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석방행
【정견망】
많은 사람들이 막고굴의 회화와 채색 소조를 보면 웅장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에 이끌리고 역대 화공들의 뛰어난 기예(技藝)에 감동받아 이를 통해 신불(神佛)에 대한 정념이 솟아난다. 이곳에서 널리 응용된 기법을 ‘조의출수’(曹衣出水)와 ‘오대당풍’(吳帶當風)이라 부른다. 이것은 회화 기법에서 두 가지 방법이다.
‘조의출수’란 서역에서 온 화풍이며 ‘오대당풍’은 당나라 화가 오도자(吳道子)에게 나온 것이다. 두 가지 화법을 간단히 말하자면 전자는 옷이 마치 몸에 달라붙은 것처럼 주름이 분명하고 마치 물속에서 막 올라온 것 같다. 후자는 마치 바람에 불리는 것 같이 흩날리는 느낌을 주는 효과가 있다.
이 두 화법(畫法)은 모두 신이 사람에게 전해준 것으로 모두 하늘에서 신의 상태를 나타내도록 질서 있게 배치한 것이다.
돈황 막고굴 건축은 수당(隋唐) 시기에 절정에 달했다. 또 당나라 후기에서 오대(五代) 시기 공양인의 상(像)이 점점더 크게 그려져 불상 등과 크기가 비슷하거나 심지어 초과했다. 예를 들면 오대시기 제98굴(조의금 공덕굴曹議金功德窟) 이 바로 한 가지 예다. 이것은 바로 사람들이 굴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변이와 패괴가 나타난 현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막고굴에서 한 가지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역대 화공들 중에서 이름을 남긴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중공 사당은 당시 화공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을 남겨놓을 수 없었다고 선전해왔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화공이 그림을 그릴 때는 사실 일종의 수행과정이라 속세의 명과 이를 내려놓는 과정이었다. 때문에 당시 화공들은 거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굴을 판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사람들은 이곳에 ‘실용성’을 중시했다. 이것이 바로 변이의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신이 사람더러 신을 존경하게 한 목적은 사람이 인간세상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고 복록을 많이 받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을 공경함을 통해 덕을 쌓거나 심지어 수행을 해서 최종적으로 부동한 층차의 생명 표준에 도달해 하늘로 되돌아갈 수 있길 희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실용성’을 중시할 때면 사람이 동굴을 만든 목적이 그리 순정(純淨)하지 않게 되었다. 신이 보물과도 같은 이 지역을 안배한 근본 목적을 망각하고 오로지 공덕만 쌓으려 하고 이를 통해 평안을 유지하거나 승진하는 따위의 인간의 복분(福分)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은 단지 인간의 감수(感受)만을 중시하지만 신은 아니다. 신은 사람이 수행을 잘해서 진정으로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천국(天國 자기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길 희망한다. 만약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과정 중에 자신을 드러내고 신명(神明)을 경외(敬畏)하지 않으면 신의 징벌을 받을 수 있다.
여러 해 전에 어떤 노인이 한 말이 기억난다.
“우리 지역에 가뭄이 들어 우리가 기우제를 올리면 발원했다. 만약 용왕님께서 비를 내려주시면 돼지머리를 바치겠습니다.”
당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용왕이 설마 돼지머리를 먹기 위해 당신에게 비를 내려주겠는가? 가뭄 등 재난에는 원인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곤란에 처하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각종 소원을 비는 방식으로 신령더러 편의를 봐달라고 하는데 이것은 뇌물을 주는 것과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이런 구하는 마음은 바로 신의 본의와 상반된다.’
