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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심법: 돈황비천(敦煌飛天)

글/ 석방행

【정견망】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먼저 윤회(輪迴)라는 이 개념을 말해보자.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이미 사람이 전세(轉世)한다는 설을 인식하고 있었다. 가령 《산해경(山海經)》에는 우리가 잘아는 ‘정위전해(精衛填海 정위가 바다를 메운다는 이야기)’의 이야기가 있다. 사실 여기에 바로 ‘전세(轉世)’란 요소의 경험이 포함되어 있다. 원래 염제(炎帝)의 딸이 동해에 갔다가 익사했는데 나중에 한 마리 작은 새로 환생해 서산(西山)의 나뭇가지와 돌을 물고 와서는 동해를 메우려 한다는 이야기다.

《산해경》은 역대로 선진(先秦) 시기 고적(古籍)으로 인식되어 왔고 중화 상고(上古)시기의 일종 백과사전이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 와 〈주본기(周本紀)〉에 각각 ‘현조생상(玄鳥生商 현조가 상 민족을 낳은 시조라는 전설)’과 포사(褒姒 역주: 용의 타액이 여종의 몸에 흘러들어가 태어났다고 한다)의 내력이 기술되어 있다. 이 자체는 현재 생각해도 역시 윤회 현상이다. (상세한 것은 관련 자료를 볼 것) 사실 하상주(夏商周) 세 조대(朝代)를 살펴보면 모두 점복(占卜)과 제사의 전통이 있었는데 이 두 가지 모두 신과 환생의 존재를 믿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없다.

불교가 동토(東土)에 전해진 후 전세의 내함이 더욱 충실해졌고 ‘윤회(輪迴)’가 완성되었다. 지금 사람들의 개념에서 ‘윤회’란 단어는 불교에서 말하는 ‘육도윤회(六道輪迴)’설을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삼계 내의 일부 부동한 층차의 생명들이 서로 역할을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역할이 바뀌는 중요한 요소는 좋은 일을 하면 생기는 덕(德)과 나쁜 일을 해서 생기는 업(業)의 많고 적음에 달렸다. 덕이 많으면 아마 금생에 수명이 늘고 장래 어느 단계에 아마 신선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업이 많으면 그 일세(一世)에 수명이 단축되거나 병을 얻거나 장래 아마 축생으로 태어나거나 지옥에 떨어지는 등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윤회’라는 두 글자가 원래 불교에서 내원했다고 보고,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 중의 인식 역시 여기에 국한되어 있다. 이것은 아주 거대하지만 쉽게 알아차리기 함든 오류다. 사실 우리는 이 점을 반드시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불교에서 내원했든, 전통문화의 것이든 심지어 과학 속의 단어와 인식이든 결코 원래의 틀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인식이 국한되거나 심지어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엄중한 교란을 조성할 수 있다.

많은 수행하는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윤회’에 대해 과거 불교에서 말한 생명이 삼계 내를 전전하는 것으로, 생명 중에서 과거 어느 한 단락 역사 속의 생명상태라고 여기며 게다가 일부 나쁜 생명의 배치와 교란이 가득하다고 본다. 때문에 이런 것들은 지금 우리가 할 사람을 구하는 일과 자신을 깨끗하게 청리하는 것과는 관계가 크지 않다고 본다. 의도적으로 소홀히 하거나 심지어 지금은 이런 것들을 상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래에 간단히 나의 관점을 말해보고자 한다.

내가 쓴 이 시리즈 글에서 많은 독자들이 발견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 삼계 내에서 윤회하는 것에 대해 쓰는 내용이 갈수록 적어지고 있고 어떤 때는 심지어 “수박 겉핥기”식으로 몇 마디 하지 않는다. 마치 금생을 연결하는 일종의 요소뿐인 것 같다. 내가 주로 쓰는 것은 천국의 일과 세간에 관련된 사물의 유래 등 방면에서 나의 바른 깨달음[正悟]이다.

‘윤회’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여기에 빠지거나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심도 있고 더욱 홍대하게 생명과 역사를 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더욱 적극적인 심태로 현재와 미래를 대한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마주하고 이어받아야 할 일부분이다.

