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육지동(陸志仝)
【정견망】
‘칠덕무(七德舞)’의 원래 제목은 ‘칠덕무(七德舞)-반란을 다스리고 왕업을 펼치다(美撥亂,陳王業也)’이다. 이 시는 당 태종 이세민의 간고했던 창업 일화를 노래하고 있다.
태종이 고조 무덕(武德)시기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 군중에 이미 ‘진왕파진악(秦王破陣樂)’이 있었고 그 내용은 주로 진왕이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다 정관 7년 태종이 직접 ‘파진악무도(破陣樂舞圖)’를 만들었고 나중에 또 위징, 우세남 등에게 가사를 만들도록 명해 정식으로 ‘칠덕무(七德舞)’라 이름지었다.
여기서 말하는 칠덕이란 《좌전(左傳)·선공(宣公) 12년》에 나오는 말로 난폭한 자를 억누르고(禁暴) 무기를 거둬 싸움을 멈추게 하며(戢兵) 큰 나라를 보존해(保大) 전공을 세우며(定功﹑) 백성을 편안히 하고(安民) 여러 사람을 화락하게 하고(和眾) 물자를 풍부하게 하는(豐財) 7가지 일을 말한다.
나중에 당 헌종(憲宗) 원화(元和) 연간(805~820년) 대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운 좋게 이 춤을 감상한 후에 큰 감동을 받아 이 시를 지었다. 당시 황제와 조정 대신들에게 태종이 창업 당시의 어려움 및 상무(尙武)와 인덕(仁德)을 겸비한 정신을 잊지 말라고 일깨워주려던 것이다. 백거이의 이 시는 성률(聲律)이 우아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과거 당태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여러 가지 일화들을 포함하고 있다. 수많은 당시 중에서도 뛰어난 정품(精品)이라 할 수 있다.
【칠덕무 미발란 진왕업야(七德舞-美撥亂,陳王業也)】
원문 및 해석
七德舞,七德歌 칠덕의 춤과 칠덕의 노래
傳自武德至元和 고조 때부터 원화까지 전해왔으니
元和小臣白居易 원화 연간의 신하 백거이가
觀舞聽歌知樂意 춤과 노래를 듣고 음악에 담긴 뜻을 알게 되어
樂終稽首陳其事 곡이 끝나자 머리 조아려 그 일을 진술하네.
太宗十八舉義兵 태종께서는 열여덟에 의병을 일으키셨고
白旄黃鉞定兩京 흰 깃발과 황금 도끼로 양경(兩京 장안과 낙양)을 평정하셨으며
擒充戮竇四海清 왕세충을 사로잡고 두건덕의 목을 베어 사해를 깨끗이 하시어
二十有四功業成 스물넷에 공업을 이루셨고
二十有九即帝位 스물아홉에 즉위하시어
三十有五致太平 서른다섯에 태평성대를 이루셨네.
功成理定何神速 공을 이루고 다스림이 어찌 그리 빠르셨을까?
速在推心置人腹 자신의 마음을 미뤄 남의 속에 두었기 때문이라네.
亡卒遺骸散帛收 비단을 풀어 죽은 병사들의 유해 수습하시고
饑人賣子分金贖 굶주림에 자식 판 이들에겐 황금을 나누어 갚아주셨네
魏徵夢見子夜泣 꿈에 위징을 보시곤 자시에 눈물 흘리셨고
張謹哀聞辰日哭 장공근의 부음을 듣고는 진일(辰日)임에도 통곡하셨네.
怨女三千放出宮 원망 쌓인 삼천 궁녀 궐 밖으로 내보내셨고
死囚四百來歸獄 사형수 4백 명이 자기 발로 돌아오게 하셨다네.
剪須燒藥賜功臣 수염 잘라 태운 재 공신의 약으로 내려주시니
李勣嗚咽思殺身 이적은 울음을 터뜨리며 목숨 바칠 생각했다네.
含血吮創撫戰士 피를 머금고 상처 빨아 전사를 위로하시니
思摩奮呼乞效死 이 사마 크게 감동해 목숨 바치길 원했다네.
則知不獨善戰善乘時 이를 통해 알았노라, 태종께선 잘 싸우고 때를 잘 타셨을 뿐만 아니라
以心感人人心歸 마음으로 감동시켜 사람마음 돌아오게 하셨음을
爾來一百九十載 그로부터 190년 동안
天下至今歌舞之 지금까지 천하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歌七德,舞七德 칠덕을 노래하고 칠덕을 춤추면서
聖人有作垂無極 성인께서 만드신 것 끝없이 드리웠네.
豈徒耀神武 어찌 한갓 신묘한 무공만 빛내고
豈徒誇聖文 어찌 한갓 성스런 글만 자랑하려는 했겠는가?
太宗意在陳王業 태종의 뜻은 왕업을 널리 펼쳐
王業艱難示子孫 자손들에게 왕업의 어려움을 보여주려 하셨노라.
