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천고영웅인물】 장개석(29): 중공의 구세주가 된 일본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일본군 중공의 구세주가 되다

1964년 모택동은 일본 사회당 방중대표단을 접견했을 때의 일이다. 일본대표단을 책임진 사사키 고조(佐佐木更三)와 구로다 히사오(黑田壽男)가 중국 인민들에게 일본의 침략에 대해 사과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모택동은 “전에 일본 친구와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일본 황군(皇軍)이 중국을 침략한 일에 대해 몹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나는 ‘아닙니다! 당신들 황군이 중국을 침략해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 않았더라면 중국 인민은 장개석에 대항해 단결하지 못했을 것이며 정권을 탈취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러므로 일본 황군은 우리 중국인들에게 좋은 스승이자 다시 말해 큰 은인으로 구세주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라고 했다.

사사키가 “오늘 모 주석은 아주 관대하고 도량이 큰 말씀을 하셨습니다. 과거 일본 군국주의가 중국으 침략해 당신들에게 아주 큰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해 우리 모두 몹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라고 사과를 표시하자 모택동이 즉각 응답했다.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본 군국주의는 중국에 아주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중국 인민이 정권을 탈취하게 했습니다. 당신들 황군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정권을 탈취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 한 점에서 나는 여러분과 의견이 다르니 우리 두 사람에겐 모순이 있군요.(모두들 웃으면서 회의장 분위기가 활발해짐)”(《모택동사상만세(毛澤東思想萬歲)》)

1938년 11월 18일 장개석은 중공의 《당의 건설(黨的建設)》을 읽은 후 일기에서 “공산당은 코민테른이 백년간 비밀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기율이 가장 엄하고 방법이 가장 정교하며 조직이 가장 치밀해 그 어떤 당파(黨派)도 따를 수 없다. 하지만 수단이 가장 악독하고 인정이나 의리 도덕은 땅에 떨어져 남아 있지 않으니 설령 그 사람이 민족국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해도 얼마나 되겠는가.”라고 감탄했다.

1941년 초 국민정부는 중앙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멋대로 후방을 교란한 신사군(新四軍)을 단속해 사령관 섭정(葉挺)을 체포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환남사변’(皖南事變 또는 신사군 사건)이라 한다.

장개석은 이 사건에 대해 “우리가 이번에 신사군을 처리한 사건에 대해 말하자면, 내부와 외부 인사를 막론하고 모두 알다시피 이것은 완전히 우리가 군기를 바로잡은 문제다.… 무릇 명령을 위반하고 군기를 어지럽힌 군인은 반드시 징계 받아야 한다. 하물며 군사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켜 우군을 습격하고 방어지역을 침범해 항전하는 군대를 방해했으니 반드시 해산시켜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그리스도의 가르침 중에 일반인들에게 잘못을 저지른 죄인에 대해 77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지금 신사군의 잘못은 이미 77번을 초과했으니 우리가 예수님의 관대함을 지녔다 해도 잘못을 저지르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고집스레 깨닫지 못하는 군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참거나 용서할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이다.”(《군기를 바로잡아 항전을 강화(整飭軍紀加強抗戰)》 1941년)

장개석이 보기에 중공과 왕정위는 모두 매국노로 각자 그 주인을 위해 충성했다. 1943년 9월 8일 일기에서 “공산당의 러시아 앞잡이 노릇과 왕정위의 왜구 앞잡이 노릇은 내우외환의 정세에도 전혀 줄지 않았다.”라고 했다.

중공은 소련이란 배경이 있는 동시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대대적으로 찬양하면서 국제여론의 동정을 얻었다. 장개석은 1944년 2월 26일 일기에서 “중공은 미국에서 우리 군이 이미 일본을 이기지도 못하면서 중공을 공격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며 선전했다. 이것은 작년에 우리 정부가 장차 일본에게 투항할 거라고 선전한 수단과 차이가 없다. 걱정스런 것은 미국 조야(朝野)에서 이미 이들의 선전에 미혹되어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1944년 항전의 승리를 눈앞에 두고도 장개석은 오히려 낙관적이지 않았다. 그는 7월 12일 일기에서 “국가의 앞날에 많은 어려움이 있는데 특히 러시아와 중공 문제가 가장 크다. 하지만 이것은 곧 국가존망이 달린 문제다.”

“1945년 4월 30일. 사정은 이랬다. 이해 4월 일본군은 개봉(開封)지역에서 공격을 시작해 연말까지 중국을 군사적으로 붕괴되는 상태로 만들려 했다. 때문에 모택동의 주요학설에 근거해 제정된 유격전술이란 간판을 걸고 관망만 하던 중공의 전략은 1944년 끝나버렸다. 이때 중앙정부의 역량은 이

미 일본군의 맹렬한 공세로 인해 크게 약화되었다. 모택동은 이 기회를 노렸다. 이 기회를 노리기 위해 그는 이전에 적극적인 항일활동을 거절했고 이 때문에 민족통일전선을 실현할 수 없었다. 현재 중공중앙 주석(역주: 모택동)은 행동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인정했다. 권력투쟁에서 승리할 전망이 명확해지면서 현실적으로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장개석의 군대는 무너졌고 정부기구는 어수선해졌다. 통일전선의 정치적 동맹은 이미 기진맥진해졌다. 일단 내전이 발생하면 지금으로선 성공의 기회가 쌍방에게 이미 엇비슷한 상태였다.”(《연안일기(延安日記)》)

1945년 8월 13일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직전 장개석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미래의 간고함은 항전의 10배일 것이다.”

장개석의 진정한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