‘오늘’은 과거에 대해 말하자면 미래지만 미래에 대해 말하자면 오히려 역사가 된다. 과거 우리가 겪었던 일체는 마찬가지로 생명이 역사의 장하(長河)에서 유기적으로 조성한 부분이다. 이런 것들은 바로잡고 깨끗이 씻는 과정을 거쳐, 현재가 우리가 거치는 단련과 마찬가지로, 모두 함께 미래로 진입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생명의 경험과 상태이다.

여기서 나는 가장 엄숙하고 가장 신성(神聖)한 마음으로 천국의 일과 생명이 법을 찾은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다른 사람의 엽기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며 생명의 양지(良知)를 불러 일으켜 이를 통해 진상을 분명히 알고 더욱 잘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다시 오늘의 주제인 비천으로 돌아가자.

내가 기억하기에 내가 본 어느 문장에서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비천(飛天)’이란 단어는 불교를 따라 중국에 전해 들어왔다. 불교에서 ‘비천’의 함의는 천상에서 음악과 무용을 관장하는 신이다. 천상에서 성대한 불회(佛會)가 열릴 때면 그녀들은 공중으로 솟아올라 춤을 추며 춤, 음악과 신선한 꽃으로 신을 예찬한다.

돈황 벽화의 창작 과정에 그녀들의 형상이 매우 경건한 화공들에 의해 직접 목도되어 그림으로 묘사되고 조각으로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졌다. 그녀들의 자태는 유연하고 불가사의하다. 몸을 굽히고 회전하는 것은 보통 사람의 상상할 수 없는 각도이며 바람 따라 몸을 뒤집으며 날아다닌다. (그림 1) (주1) 그 글 중에서는 춘추시기 연소왕(燕昭王) 시대에 나타난 두 분의 춤추는 선녀를 언급한 것이다.


설법도(說法圖) 제394굴, 수(隋)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비천’은 음악과 춤만 장관하는 신이 아니다. 천국 세계는 매우 풍부하고 다채롭기 때문에 생명의 생활은 비할 바 없이 아름답고 신성한 상태 중에 있는데 그 아름다움과 신성한 상태가 이 두 가지 종류만 있을 수는 없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개념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비천이란 이런 생명이 음악과 무도(舞蹈) 크게 두 가지 방면을 책임짐을 알뿐이다. 어쩌면 하늘이 사람에게 ‘비천’이란 이런 신이 두 가지 책임을 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천국세계는 비할 바 없이 신성하고 아름다운 상태임을 알리려는 것이리라. 또한 이로써 사람들이 신을 공경하고 천국을 동경하며 법을 찾고 수행하려는 종자를 심으려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돈황 연구를 말하면, 역사와 고고학 연구 외에 또 하나의 ‘큰 화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돈황의 악무(樂舞)다. 그림 2는 수많은 돈황 악무 연구자들이 아주 자주 인용하는 장면이다.


악무(樂舞). 제85굴, 만당(晩唐)

‘비천’과 같은 이런 생명은 불국(佛國) 생명의 생활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생긴 것으로 또한 불타(佛陀)의 수승함을 나타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불타가 주지(主持)하는 천국은 모두 매우 아름답고 신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아름다움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그 한 층차의 생명이 어떻게 불타의 위덕을 축원하고 찬양하는가? 어느 한 층차에는 모두 그 한 층차의 법이 부여한 어느 한 종류의 생명이 나타남이 있다. (물론 그 한 층차의 법은 우주 대법의 일부분이다) 이런 류의 생명을 인간세상에서는 ‘비천’이라 불린다.

‘비천’은 바로 이런 사명과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녀들은 자연히 상응하는 지혜와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음악과 춤에 관해 우리는 나누어 말하는데 먼저 음악을 말해보자.


기악비천(伎樂飛天)-비파, 제44굴, 성당(盛唐)


기악비천(伎樂飛天)-퉁소, 제44굴, 성당


관무량수경변(觀無量壽經變)에서 비파 연주. 제112굴, 만당


기악비천, 유림굴(楡林窟) 제4굴, 서하(西夏)

그림 3에서 그림 6까지는 부동한 시대 비천 형상의 변천과 표현이다. 비천 이런 생명은 부처의 위덕과 그 한 경지의 아름다움을 풍부히 하고 나타내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그녀들의 머리 장식, 옷, 자태와 생명 상태는 모두 그것과 서로 상응해야 한다. 그 악기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인간 세상에서 동방에 비파, 얼후(二胡), 하프, 목어(木魚), 징 등 각종 악기가 있음을 알고 있다.

