우주의 “구세력”의 공격을 받으며 인간에서의 표현은 중공 사악이 파룬궁 수련생을 잔혹하게 박해하는 것을 예언한 것이다. 제 2구에서 말하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구세력의 교란과 파괴 때문에 파룬따파의 정법노정이 대법의 요구하는 가장 좋은 과정으로 진전할 수 없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사악의 박해가 이미 발생했기 때문에 구세력의 교란을 제거하고 사악의 박해를 반대하는 것은 정법노정의 일부분이 되었고 정법은 여전히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 4구에서 “그들은 여전히 앞으로 전진할 것이다”라고 했다.
주의할 것은 이 시에서 “구세력”의 공격과 사악의 박해가 “계시록에 비밀이 감춰져있다” 고 언급한 것이다. 여기서는 “구세력”이 정법에 대한 교란과 파괴 및 사악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는 계시록에서 말한 “아마겟돈”-최후의 정사대전-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사실 <제세기> 예언시의 신의 계시를 통해 우리는 앞의 각 장과 절에서 이미 <계시록>의 많은 수수께끼를 밝혔다. 예를 들어 사악의 짐승이 무엇인지 짐승의 수 “666”이 무슨 뜻인지, 대음부(大淫婦)란 누구인지, 바빌론의 큰 성은 어디에 있는지,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인-최후의 심판을 주지하는 신은 누구인지 등이다. 이런 것들은 사실 “구세력”이 정법을 교란하고 파괴하며 파룬궁을 박해하는 “아마겟돈” 임을 질서정연하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럼 어떤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성경 계시록>에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언급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성경 계시록> 과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일반적으로 어린양(羔羊)이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수년 전 “<성경 계시록>중 짐승의 도장과 어린양의 도장”이라는 글에서 어린양(羔羊)은 착할 선”善”자를 대표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한자의 “善”은 한 마리 양 (一只羊)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중 “羊”자는 “善”자의 가장 위에 있으며 하며 “一”자는 “善”자의 중간에, “羊”자 아래에,그리고 “只”자는 “善”자의 가장 아래에 있으며 거꾸로 쓰여진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성경 계시록>에서는 최후의 정사대전 중 “어린 양”이 “144,000”명을 데리고 사악의 짐승과 싸운다고 되어있다.
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여기의 144,000명은 바로 계시록에서 언급한 영생하는 신의 도장을 받은 기독교도를 말하는데 이 사건은 계시록 제7장에 서술되어 있다.
계시록 7: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계시록 7: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계시록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계시록 7: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계시록 7:5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계시록 7: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계시록 7: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계시록 7: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시록 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7장 9절의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아무도 셀 수 없는 숫자이며 각 국가와 민족 및 각 방향에서 온 것이다.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선” 사람들은 계시록 14장 1절에서 말한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럼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계시록 7:13에서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그러자
요한은 계시록 7:14에서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 장로는 보좌 주위에 앉은 24장로인데 그는 고의로 요한에게 묻는다. 왜냐하면 흰 옷 입은 사람의 내원이 특수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의 사람들이 아니며 그래서 기독교의 성도로서 <계시록>을 집필한 요한은 이 흰옷 입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몰랐고 요한은 이 장로에게 말한다 (계 7:14)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 장로는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이란 박해의 대 고난으로부터 나오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는 수련 중에 선(善)을 견지하여 설령 박해중 피의 댓가를 지불하면서도 “진선인”을 견지하고 자기의 심령과 육체를 모두 정화한 것을 말한다. 그러니 “흰 옷 입은 사람”은 바로 사악이 박해하여 “대환란에서 나오는” 파룬궁 수련생을 말한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더는 길을 잃을 수 없어
제 1기 53 수
영문:
Alas, how we will see a great nation sorely troubled
and the holy law in utter ruin.
Christianity (governed) throughout by other laws,
when a new source of gold and silver is discovered
오호라, 우리는 어떻게 눈을 뜨고 보고만 있는가
한 위대한 나라가 홀로 재난을 당하고
신성한 법이 철저히 훼멸되는 것을.