하늘이 재앙을 내리는 것은 사람더러 자신을 반성하고 이를 통해 도덕을 바로잡으라는 뜻이다. 오성이 좋은 사람은 그로부터 인간의 고난과 무상함을 알게 되고 수행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이 고난 중에서 사람들이 반성하지 않고 줄곧 신에게 편의를 봐달라고 구한다면 시간이 길어지면 좋지 않은 요소들이 쌓여 갈수록 많아질 것이고, 이 사람이 당하는 고난은 이후 전생하면서 또 쌓이게 된다. 그러면 오성은 더욱 나빠지고 악순환이 형성되는데, 어떤 사람은 각종 기괴한 병을 얻거나 심지어 아주 일찍 죽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돈황에서 당나라 후기부터 신에 불경(不敬)하는 특징을 지닌 이런 변이가 나타난 것 역시 필연이다. 왜냐하면 우주는 성주괴(成住壞)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전성기가 지나면 오래지 않아 점차 변이와 패괴의 요소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원나라가 통일하기 전에 신은 역사문헌과 당시 사람들이 사용한 법기(法器) 등의 용품을 보존하기 위해 사람들을 배치하여 눈에 잘 안 띄는 한 동굴 내부에 숨겨놓았다. 이것이 바로 장경동(藏經洞)의 내원이다.
장경동은 돈황 막고굴 제17굴을 가리킨다. 원래 당나라 선종(宣宗) 대중(大中) 5년(851년) 뚫기 시작했고 당시 하서도승통(河西都僧統)이었던 홍변(洪辯)의 영굴(影窟 고승을 기리기 위한 기념굴)이었다.
장경동에 관한 구체적인 정황은 정견망 2008년 5월 31일 발표한 《신전문화가 조성한 돈황(神傳文化造敦煌) 4》을 참조하고 여기서는 지면의 제한으로 구체적으로 열거하지 않는다.
당시 신이 이곳을 선정한 이유는 스님이 여기서 수행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동굴이 수행자의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티베트 백교(白敎)의 시조인 밀레르빠(密勒日巴) 부처가 임종 전 제자들에게 동굴에 앉아서 수행하라고 한 것과 같다. 이런 동굴은 신의 가지(加持)를 받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장경동이 밀봉된 원인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었다. 지금까지 나온 설만 해도 ‘피난설’, ‘폐기설’, ‘서고(書庫)개조설’ 등인데 사실은 신이 당시 사람들에게 일부 고대 문물들을 여기에 놓도록 배치했을 때 이미 장래 일어날 일을 예측했던 것이다. (장경동에 남겨진 책들은 대부분 외국인이 가져갔다)
여기까지 썼을 때 한 신이 내게 말했다.
“사람들이 무신론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장경동 내에서 신이 이미 일찍이 당시 사람들에게 그곳에 가져다놓게 한(장경동이 밀봉된 원인을 설명) 문헌이 발견될 것이다. 그 문헌을 펼쳐볼 때 사람들은 아 원래 일체는 모두 신의 장악 속에 있었구나 하는 것을 크게 깨닫게 될 것이다. (중화문명 역사상 다른 두 개의 수수께끼가 있는데 하나는 화씨벽和氏璧이고 또 하나는 우임금이 주조한 구정九鼎의 소실 역시 이와 같아서 때가 되면 그 행방을 알게 될 것이다.) 스타인, 폴 펠리오 등의 사람은 속임수와 약탈로 돈황 유서(遺書)에 거대한 손실을 일으켰다. 이것은 중화 문화사(文化史)에서 확실히 큰 상처였다. 동시에 우환(憂患)의식을 지닌 중국 지식인들에게 이후 중화문화를 더욱 소중히 여기게 했다. 이는 순전히 우주 중의 그런 나쁜 생명이 당시 중국인의 무지와 천박함을 이용해 이런 외국인들에게 이런 한 차례를 연출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명나라 중후기(中後期)에 이곳에 버려진 후 명현(銘賢)이라는 사람이 외롭게 돈황을 지킨 이야기를 말해보고자 한다.
삼계 밖의 그 층차에서 창세주께서 돈황에 관한 일들을 안배하실 때 돈황 막고굴을 몇 개의 큰 단계로 나누었다. 즉 준비기. 건설기, 몰락기 및 창세주와 함께 하는 시기 등이다. 이렇게 각기 다른 시기에 창세주께서는 계통적으로 일부 신이 관련된 일에 참여하게 하셨다.