사실 천상에는 악기가 훨씬 더 많다. 천상의 악기는 그 자체가 신(神)의 법기(法器)다. 다만 이들 법기의 주 용도가 악을 제거하거나 마를 항복받는 게 아니라 그 경지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물론 악을 제거하거나 마를 항복받는 이런 류의 법기도 될 수 있다. 다만 중점적인 기능은 여기에 있지 않다.

예컨대 한 차례 연주에 12명의 비천이 출현하면, 이들 비천은 각자 한 가지 악기를 지니고 있는데 연주과정 중에 이들 비천을 임의로 조합할 수 있다. 우리 일반인의 인상에 12명을 하나의 악대로 볼 수 있어서 연주하는 장면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천상에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방식 외에 또한 더욱 뛰어난 방식이 있다. 왜냐하면 신은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비천은 대열을 이뤄 연주할 수 있고 또 둘이나 여럿이 ‘조합’해 함께 연주할 수도 있다. 이런 ‘조합’은 인간세상의 조합과는 다르다. 이런 ‘조합’은 둘 혹은 여러 생명이 악기와 합하여 두 가지 혹은 여러 가지 악기의 서로 다른 음률(音律)을 낼 수 있다.

악기를 말하자면 그 자체가 법기이기 때문에 무궁한 변화를 갖추고 있다. 자연히 분체할 수 있다. 가령 하나의 금(琴)이 다른 여러 악기로 변화할 수 있고 또 함께 연주할 수도 있다.

천상에서 모든 것은 변화할 수 있기에 연주할 때 역시 생명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드러내는 기회이다.

이 열두 비천이 한 가지 악기를 연주할 때도 있고 백 가지 이상의 악기를 연주할 때도 있으며 몇몇 비천이 하나로 합체하기도 하며 더욱 미세하게 변하여 중생들이 악기가 스스로 연주하는 것 같이 보이게 할 수도 있다.

연주하는 과정 중에 음표는 무궁한 자비의 힘이 충만하며 듣는 자로 하여금 불타의 위덕과 신성함을 깨닫게 한다. 인간 세상에서 우리는 소리가 진동으로 생긴 것임을 아는데 이런 소리의 ‘파동성’이 ‘물질성’의 다른 한 가지 반영이 아닌가는 생각하지 못한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소리 자체는 일종의 물질이거나 또는 일종 생명의 다른 나타남이 아닌가? 천상에서는 음표 자체가 자연히 생명의 나타남이다. 이런 생명은 자연히 그 층차의 법을 나타내며 생명의 일체 특징을 부여한다.

이 12명의 비천이 한바탕의 광대한 악곡을 연주했을 때 이러했다.

음률이 홍대하고 완곡한 가운데
악곡은 유유히 하늘에 스며드네.
아운(雅韻)의 오묘한 경지는 경루(瓊樓)에 있고
덕음(德音)이 끝없고 신광(神光)이 피어나네.

音律恢弘婉轉間
樂曲悠揚沁雲天
雅韻妙境在瓊樓
德音浩茫神光綻

비천이 연주할 때 사실은 역시 자재롭고 뜻대로 그녀들이 생명 상태를 나타내고 있을 때이다. 이때의 음악 선율은 거대한 에너지가 있으며 순식간에 상대방의 바르지 않은 사상을 바로잡는다. 동시에 인간들이 그녀들의 힘을 느끼게 한다.

아래에 우리는 다시 춤을 말해보자


비천. 제173굴, 성당(盛唐)


비천. 제245굴, 서하(西夏)나 원(元)


비천. 유림굴 제4굴. 서하

그림 7에서 9까지는 바로 부동한 시대에 그린 비천의 형상과 춤추는 자세들이다. 우리가 알기로 춤은 몸의 언어와 눈빛을 이용하여 게다가 음률을 배합해 한 단락의 장면이나 이야기를 풀어낸다. 비천으로서 그녀들 신체의 부드러움 정도는 필적할 것이 없다. 그녀들이 신이며 임의로 변화할 수 있다. 그녀들이 춤을 출 때 손과 발을 휘두르는 순간 매우 커다란 에너지가 충만해 있고 게다가 댕기(飄帶)가 합해지면 대단히 우아하고 시원하게 보인다.