기독교는 다른 법에 지배를 받고
금과 은의 새로운 원천이 발견될 때
이 시는 우리 본서의 서막에서 이미 해독했다. 그것은 중공이 중국대륙에서 파룬궁을 박해해 “한 위대한 나라가 홀로 재난을 당하”게 하는데 이 박해는 애당초 이같이 기세가 흉흉해 “신성한 법이 철저히 훼멸되는” 위험에 처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른 법에 지배를 받고” 있어 최후 정사대전의 관건적인 시각에 그들은 밖에서 길을 잃고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취함을 예언했다. 그래서 500년 전에 신은 <제세기>를 통해 그들에게 “오호라, 우리는 어떻게 눈을 뜨고 보고만 있는가……” 하며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파룬궁에 대한 중공의 박해는 매우 사악하다. 이런 박해에 대해 서양 국가와 국민들은 생소하다. 파룬궁 수련생들의 끊임없는 진상 폭로로 많은 선량한 사람들과 단체들, 심지어 정부 기구까지도 중공의 박해에 대해 질책을 하는데 그중에는 많은 선량한 기독교인과 기독교 단체가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기독교 사회는 중공의 파룬궁의 박해에 대해 지금까지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것의 주요 원인은 예언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독교가 다른 법에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의 많은 종교들은 종교 문파의 견해에 얽매여 흔히 다른 신앙이 사악의 박해를 받는데 대해 무관심하다.
본 시의 마지막 구절은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는데 금전 이외에 동원할 수 있는 일체 자원, 그것의 모든 정부기구, 선전기구, 외교채널, 종교협회 등을 동원하여 파룬궁에 대한 모함과 박해가 미친 듯한 정도에 도달했음을 말한다.
왜 종교 신도들이 때로는 보통 사람에 비해 선량한 마음이 없는가? 어떤 정교(正敎)도 본래는 “선”을 말한다. 우리는 앞에서 “어린 양”이 선을 나타낸다고 했고 기독교도 당연히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다. 서양의 보통 사람들은 민주와 인권을 알며 그들은 “나는 당신의 관점에 찬동하지 않으나 당신의 합법적 권리는 수호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흔히 이런 소위 신앙을 가진 “선남선녀”들이 기타 신앙인이 비인도적인 박해를 당하는 것을 볼 때 그 행동은 보통 사람보다도 못한데 그 “선”은 어디로 갔는가?
고지성(高智晟 가오즈성) 변호사는 중국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이 박해받는데 대해 정의로운 직언을 수차례 했다. 그는 기독교인이 된 후 말했다. “내가 기독교를 몰랐을 때 나는 사람으로서 사람의 측면으로 사회 정의에 대해 이해하며 그들을 대신해서 정의로운 행동을 했다. 내가 기독교의 정의를 알았을 때 나는 더욱 더 박해받는 사람을 위해 행동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만약 기독교가 오늘날 중국 사회에 온다면 이렇게 많은 생명, 이렇게 많은 수련자가 이같이 대규모로 박해를 받는 것을 보고 기독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구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의로운 말을 하지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감히 당당하게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어떤 사람이라도 도덕표준에서 최소한의 인도(人道) 요구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그가 믿는 것이 무엇이든지 모두 소용이 없다.
나는 이 책에서 수많은 신의 계시를 밝혔는데 어떤 것들은 시간이 지나야 이해될 것이지만 한 가지는 이렇다. 당신은 누가 진정한 신인지 모를 수 있지만 누가 사악인지는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악은 비인도적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인도만 알면 분별할 수 있고 사악과 싸울 수 있으며 사악과 싸우는 사람들은 잘못이 없는 것이다. 중공 사악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동시 중국의 광대한 가정교회 및 기타 정신 정교를 박해했다.
모두들 말세가 이미 도달했고, 정사대전이 있고, 최후의 심판이 있으며 중공이 세상에 드문 사악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왜 신을 믿는 사람들은 아직도 길을 잃고 있는가?
신은 왜 사람들에게 <계시록> 이나 <제세기>등의 예언서를 남겨주었는가? 설마 사람들에게 그저 조용히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인가?
아니다. 신은 사람들이 <계시록>에서 정확한 계시를 얻어 사악의 짐승과 그것의 도장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알고 짐승의 도장을 말소해 정의와 사악을 구분하며 아마겟돈에서 어린 양을 따라 사악과 싸우는 용사가 되며 천국으로 갈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악도 분별하지 못하거나 사악이 중공임을 알면서도 정의를 지지할 용기가 없다면 그를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진정 신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정의가 무엇인지 알 것이며 정의를 수호할 것이다.
최후의 시간은 그리 많지 않으며 정사대전 역시 최후 단계에 도달했다. 진정으로 신을 믿는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어쩌면 최후 심판 중에 전지전능한 신은 당신에게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너는 최후의 정사대전에서 무엇을 했느냐?”
발표시간 : 2008년 2월 6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8/2/6/5083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