몰락기(대체적으로 명, 청, 중화민국 시기) 창세주께서는 일부 신을 보내 돈황을 보호해 큰 변고가 생기지 않게 하셨다. 동시에 일부 신을 수행자로 안배해 이곳에서 묵묵히 돈황 막고굴을 지키게 하셨다.
당시 4대보살(관음, 문수, 보현, 지장)이 이 일을 알고는 모두 와서 참여하려 했다. 왜냐하면 그녀들이 하는 일은 모두 본 차례 문명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막고굴은 이번 차례 동방문명 신앙이 집중적으로 전시된 곳이기 때문에 이 보살들은 자연히 자신들의 방식으로 신의 역량을 펼쳐내려 했다. 물론 4대보살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알거나 또는 잘 모르는 다른 부처와 천신(天神)이 있었다.
4대보살을 예로 들면 관음, 보현 등 이런 것은 모두 명호(名號)일 뿐 구체적으로 인간세상에서 수련성취한 생명은 한 분이 아니다. ‘관음보살’이란 이 명호를 말하자면 우리는 자항(慈航)대사가 묘선(妙善) 공주로 전생해 관음보살로 수련성취 된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남해 관음보살에 관한 설이 있다. 다시 말해 모(某) 보살의 과위로 성취될 수 있는 생명은 하나가 아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이전 문장에서 파룬따파(法輪大法)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대사의 저술을 인용해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중복하지 않겠다.
창세주께서는 4대보살과 다른 신불(神佛)들이 모두 온 것을 보고 각기 안배를 하셨는데 어떤 이는 돈황의 정치적 국면을 책임지고 이 단계에 이곳에서 대규모 파괴가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또 이곳의 기후와 지질 방면을 안배해 안정적이고 파괴적인 기후나 지질 재난이 나타나지 않게 하셨다. 또 장기간 아무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이곳이 사악한 생명에게 점거당하면 안되었다. 그래서 이 방면에서도 지켜야 했다.
보현보살(普賢菩薩)이란 이 명호는 실천을 특징으로 하고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지혜를 특징으로 한다. 동시 이곳은 수행인이 가서 묵묵히 지켜야 했는데 이를 통해 창우(蒼宇) 중에 홀로 지키는 방식으로 호법신이 미래인에게 문화를 남겨주게 한 것이다.
때문에 보현보살은 난주(蘭州)지역 부잣집 자재인 명현(銘賢)이란 사람을 선정해 그가 장래 기회가 성숙하여 막고굴에 와서 혼자 벽화와 채색 조소를 이웃삼아 묵묵히 이곳의 일체를 지키게 했고 이를 통해 최후에 보현과 같은 위덕과 법력을 지닌 보살로 수행되도록 배치했다.
지혜를 특징으로 하는 문수보살은 그를 돕고 점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명현을 성취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표면 공간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고 신통의 방식으로 명현에게 협력했다.[문장속 당부의 말: 명현의 원래 층차와 경지는 보현보살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런 각도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과거에 잘 아는 불도신 명호 배후 생명의 층차는 많은 경우 그 한 층차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문화를 남기고 연기하기 위한 한 경지의 상태에 불과하다. 창세주께서 직접 제도하신 생명의 층차는 아주 많은 경우 아주 높은 층차 심지어 지극히 높은 경지에서 왔다.]
또 관음과 지장보살은 동굴 벽화와 채색 조소를 보호하고 드러내는 신의 역량을 책임을 졌다.
명현은 난주에서 유명한 부잣집 자제이며 비록 비단옷에 맛있는 음식을 먹었지만 어려서부터 청정(淸靜)한 것을 좋아했다. 부모님은 그에게 많은 가녀(歌女)를 보내 그를 모시고 노래하고 춤추게 했지만 그는 모두 좋아하지 않았다. 늘 혼자 그곳에 앉아 인생의 진리가 무엇인가 사고하고 있었다.