【주석】
① 백모황월정양경(白旄黃鉞定兩京):여기서 모(旄 máo)는 긴 소꼬리를 장대 끝에 달아 만든 깃발로 전쟁터에서 지휘할 때 사용했다. 월(鉞 yuè)은 고대 무기의 일종으로 청동이나 철로 만들었고 모양이 마치 넓고 편평한 큰 도끼를 말한다.
② 금충육두사해청(擒充戮竇四海清): 여기서 ‘충(充)’은 왕세충(王世充) ‘두(竇)’는 두건덕(竇建德)을 가리킨다. 두 사람은 태종의 천하 통일 과정에서 최대의 적수였다.
③ 망졸유해산백수(亡卒遺骸散帛收): 정관 초년 태종이 명령을 내려 전란(戰亂) 중에 전사한 사람들의 모든 유해를 거둬 제사 지낸 후 안장하게 했다. 또 추가로 명령을 내려 무연고 시신을 거둬 수습한 사람에게는 관에서 비단을 내려 감사를 표시하게 했다.
④ 기인매자분금속(饑人賣子分金贖): 정관 2년 큰 기근이 발생해 민간에서는 굶주림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넘기는 일마저 생겨났다. 태종이 이 소식을 듣고는 황실 창고의 황금과 비단을 풀어 팔려간 자녀들을 다시 찾아와 그 부모에게 돌려주게 했다.
⑤ 위징몽견자야읍(魏徵夢見子夜泣): 대신(大臣) 위징의 병세가 위독하자 태종의 그의 병환을 걱정하며 근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 꿈에 위징이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을 보고는 놀라서 깨어 일어나 눈물을 흘렸다. 바로 이날 밤에 위징이 정말 사망했다. 태종은 직접 그의 비문을 써서 “옛날 은(殷)나라 고종(高宗)은 꿈에 부열(傅說)을 보고 현명한 재상을 얻었다지만 짐은 오늘 꿈에서 깨어나 어진 신하 위징을 잃었구나!”라고 탄식했다.
⑥ 장근애문진일곡(張謹哀聞辰日哭): 정관 시대 또 다른 어진 신하였던 장공근(張公謹)이 세상을 떠나자 태종이 직접 장례에 참가해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이때 측근에 있던 관리가 당황해 하며 “진일(辰日 일진에 辰이 들어가는 날)은 음양이 꺼리니 우시면 아니되옵니다.”라고 주청했다. 그러자 태종이 “군신(君臣)간에는 의리가 중해 마치 부자간의 정(情)과 같다. 안에서 정(情)이 우러나오는데 어찌 진일임을 알겠느냐?”라고 말하면서 끝까지 곡을 했다.
여기서 진일이란 일진에 진(辰)이 들어가는 날을 말하는데 이런 날은 음양의 기가 순조롭지 않아 눈물을 흘리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져 왔다.
⑦ 원녀삼천방출궁(怨女三千放出宮): 태종이 즉위한 직후 궁녀들이 깊은 궁궐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겨 궁에서 내보내 민간에서 짝을 찾도록 했다.
⑧ 사수사백래귀옥(死囚四百來歸獄): 사람의 목숨에 관련된 사건들은 태종이 직접 심사하곤 했다. 태종 6년 약 4백 명의 죄수들이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태종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을 고향에 돌아가 명절을 지내고 이듬해 가을에 다시 와서 사형을 집행하도록 했다. 그러자 이듬해 가을 모든 사형수들이 돌아왔고 단 한명도 도망가지 않았다. 이에 태종이 명령을 내려 이들을 모두 사면해주었다.
⑨ 전수소약사공신(剪須燒藥賜功臣) 이적오인사살신(李勣嗚咽思殺身): 태종은 일찍이 직접 원정에 참가하며 수하 장수들에게 깊은 은혜를 베풀곤 했다. 한번은 대장 이적(李勣)이 병에 걸려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의원이 용의 수염을 태운 재를 약에 넣어야 한다고 하자 태종이 직접 자신의 수염을 잘라 주었다.
중국 고대 특히 한당(漢唐) 시기에는 유가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아 부모님께 받은 신체 일부를 함부로 자르는 것은 큰 금기에 해당했다. 그럼에도 황제가 직접 자신의 수염을 잘라 약재로 쓰게 한 것이다. 이 약을 먹고 병이 호전된 이적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목숨으로 은혜에 보답하려 했다.
⑩ 함혈윤창무전사(含血吮創撫戰士) 사마분호흘효사(思摩奮呼乞效死): 태종 수하의 장군 이사마(李思摩)가 적의 화살에 맞자 태종이 독에 중독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직접 상처를 빨아 주었다. 상처 부위가 좋아진 이사마가 팔을 치켜들며 죽음으로써 은혜에 보답하겠노라고 외쳤다.
여기서 이사마는 원래 돌궐 귀족 아사나사마인데 당나라 황성인 이(李)씨를 성으로 하사받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37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