천계(天界)의 무도(舞蹈)는 서사(敍事), 언경(言景) 등 여러 방면으로 나뉜다. 물론 이것은 한 가지 형용에 불과하다.

서사무도(敘事舞蹈)는 가령 어느 신의 과거의 한 단락 역사를 나타내거나, 생명의 자비와 위엄을 나타내며 어떻게 구체적으로 중생을 대하는가 하는 등의 표현을 모두 일일이 나타낸다.

언경이란 예를 들면, 어느 불타가 그곳에서 설법하는데 설법을 마친 후 비천들이 불타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한 단락을 해석하며 그 경지의 중생들이 모두 기연을 소중히 여기게 하는 것이다.

춤을 추는 과정 중에 비천은 여럿이 하나로 합체하거나 나뉠 수도 있으며 정체성과 개체성이 매우 잘 나타난다.

우리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5명의 비천이 함께 어느 신의 과거 경력을 풀어냈다. 이 단락의 경험을 개괄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가슴에 중생 품고 자비를 드러내니
온갖 겁난 다 겪어도 변함이 없다네
위덕과 정기는 천지가 감탄하고
굳세게 사명을 지켜 영원히 오래가네.

胸懷眾生慈悲展
曆盡劫難未曾變
威德神采天地歎
堅守使命恒久遠

이 다섯 비천의 음악과 어울려 완전하게 신의 이 단락 경험을 풀어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하늘하늘 아름다운 하늘 밖 신선
아름답게 날아올라 산정에서 춤을 추네
어여쁜 자태로 신이 위엄 펼쳐내고
손과 발을 들어 진상(眞相)을 드러내네

嫋嫋婷婷天外仙
飄帶盈盈舞山巔
體態婀娜展神威
舉手投足真相顯

사실 비천이 연기하는 과정에서 그 장면과 연기의 내함(內涵) 역시 따라서 나타난다. 이것은 사람 여기서는 구비할 수 없는 상태이다.

우리는 독자들이 더 절실하게 비천이 음악과 춤의 방면의 상태를 느낄 수 있도록 일부러 나누어 쓴다. 엄격히 말하면 음악에 따라 춤을 추는 것이 정상적인 상태라서 음악과 무도를 연기할 때는 서로 분리할 수 없다. 많은 비천들은 흔히 악기를 연주하면서 춤을 춘다. (그림 5) 비파를 등 뒤에 메고 탄주하는 것이 매우 형상적인 예이다.

돈황의 화공에 대해 말하자면 의상과 댕기 및 비천의 자태만으로 그녀들이 표면적으로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고 있는 것만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실 그녀들은 또 동시에 춤을 추는 생명 상태에 있는 것이다. 마치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션윈예술단이 연출 중에 해석하는 것처럼.

비천의 상황에 우리는 간략히 줄인다. 아래에는 두 비천이 내려가 법을 찾으러 다닌 이야기를 해보겠다.

매우 높은 한 경지 중에서 어느 불타의 신변에 두 명의 비천 선녀가 있었다. 한명은 운상(雲裳), 다른 한명은 우의(羽衣)라 불렀다. 둘은 각자 음악과 춤을 책임진 선관(仙官)이라 할 수 있었다. 한번 여기의 불타가 설법을 한 후에 비천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규모가 매우 광대했고 무수한 신들이 불타의 위덕을 앙모하며 우러러 보았다. 중생들은 이 환경에서 매우 자재롭고 행복했다. 그러나 길고 긴 세월이 지난 후 여기에도 변이의 요소가 나타났다.

운상은 비천들이 가지고 있는 악기에 흑색 인기(印記)가 나타난 것을 보았고 우의도 비천들이 춤을 출 때 이전처럼 그리 아름답고 생동하지 않음을 느꼈다. 나중에 한번 불타가 설법 후에 연기 중에 운상과 우의는 분명히 이번 차에 그녀들이 해석해 낸 효과는 이전처럼 순정하지 않음을 느꼈다.

이때 불타 역시 말했다.

“이 한 층은 이미 변이가 아주 심해졌다.”