어느 날 명현이 거리에 나가서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어느 주루 앞에서 혼자 앉아 있는데 맞은편에 야르칸드에서 온(명나라 때 가정 황제가 가욕관을 폐지한 후 돈황 지역은 곧 이 나라에 점거당했다) 몇몇 상인이 그곳에서 대화하고 있었다. 말하는 도중 그들이 한번은 길을 잘못 들어 돈황 막고굴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한 가닥 금광이 쏘아져 나왔다. 그들이 안에 들어가서 본 벽화와 채색 조소들은 좀 부서지긴 했지만 그것은 신이 사람에게 남겨준 보물임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명현은 옆에서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뻤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부모님께 돈황 막고굴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부모님은 아들이 그곳에 가면 고생을 겪어야 한다는 생각에 원치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말해도 가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 부친은 명현을 위로하기 위해 아주 현숙하고 지혜로우며 아리따운 아내를 구해주었다. 명현은 부모의 뜻을 똑똑히 알게 된 동시에 그 여인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를 맞기 3일 전 식구들을 데리고 상대방 부모와 여자를 찾아가 자신의 진실한 생각을 분명히 알렸다. 그러자 상대방도 이해해 주었다. 그래서 결혼 하루 전날 명현은 식구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빠른 말을 타고 나는 듯이 돈황으로 달렸다.
막고굴에 도착해서 그가 가장 처음 본 장면은 처량하고 파괴되었으며 모래바람이 들이치며 이따금 늑대만 울부짖는 곳이었다.
비록 이렇게 황량하긴 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곳에 오자마자 장기간 이곳을 지키는 수행자를 만났다. 이 수행자는 그를 데리고 조금씩 막고굴에 일부 신불의 위덕이 나타나는 동굴을 보여주었다 (그림 2에서 그림 4)
당시 그가 보았을 때 이들 그림에서 만 갈래 빛살이 쏘아져 나오는 것을 발견했으며 신불(神佛)의 진실한 상태가 조금씩 그의 앞에 펼쳐져나왔다. 이는 그를 매우 격동하게 했다. 이때부터 그는 이곳에서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또 며칠이 지나자 그 수행자는 그를 동쪽 천불동에 데려가서 보여주었다. 그들은 거기서 당승(唐僧)이 서천에 가서 경을 얻어오는 그림을 보았다. 이 회화를 보고 있을 때 그림이 살아났으며 움직이면서 당승이 서천으로 경을 취하러 가던 험난한 길과 수많은 유혹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경을 얻어 귀국하면서 그 자신도 마땅히 성취해야 할 일체를 성취한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그에게 수행의 개념에 대한 심오하면서도 직관적인 인식을 생겨나게 했다.
수도인은 명현을 데리고 이곳을 다 유람한 후 말했다.
“나는 하늘의 명을 받들고 이곳에서 자네를 기다렸네. 동시에 우리는 천상에서 한 단락의 신기한 연분이 있었다네. 금생에 돈황에서 다시 한 번 연을 맺었으니 장래에 자네와 나는 동시에 창세주께서 인간세상에서 널리 전하실 대법을 수행할 때 돈황과 관련된 방식으로 연분을 맺을 걸세. 만날 기회가 아주 적고 아주 드물다네. 사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방식으로 자네와 함께 해야 할 일을 성취할 걸세. 이 모든 것은 자네를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많은 중생을 성취시키기 위해서라네.”
말을 마친 도인은 날아오르더니 공중에서 두 손을 잡고 인사를 했다.
“나는 또 끝내야 할 다른 인연이 있다네. 동생은 이곳에서 평생을 홀로 지키게나. 인연이 있으면 내생에도 계속하겠지.”
명현도 포권하며 말했다.
“형님께선 안심하십시오. 소제(小弟)가 반드시 이곳에서 이 동굴을 지키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심과 의지를 변치 않겠습니다.”
수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날아갔다.
