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6장 기우는 하늘을 혼자선 지탱하기 어려워
구(舊)우주 상생상극의 이치는 바른 것(正)이 있으면 삿된 것(邪)이 있도록 조성했다. 창세주(創世主)와 정신(正神)은 모든 생명을 구원하려 하지만 부면(負面)적인 생명들은 중생을 파괴하고 훼멸하려 한다. 그것들은 소위 무신론, 유물론, 실증과학을 만들어 내어 정신과 물질을 분리시켰고 사람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사물만 믿게 만들었으며, 정신과 신앙을 포기하고 더는 신을 믿지 않게 하여 최후에 신의 버림을 받도록 했다.
사탄은 공산유령을 끌어들여 진화론과 무신론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인류로 하여금 사람을 창조한 신으로부터 철저히 멀어지게 했다. 당시 도덕의 몰락은 이미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 거짓과 폭력을 배경으로 한 공산당이 전 세계에 전파할 시장을 갖게 된 것은 바로 도덕이 몰락한 직접적인 결과였다. 도덕이 쇠퇴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비로소 공산 마교(魔敎)가 존재할 공간이 나타난 것이다.
장개석이 살던 시대는 세계 최초로 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공산국가 소련이 탄생하고 2차 대전 이후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더욱 왕성해지던 시기였다. 하지만 인류는 공산주의의 사악한 본질에 대해 똑똑히 인식하지 못했고 객관적인 국제정세도 공산주의의 확장을 도와주었으며 서방에 공산주의를 방어할 진영이 아직 형성되기 전이었다. 때문에 장공(蔣公)의 공산당에 대한 인식과 노력은 세계 지도자들 중에서 그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었으며 한손으로는 손뼉을 칠 수 없었다. 장공의 공비토벌은 한차례 성공에 접근했지만 서안사변으로 인해 막판에 수포로 돌아갔고 공산당은 생존하고 성장할 시간과 공간을 얻었다.
중국의 국공전쟁(國共戰爭 국민정부와 공산당의 전쟁)은 역사적으로는 대부분 내전(內戰)으로 인정하지만 사실 우주의 정사대전(正邪大戰)이 인간 세상에 투영된 것이다. 공산당이 발동한 전쟁은 무력에 의존해 국제사회에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보급한 것으로, 오직 공산당이 발동한 전쟁에 의지해야만 했다. 다시 말해 세계를 적화시킬 전쟁, 즉 국제전쟁이 필요했다. 국공전쟁에 참여한 공산당 세력 중에는 조선인과 일본인도 있었고 또 소련의 지원이 있었으니 사실상 중국에 대한 국제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이었다.
부면(負面)적인 생명들은 이번 차례 인류문명 초기 정교(正敎)가 법을 전하고 사람을 구할 때 마난(魔難)을 만들어냈고, 또 최후 우주대법이 널리 전해질 무렵 보다 큰 마난과 고험을 배치했다. 이를 위해 그것들은 보다 엄혹한 사회환경을 만들어 냈고, 신(神)과 인과를 믿지 않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산당을 만들어냈다. 또 그것으로 하여금 극권전제국가(極權專制國家)를 만들어 이후 사용에 대비하게 했으니 천시(天時)가 좋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또 항전 말기 국군 주력부대가 서남부에 집중되어 있을 때 공산군은 일본군 세력이 약한 후방 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해 화북지역에 근거지를 만들었다. 또 소련이 미국 및 영국과 합의한 얄타회담은 스탈린이 순조롭게 동북을 점령하게 했다. 여기에 미국의 대중국 전략착오가 더해져, 국군이 승리할 기회를 여러 차례 교란하고 파괴했으니 비적토벌전쟁은 시작부터 지리적 우세(地利)를 잃었다.
장공은 민족의 대의를 지키고 민족 존엄을 수호하기 위해 미국, 영국, 소련 거두들의 미움을 사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공은 오히려 아첨능력을 극진히 발휘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비위를 맞추는 외교를 펼쳤다. 국내 민중들에게는 통일전선이란 사기술로 각종 이익을 약속하면서 널리 인심을 얻었다. 국군 고위 장성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사한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공산간첩의 침투를 받아 주저하거나 방황했으며 반란한 이들도 많았다. 게다가 국난을 눈앞에 두고 개인의 이익 때문에 탐오(貪汚)한 자들이 많았으니 이는 인화(人和)마저 조화롭지 못한 것이다.