이때 그녀들의 마음은 매우 조급했는데 그녀들은 모두 중생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한차례 연주 중에 운상과 우의는 한 가닥 이름 모를 힘에 ‘휘말려’ 다른 경지에 도착했다. 이곳에 어떤 신은 아래로 내려가려는 것처럼 원래의 신과 작별하려 했다. 그녀들은 그런 신들에게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다. 신들은 그녀들을 보자 이왕 여기에 왔으니 바로 인연이라면서 창세주를 만난 일을 들려주었다. 그녀들은 매우 감동했으며 자기의 그 경지를 마침내 구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자기들의 경지로 돌아가 그 불타에게 한 말씀을 드려 그들에게 걱정 말라고 하고 이 경지에도 구도의 희망이 있음을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돌아가려고 생각했을 때 오히려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우주는 너무나 컸으며 불국(佛國)도 너무나 많은데 또 많은 경우 부동한 경지 사이에는 매우 큰 간격이 있어서 마음대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름 모를 힘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들은 묵묵히 함께 아래로 가는 수밖에 없었고 내려가는 과정에서 원래의 경지를 염려했다. 그 경지 중에서 그녀들은 두 그루 나무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이 두 그루 나무는 하얀 산 위에서 자라났다. 이 산은 온통 둥글었으나 꼭대기는 평평했고 이 두 그루 나무는 바로 꼭대기 중심에 자랐다. 키가 매우 컸고 잎도 매우 컸다.

여기서 그녀들은 그 경지 생명의 표현을 듣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중생은 그녀들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들은 늘 생각하기를 만일 한 마리 새가 날아와서 자기들과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사실 여기는 너무 적막했다. 그러나 길고 긴 시간이 지나도록 새는 말할 것 없고 다른 살아 있는 생물이 온 적이 없었다.

나중에 이 둥근 하얀 산은 불균등한 세 개로 나뉘어 그녀들이 살고 있는 큰 부분 외에 나머지 두 개는 곧 붕괴해버렸다. 예상치 못한 것은 그 나머지 두 개가 붕괴한 후 이곳에 올 수 있는 중생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런 중생들은 그 두 그루의 나무가 무한한 위엄이 있는 것을 알고 존경심이 일어났다. 많은 신들도 여기 와서 함께 연주하고 춤을 추며 심지어 지난 이야기를 호소했다.

어느 날 한 불타가 와서 그 한 층차의 많은 중생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전에 매우 높은 경지에서 역시 불타로 나타난 적이 있었는데 한번 연출 중에 두 명의 비천 선관이 그 경지를 떠났다. 나는 그녀들을 찾기 위해 많은 일을 겪었다. 나중에 나는 운 좋게 창세주를 만났고 창세주께서 나를 이곳에 오도록 안배하시며 이곳에서 하나의 인연을 만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이곳을 떠나 장차 더 아래로 전전하다가 인간이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내가 원래 있던 곳은 능력이 제한을 받아 이곳에서 찾으며 오래 기다렸다. 나는 즉시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그 인연을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불타가 이런 말을 할 때 운상과 우의는 동시에 발아래가 텅 빈 것 같았으며 날고 싶었으나 움직일 수 없었고 마치 어느 거대한 손바닥이 그들 위에서 힘을 주어 아래로 누르는 것 같았다.

그녀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얀 산 아래로 떨어져 들어갔다. 그 속에 도착하니 원래 이곳은 또 신의 세계였음을 발견했다. 이곳의 주신(主神)이 그녀들에게 알려주었다.

“당신들은 이미 나무로서 사명을 완성했다. 창세주께서는 당신들이 원래 경지의 불타의 사명과 책임이 다르기 때문에 당신들은 여기서 헤어진 후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세상에서 아마 이런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말을 마치고 그녀들 자신의 모습을 보라고 했다. 그녀들이 보니 이미 비천 선녀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어 있었다.