이때 돈황에 가는 비가 내렸고 명현은 아주 흥분했다. 왜냐하면 이곳의 사막지대여서 비가 거의 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명현이 막고굴로 돌아온 이튿날 그의 집에서 보낸 사람이 쫓아왔다. 가족과 친구들은 모두 온갖 방법으로 그더러 돌아가자고 권했지만 그는 응낙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그들을 데리고 막고굴을 유람시키며 그들에게 그 속의 회화와 조소를 보라고 했다. 이들도 근기가 좋았기 때문에 벽화를 볼 때 벽화에서 나오는 빛을 보거나 심지어 신불이 나타나는 것도 보았다.
다 보고 나서 모두들 더는 아무 말도 못하고 5,6명은 그곳에 남아 명현과 함께 수행하고 나머지는 다 돌아갔다. 가는 길에 명현이 타고 왔던 말도 데리고 갔다. 또 이 5, 6명은 이곳에 온지 보름도 안 되어 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들 떠나갔다. 그들은 떠나기 전 명현에게 일부 옷가지며 물과 양식을 남겨놓았다.
처음에 명현은 매일 아침 막고굴을 한번 순시했다. 그리고 나서 굴에서 가부좌하여 선정 수행을 했다. 나중에 정력(定力)이 점점 깊어지자 한번 입정에 들어가면 바로 3-5일이 되었고 나중에는 심지어 두 달에서 반년까지 도달했다. 먹는 것이 매우 적었으므로 신체는 점점 쇠약해져 갔다.
한번은 어느 상인 팀이 이곳을 지나다가 잠깐 휴식을 취했다. 이때 명현은 막 선정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상인 중에 불교를 믿는 사람이 있어서 그를 보고 그에게 먹을 것과 옷들을 주며 좋은 말로 권했다.
“당신 관상을 보니 복이 있는 사람이군요. 불교를 배우려면 집에서 해도 되는데 하필 이곳에서 이렇게 고생할 게 있는가!”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처음 서역 상인으로부터 이곳의 회화에서 빛이 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곳을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불에 대해 아름다운 동경이 있는데 이것은 선을 향하고자 하는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세의 구속을 버리고 진정하게 행동으로 신불을 동경하고 찾으려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부처를 배우는 것은 단지 공덕(功德)을 쌓아 금생이나 내생에 복을 얻으려 할 뿐입니다. 과연 몇이나 진정으로 칠정육욕을 끊고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행동으로 한마음으로 부처를 향합니까?”
말을 마친 명현은 상인들이 준 음식을 약간 먹고 그들을 데리고 동굴로 들어가서는 벽화를 보여주었다.
상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근기가 괜찮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회화에서 나오는 빛을 보았다. 이번에 명현이 문수보살의 그림 앞에 서 있을 때 마치 문수보살이 그림에서 내려와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도 미소로 합장하며 응답했다. 한참이 지나 문수보살은 또 그림 속으로 돌아갔다.
상인들은 이곳에서 불법의 수승(殊勝)함을 목격했고 명현이 머무는 동굴이 몹시 퇴락한 것을 보았다. 이에 사람을 불러 간단히 수리하게 해서 동굴에 바람이 많이 들어오지 않게 했다. 이 일을 마친 후 이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명현은 그들이 떠난 후 여기서 입정에 들었다. 이번 입정 중에 그는 문수보살이 와서 그의 옆에 앉아 그에게 천국의 일과 수행 방면에서 주의해야 할 일들을 매우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말을 마치고 문수보살은 곧 떠나갔다. (사실은 그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묵묵히 그를 수호하며 돌봐주고 있었다)
명현은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비록 안일한 생활을 버릴 수는 있었지만 사상 중에는 또 과거의 아름답고 행복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입정 과정 중에 이런 요소들이 늘 스쳐나오곤 했다. 처음에 그의 사유는 이런 장면들에 이끌려갔다. 나중에 문수보살의 경고를 떠올리고는 즉시 사유를 거둬들였고 더는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또 한 번은 그가 입정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세 살 때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가 길에서 놀고 있는데 한 대의 마차가 지나갔다. 모친이 그것을 보고 얼른 그를 품에 안고 굴렀다. 마차는 모친의 긴 머리카락을 누르고 지나갔으며 그와 모친은 다치지 않았다. 그는 마음이 움직여 즉시 그 모친이 집에서 그를 걱정하는 장면이 나타났다. 그는 이것이 옳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때 문수보살이 신통을 이용해 그에게 알려주었다.