비록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를 모두 얻지 못했음에도 장공은 여전히 최대의 노력을 경주해 공산 사탄과 싸웠으며 역사에 우주 정사대전이 인간세상에서 펼친 승부를 남겨놓아 세인들로 하여금 무엇이 정(正)이고 공산사탄이 얼마나 사악한지 깨닫게 했다.
장공이 보기에 선악(善惡)과 득실(得失)은 모두 상대적이었다. 1944년 5월 31일 일기에서 그는 “매사에 실패가 있으면 반드시 성공이 있기 마련이고, 성공이 있으면 반드시 실패가 있기 마련이다. 오늘 악한 원인이라고 인정받는 것이 어쩌면 후일 좋은 결과가 될 수 있다. 오늘 얻은 악한 결과는 예전에 오히려 좋은 원인으로 여겨지던 것일 수 있다. 이를 통해 입증하자면 모든게 모순 속에 있지 않은 게 없고 절대적인 선과(善果)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적었다.
1. 대국(大局)이 정해지길 기다리다
장개석이 보기에 천지가 개벽된 이래 오늘날까지 세상사의 변화는 마치 장기판과 같았다. 그는 일찍이 자작시 《장기를 노래하다(詠象棋)》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피하기 힘든 온갖 시련 한판 장기와 같네.
마(馬)를 죽이고 차(車)를 돌림은 이로부터 시작되니
만방이 모두 감개한들 또 어찌하리?
茫茫龍漢到今時
百折難逃一局棋
殺馬回車從此始
萬方同慨更何之
제1차 세계대전이 공산당이 러시아에서 정권을 찬탈하게 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공산세력이 홍수나 맹수처럼 유라시아대륙에 밀려들게 했다. 전후 공산주의 진영은 진일보로 확장되었고 세간에는 공산사회와 자유사회가 대치하면서 수십 년의 냉전(冷戰)이 시작되었다.
1936년 독일, 이탈리아, 일본 3국이 ‘반(反)코민테른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을 기초로 한 일종의 정치군사동맹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반공(反共)을 명분으로 시작한 전쟁은 오히려 공산당을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삼국군사동맹은 우선적으로 소련을 겨냥했다. 주요 내용은 조약국 사이에 코민테른 활동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면서 긴밀하게 협력하고 필요시 협의하거나 방지조치를 실시하고, 또 조약국 중 일방이 소련의 공격이나 위협을 받으면 다른 쪽은 소련에 유리한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즉각 ‘공동이익을 보호’하는 조치를 상의해야 하며, 설령 쌍방이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련과는 본 협정의 정신에 어긋나는 그 어떤 정치적 조약도 체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때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 유화정책을 취했다. 그 목적 중 하나는 공산주의 소련에 대항해 유럽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감소시켜 독일을 소련공산당과 유럽대륙 사이의 장벽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1940년 1월, 히틀러의 개인 부관 슈문트(Schmundt) 장군은 최근 내게 그가 히틀러와 소련문제에 대해 몇 차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히틀러의 결론은 오직 하나였으니 바로 스탈린이 전 유럽을 정복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독일 국방군은 소련 홍군과 유럽 사이에서 유일한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히틀러는 동방에서 오는 위험을 제거하고 점차 유럽으로 침투하는 볼셰비키즘을 유럽에서 몰아내는 것이 독일의 사명이라고 보았다. 그는 줄곧 이 방면에서 사태의 발전을 유심히 지켜보아왔고 필요시 행동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멀어진 승리 : 독일군 장교들의 2차 대전 회고록》)
1941년 독일은 일본과 연합해 소련을 침공했다. 히틀러는 “독소관계는 지금 갈수록 악화되고 있으며 독소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Ribbentrop)는 “만약 일본이 남진 중에 곤란을 느낀다면 일본이 북진해서 독일의 소련진공을 돕는 걸 환영한다고 했다.”(《태평양전쟁으로 가는 길》 아사히신문)
당시 일본 육군에는 세 가지 주장이 대치하고 있었다. 바로 남진(南進)을 강화하자는 주장, 북진(北進)에 중점을 두자는 주장, 때와 시기를 기다려보자는 주장이 그것이다. 일본 육군성과 참모본부는 ‘형세변화에 적응하는 국방 및 국가정책’을 제정해 남과 북을 동시에 고려하되 시기를 기다려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정책을 취하게 된 원인은 “북방문제를 해결하자면 반드시 대규모 무력을 행사해야 하고 이에 필요한 전략물자 특히 액체연료(석유)가 필요한데 사실상 반드시 남방에서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섣불리 북방문제 해결을 강행하는 것은 위험하다.”(《대동아전쟁사(大東亞戰爭史)》)고 본 것이다.