이때 그녀들은 이전에 원래 있던 경지를 떠날 때 만난 일이 있었고 이 시각 또 유사한 일을 만나자 생각이 많아졌다. “공간의 경지가 다른데 또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자 거대한 한 손이 그녀들을 손바닥에 받쳐 들고는 자비롭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이후 반드시 창세주를 따라야지만 비로소 당신들 그 층차 중생을 위해 책임지겠다는 소원을 완성할 수 있다.(이것은 불타가 감당해야 할 책임과 다르며 부동한 신은 모두 중생을 위해 책임을 지는 방식과 표현이 있다. 물론 이것은 그녀들 그 한층차에서 비천선녀의 역할을 말한 것이며 그녀들의 근본 층차는 여기에 제한되지 않는다) 사실 너희들이 층층 아래로 내려가는 과정은 인연을 맺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또한 책임이 증가되는 과정이다. 너희가 이왕 나를 만났다면 반드시 기연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녀들은 창세주의 손에 매우 매우 작게 나타났으므로 그녀들이 창세주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창세주는 신통을 운용하여 그녀들이 자신의 전체를 볼 수 있게 하셨다. 그녀들은 매우 경탄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여태껏 신이 이런 위엄과 자비를 갖춘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이 원래 경지의 하얀 산꼭대기에 돌아왔을 때 이곳의 신은 그녀들을 떠났기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불타는 그녀들이 돌아오자 매우 놀랐다. 그녀들 머리의 작은 나무 모양을 자세히 보고는 곧 그녀들이 방금 내려간 그 두 그루 나무의 본래 모습임을 알았다.

운상이 말했다.

“존경하는 불타님, 당신은 우리 둘 예전 그 경지의 수호자였습니다. 방금 우리 둘을 찾기 위해 많은 일을 겪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인연 때문인지 우리는 창세주의 안배 하에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매우 영예롭고 운 좋은 일입니다. 방금 우리 둘이 나무 형상에서 벗어날 때 창세주께서는 반드시 창세주를 따라 중생을 책임지겠다는 소원을 완성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당신의 생명 여정에도 이런 시각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불타는 그의 소원이 실현되었기 때문에 매우 기쁘고 위안이 되었다. 헤어지기 전에 불타가 말했다.

“앞으로 우리가 또 볼 수 있으면 좋겠소.”

우의가 말했다.

“방금 창세주께서 말씀하시길 우리가 내려가는 과정에는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며 오직 인간세상에 가야만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고 하셨습니다.”

그 불타는 듣고 말했다.

“그럼 인연을 따라야겠지요.”

말을 마치고 몸을 날려 더 아래 층차의 경지로 진입했다. 그 비천 선녀들도 막 내려가려고 하는데 이곳의 많은 신들은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매우 감동하여 역시 따라 내려가려고 했다. 이 두 비천 선녀는 자신들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므로 그저 무릎을 꿇고 창세주의 결정에 따르기로 기다렸다. 얼마 후 창세주께서 오셨고 이 신들을 여러 조로 나누어 아래로 내려가도록 안배하셨으며 부동한 층차에서 인간세상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역할을 안배하셨다.

운상과 우의는 그 경지의 책임을 완성한 후 다시 아주 오랫동안 내려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이런 내용은 간단히 줄이자.

인간 세상에서 그녀들은 함께 태어났으며 시간은 좀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독립적 생명은 모두 자기의 인연 체계가 있으며 자기의 길을 성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 그녀들이 태어난 거리가 매우 멀었고 심지어 수백 년, 천년 이상 만날 수 없었는데 이는 늘 있는 일이다.

그녀들은 천상에서 비천 선녀였기 때문에 창세주께서 돈황에서 체계적으로 신의 형상과 상태와 유관한 이 요소를 안배할 때 그녀들이 동시에 화공들에게 선녀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드러내도록 안배하였다. 그 안배된 화공은 마침 그녀들 원래 경지의 불타가 전세한 것이었다. 인연은 이렇게 교묘한 것이다. 이것은 성당(盛唐)시기의 일이다.

당시 화공은 매우 가난한 집에 태어났고 6살 때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백부 손에서 자랐다. 나중에 그들은 이곳에 와서 장사를 했다. 이때 돈황은 이미 매우 번영했으며 사람들이 굴을 뚫고 파고 그림을 그리거나 상을 만드는 것이 일종 직업이 되었다.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와서 솜씨를 펼치고 싶어 했다. 비록 돈을 많이 벌지 못하지만 신의 상태를 그리고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생명이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앞의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회화와 조각을 많이 보고 계발을 깊이 받은 후 또 한 노인 화공을 만났다. 이 노인은 그가 배우기 좋아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평생 닦은 기예를 그에게 전수해주었다. 이렇게 7,8년의 시간이 지나 노인은 세상을 떠났다. 노인은 떠날 때 당부했다.