“속세의 친정(親情)이 진실로 소중하긴 하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만약 사람이 수련에 성공하면 자신과 인연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있다. 그러면 친인은 자연히 그 중에 있고 이렇게 해야 인연에 대해 최대한 소중히 하는 일이다.”
나중에 경지가 제고됨에 따라 문수보살은 그를 데리고 각종 신선들을 만나러 가서 그가 신선계의 일과 상태를 좀 알도록 해주었다.
하루는 그가 말했다.
“저는 막고굴과 관련된 일을 알고 싶습니다.”
문수보살이 웃으며 말했다.
“막고굴의 그림과 조소를 모두 사람이 그린 거라고만 보지 말게. 자네는 단지 부동한 경지로 수련되었을 때라야만 비로소 그 벽화와 채색 조소의 진정한 내포를 볼 수 있다네. 자네는 이곳에서 수련을 잘 하게. 자네가 어느 하나 또는 일부 동굴의 내포를 알아야 할 때가 되면 내가 자연히 자네를 데려가서 볼 것이고 그 신들도 비로소 자네에게 진정한 면모와 내포를 보여줄 수 있을 걸세.”
명현은 자기를 엄격히 하고 수행에 노력하여 더 이상 나태하지 않았다.
한번은 어느 사신(邪神)이 이곳에 와서 명현이 수행하는 것을 볼 때 질투심이 치솟아 신통으로 한바탕 미친듯한 모래바람을 일으켜 명현이 수행하는 동굴로 몰고가 동굴을 거의 다 메워버릴 듯했다.
이때 명현은 한창 입정에 있었다. 문수보살이 이 상황을 보고 명현의 운명에 일부 재난이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또 일이 일어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명현의 모양으로 화하여 그를 가려주어 문수보살이 그를 위해 난을 감당했다.
사실 그 사신이 이때 사용한 모래는 모두 거대한 살상 능력이 있어서 일반적인 생명이라면 이 모래에 의해 가루가 되어 버려 진작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문수보살은 지혜가 뛰어났기 때문에 한눈에 그 사신과 그가 사용하는 신통력을 조사해 곧 이 사신의 내력과 그것을 어떻게 깰 수 있는지 알아냈다. 그래서 그 모래가 마주쳐 올 때 문수는 즉시 명현을 데리고 더욱 미시적으로 변했다. 그들은 분명 그곳에 앉아 있었지만 그 모래는 그들을 상하게 하지 못했다. (다른 시공간에 있었다)
문수가 손을 뻗어 그 사악한 신을 손에 잡았다.
문수가 말했다.
“너의 이런 행위는 사람의 수행을 교란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사악한 신은 여전히 사납게 날뛰었다. 문수보살은 즉시 그를 천상에서 신선의 질서를 관장하는 신이 있는 곳으로 보냈고 사신은 즉시 처리되어 없어졌다. 문수는 계속해서 명현을 보호했다.
명현은 필경 사람 몸을 지녔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깊이 입정했을 때만 문수보살을 볼 수 있었고 평소에는 잘 볼 수 없었다. 이곳에서 머문 시간이 곧 60여 년이 되었다. 그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고독한 마음이 늘 튀어나왔다. 그가 이전의 친구나 한때 만나보았던 사람을 생각났을 때 마음속에 마치 무언가 많아진 것 같았다. 그러면 그는 늘 회화와 조소가 있는 동굴에 가서 배회했으며 많은 경우 그 벽화와 소조는 그에게 많은 계시를 주었다.
그가 공작명왕 그림을 보았을 때 마치 자신이 공작명왕이 예전에 수행해서 신이 된 환경 속으로 진입한 것 같았다. 그는 그곳에서 비록 관객이었지만 그는 진실하게 공작명왕을 보았고(석가모니의 전생) 그가 어떻게 경건하게 경을 읽고 사냥꾼의 추적을 피했는지 보았다. 나중에 환경에 대해 오판을 하고 또 경을 읽지 않아 잡혔으며 다시 또 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품고 공을 이뤄 금고(禁錮)에서 벗어나는 경과를 보았다. 이런 것은 그에게 큰 일깨움을 주었다.