일본 외상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는 독일을 도와 소련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과 독일이 전쟁을 시작한 지금 일본은 마땅히 독일과 맺은 협정에 따라 소련을 토벌해야 한다.”
반면 일본 육군참모총장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는 이에 반대했다.
“지금 일본육군의 절대부분이 중국 전장(戰場)에 말려들어가 있기 때문에 외상의 주장은 사실 불가능하다. 군 지휘부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전쟁준비인데 아직은 참전을 말할 수 없다. 다만 관동군에 대해 말하자면 전쟁준비를 하려면 반드시 40~50일은 필요하고 지금의 병력을 전시체제로 전환시켜야 한다. 더 나아가 (소련에 대한) 공격을 발동하려면 또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기간 내에 독소전쟁의 전개상황 역시 분명해질 것이다.”
(《대동아전쟁사》)
장개석은 군사적인 각도에서 소련에 대한 독일의 군사행동은 천시(天時)와 지리(地利) 모두 우세하지 못하다고 결론을 맺었다.
“천시로 말하자면 소련의 영토는 모두 아주 춥고 얼어붙은 한대(寒帶)지역이고 그중 일부는 추위와 더위가 모두 극심하고 변동이 심한 사막이다. 때문에 소련 영토에서 1년 중 전투에 적당한 계절은 불과 넉 달에 불과하다. 이것이 소련이 천시에서 지닌 아주 유리한 조건이다.
또 지리(地利)를 보자면 소련은 북쪽으로 북극해라는 자연적인 방벽이 있고 동쪽은 베링해협과 캄차카반도로 둘러싸여 있으며, 서쪽은 발트 해에 접해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천연적으로 우수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 오직 남쪽만 내륙지대에 속하지만 이곳 역시 산악과 하천이 자연적인 울타리가 되어준다.
또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에 걸쳐 213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다. 소련은 이런 넓이와 깊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방어하면서 지구전(持久戰)을 펼치기에 아주 뛰어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만약 적이 동쪽에서 공격하면 서쪽으로 후퇴할 수 있고 반대로 서쪽에서 공격하면 동쪽으로 물러나 지구전을 펼칠 수 있다. 이것은 러시아가 지닌 지리적으로 극히 우월한 조건이다.
러시아가 이처럼 천시와 지리에서 우세를 지녔기 때문에 서방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은 어느 나라도 이기지 못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볼 때, 서방 나라들이 비록 일찍이 나폴레옹과 빌헬름 2세 및 히틀러가 러시아 본토를 공격한 적이 있고 또 모스크바를 점령한 적도 있지만 결국에 가서는 이런 천시와 지리적인 조건을 극복할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장개석 《반공과 러시아에 대항하는 기본론(反共抗俄基本論)》)
1941년 6월 독일군은 마침내 바르바로사 작전을 발동해 대군을 3갈래로 나눠 파죽지세로 폴란드로 진격했다. 선봉부대는 단숨에 모스크바 시 외곽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소련의 10월 날씨가 진창을 만들어 독일군이 자랑하던 기계화 부대의 이동이 어려워지자 진격속도 역시 뚜렷하게 저하되었다. 12월에 이르자 소련의 매서운 겨울이 닥쳐왔고 독일군은 추운 날씨 때문에 진격할 힘을 상실했다.
독일 장군 구데리안은 이렇게 회고했다.
“이 엄동설한에 소련의 들판은 곳곳이 큰 눈으로 뒤덮였고 찬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었고, 공격노선상의 모든 목표가 이미 큰 눈에 덮여 버렸다.”라고 했다.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지역에서 차량을 타고 한참을 간 후에야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우리 부대를 만날 수 있었다. 반면 새로 전선에 투입된 소련의 시베리아 군대는 잘 먹고 따뜻하게 입었으며 아울러 동계작전준비가 충실했으니,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독일군은 이런 혹한의 날씨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고 소련의 기온이 영하 32도까지 떨어지자 허둥대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구데리안 회고록》)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