“만일 영감(靈感)이 없을 때는 반드시 마음을 써서 예불을 드려야 한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독립적인 창작을 시작했다. 비록 그가 어느 정도 기초는 있었지만 어느 구체적인 일을 만났을 때에 어떤 때 두 가지 사상이 다투곤 했다. 하나는 이 신불의 그림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다른 사상은 그렇게 그리면 안 되며 신불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의 진도가 점점 느려졌다.

한번은 그가 비천을 그리는 화법에 대해 그의 사상에 여러 종류 표현방식이 나타났고 모두 미리 초고를 그려보았으므로 천천히 그렸다. 그는 아예 자기 마음속의 여러 형상들을 분별해서 그렸다. 하지만 비교적 평범하고 생동감이 부족했다. 그는 반복적으로 생각해보았다. 눈 앞에 그려낸 비천의 형상이 다른 것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몰랐으므로 이때 그는 노인이 임종 전에 당부한 말이 생각나서 얼른 예불을 올렸다. 올리고 나서 이 때문에 생각한 시간이 길어지고 그의 사유에 맺힘이 좀 있었다.

머리가 좀 어지러운 상태에 처했다. 이때 운상과 우의는 이것을 보고 동시에 그와 그녀들 천상에서의 그 인연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먼저 그에게 천상에서 불타가 되었을 상태를 느끼게 하고 매우 큰 지혜를 갖추도록 했다. 그가 우주와 생명에 더욱 광범하고 심각하게 인지하게 하고 연후에 법력으로 그가 그려낸 비천이 활성화 되도록 했다.

다시 말해 그 비천이 날아오르게 하여 그에게 입체적으로 보게끔 했으며 그가 그려낸 여러 가지 비천의 각종 방면을 입체적으로 보고 우열을 비교할 수 있도록 나타나게 했다. 그녀들도 비천의 상태를 조금씩 완만하게 그의 눈앞에 진실하게 나타내주었다.

처음에 그는 꿈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눈을 비비고 보니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붓을 들었고 운상과 우의는 이때 ‘모델’이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가장 깨끗한 마음으로 그렸으며 동시에 인연의 까닭으로 미묘한 하늘의 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초고가 그려졌고 운상과 우의는 안심이 안 되어 다시 한 번 반드시 엄숙하게 그림을 대하라고 당부했다.

이것은 창세주께서 미래에 남겨 놓으려 하시는 것으로 말법시기에 사람들이 잃어버린 선념과 불연을 찾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사유는 종전의 불타의 상태를 느낀 후 사유는 많이 열렸고 문제를 보는 각도와 방식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그가 그림을 다 그리고 난 후 뭇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이 정말 영기(靈氣)가 있고 신불의 장엄한 아름다움과 자비를 나타낸 것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찾아와 그림을 그렸으며 이때의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이 일종의 수행임을 느꼈다. 만일 전정으로 수행 상태에 들어가면 더욱 좋았으며 신불과 좀 더 가까이 가는 것 같았다. 이때 운상, 우의는 그를 점화하여 진정으로 수행의 기연과 거의 차이가 없도록 들어가게 했고 한 폭의 작은 작품을 완성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그 작품을 완성한 후 그는 창세주의 안배 하에 진정한 수행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 일생에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했으므로 나중에 한동안 천계에 머문 후 다시 인간세상으로 내려와서 문인, 무장, 관원 등 많은 역할을 맡았다. 운상과 우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 생에 운상과 우의는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이 각자 대륙에서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태어났다. 물론 법은 이미 얻었으며 각자의 환경에서 해야 할 일을 잘하고 있다.

바로 다음과 같다.

돈황 비천의 느릿하고 오묘한 자태
자세는 가볍지만 범음을 펼쳐내네
예쁜 치마 날리며 신의 아름다움 드러내
천년의 그림이 사람을 매혹시키누나!

敦煌飛天曼妙姿
體態輕盈梵音施
彩裙飄飛展神美
畫鋪千載喚人癡

주 1:《중국 고대의 비천 무용가(中國古代的“飛天”舞蹈家)》

(역주: 이 문장은 중문 션윈 공식사이트에 기사로 실려 있다)

설명: 만약 독자 여러분들이 돈황에 관해 더 상세히 알고 싶다면 에포크타임스 문화면의 ‘돈황심몽(敦煌尋夢)’ 시리즈를 보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6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