나중에 한번 깊이 입정했을 때 또 문수보살을 보았고 만났고 문수보살에게 경을 강의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문수는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마음을 더 잘 안정시키면, 보다 높은 신이 자네에게 경을 말하고 법을 말해주실 걸세.”
그는 이래서 마음을 15년간 마음을 잘 ‘안정’시켰다. 이 15년간 그는 아무리 깊이 마음을 잘 안정시켜도 문수보살을 보지 못했다. (문수보살은 사실 줄곧 묵묵히 그를 수호하고 있었으며 단지 그가 보지 못하게 했을 뿐이다.) 아울러 그가 막고굴 벽화와 조소를 둘러볼 때 어떤 불광도 볼 수 없었다. 사람도 거의 볼 수 없었다. 바로 이 과정 중에 그는 고독하게 여기서 지키며 고독의 느낌을 수련해 없앴다.
사람은 사회에서 접촉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 가난하든 부유하든, 적어도 몇 사람의 친구가 있어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특히 명현이 고독 중에서 철저히 걸어 나올 필요가 있을 때 거의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었다. 이것은 그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었다. 이 상태가 15년을 지속했다.
이 15년 중에 그는 때가 되면 더욱 높은 신이 그에게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해줄 것임을 굳건히 믿었다! 이 단락의 시간을 말로 하기는 쉬우나 진정으로 그 속에서 몹시 마음을 졸이며 그 어떤 희망도 볼 수 없다면 이것은 일반인의 의지를 꺾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명현은 초인적인 의지력으로 잘 버텨냈다!
15년이 지난 후 그는 한차례 입정에 들었고 다시 문수보살을 보았다. 문수보살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창세주를 뵈었다.
창세주께서는 그에게 여러 차례 말씀해주셨다.
한번은 그가 창세주께 여쭤보았다.
“당신께선 이곳은 모두 장래를 위해 준비하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이렇게 황량한데 누가 또 주의할 수 있겠습니까?”
창세주께서 웃으시며 문수보살에게 말했다.
“당신은 지혜가 뛰어나니 장래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겠는가?”
문수보살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자세히 살펴본 후 말했다.
“제가 어떻게 해야만 장래 이곳에 도가의 요소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대문(大門)을 주의하도록 일깨울 수 있습니까?”
창세주께서 말씀하셨다.
“천상의 신들은 모두 내가 인간세상에 내려가서 대법을 널리 전하는 것을 알고 있다. 불가든 도가든 아니면 다른 신이라도 모두 이 일을 위해 공덕을 쌓고 도와주려 한다. 그러나 그 때에 중국인의 도덕이 쇠하여 전반적으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국면이 나타날 것이다. 이곳은 비록 사람들에게 다시 인식되겠지만 하지만 고통 가득한 ‘시작’일 뿐이다. 물론 이것은 중토의 문화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당초 내가 중화 신전문화(神傳文化)를 개창했을 때 이곳에 다른 신을 배치해 사람의 방식으로 일부 고대의 것들을 보류해놓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이를 통해 자기 문화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 찾도록 하고 역사의 진실을 똑똑히 보게 하려는 것이다. 나라가 혼란할 때 사람들은 이곳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좋지 않은 생명이 배치한 인간세상의 일부 외국인들이 부정당한 수단을 채용해 가져갈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고대 문물이 진귀함을 알게 될 때에먀 비로소 고대의 것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장래 내가 인간세상에서 진정으로 대법을 널리 전할 때 연마를 배우는 사람이 아주 많을 테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소중히 여길 수 있을까? 그 때에도 고험과 교란이 있을 것이다. 당신들이 그 때에 모두 걸어지나가기를 바란다.”
명현과 문수보살은 함께 창세주께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며 만약 그때가 되어 사람으로 전생해 법을 얻을 수 있다면 반드시 소중히 할 것이며 창세주께서 안배하신 길을 잘 걷겠노라고 표시했다.
나중에 명현의 수련경지가 끊임없이 올라감에 따라 그에게도 많은 신통이 생겨났고 막고굴 벽화에 대해 그는 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한번은 그가 다시 동굴에 가서 유람하다 연화도안(蓮花圖案 그림 8)을 보았을 때 발아래 연꽃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연꽃이 그를 떠받치고 보현보살을 그림이 있는 그 회화 앞에 도착하자 보현보살이 그림에서 내려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고는 다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그림에 나오는 보현보살과 매우 닮은 것을 발견했다.
이때 문수보살도 나타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는 금생에 돈황에서 고독하게 지키며 자네의 수행과정을 완성했네. 우선 나와 함께 창세주를 만나 뵙고 이후의 일은 창세주의 안배를 따르도록 하세.”
시간이 흐르고 흘러 청나라 말이 되었다. 누란(樓蘭)유적, 안양의 갑골문 및 돈황 장경동이 발견되면서 단번에 중화문화의 역사와 내포가 대대적으로 제고되고 충실해졌다. 하지만 당시 중화국가는 사회전반에 도덕이 쇠락기였다. 도덕이 쇠락하고 패괴했기 때문에 전쟁을 초래했다. 그 우주의 나쁜 생명은 중화문명이 찬란히 빛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문명유적(누란유적), 고대문물유적(장경동 유서), 상나라 문자는 발견과 동시에 대량으로 외국인들에게 약탈당하거나 심지어 무지한 중국인이 용골(龍骨 역주: 원래 큰 포유동물의 뼈 화석을 말하며 갑골문이 새겨진 뼈도 용골에 해당한다. 중국에서 한약재로 널리 사용됨)로 삼아 대량으로 갈아 마셨으니 매우 통탄할 일이다. 또 많은 문물은 일단 훼손되면 복원할 방법이 없어 영원한 유감이 되었다.
이런 각도에서 말하자면 중공이 정권을 찬탈한 후 일으킨 4가지 낡은 것 타파와 문물을 훼손한 과정은 바로 반인류 범죄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모두 조상이 남겨놓은 것을 소중히 여길 텐데 그것은 일종 문화의 전승(傳承)이자 신을 공경하는 전승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영원히 훼멸했다면 이는 역사의 사슬을 영원히 끊어 중화문화의 혈맥을 단절한 것과 같다. 이것은 전통에 반하고 인류에 반하는 것으로 사람과 신이 함께 분노할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닌가!
창세주께서 대법을 널리 전하실 시기에 명현과 문수보살 및 그때의 수행자는 모두 이미 대법제자가 되었다. 명현과 문수는 비록 다른 지역에서 전생했지만 그 연분을 이은 후 그들은 함께 각자의 길에서 협력해서 정진하고 있다. 이런 상세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는다.
바로 다음과 같다.
부귀를 버리고 돈황으로 달려가니
채색 회화와 조소가 빛을 뿌렸네
모래바람 고독에 문수의 점화로
법을 얻었으니 정진하고 방황하지 말라!
舍棄富貴去敦煌
彩繪塑像放光芒
風沙孤寂文殊點
得法精進莫彷徨!
후기: 본문은 돈황에 관한 마지막 편이다. 돈황 막고굴에 관한 글은 몇 년 전부터 줄곧 쓰고 싶었지만 기연이 성숙하지 않아서 줄곧 완성하지 못했었다. 이번에 이 기회를 이용해 자신의 이런 소원을 완성한 것으로 칠 수 있을 것이다.
돈황은 백과사전과 같은 곳이다. 다시 이런 것을 쓰려고 해도 전혀 쓸 수 없다. 이번에는 단지 이런 몇 가지 주제만 선택해서 썼다. 단지 나의 글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더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오길 바랄 뿐이다.
이번에 돈황에 관한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예전에 내가 썼던 두 시리즈 <천고신운(千古神韻)>과 <천우중화(天佑中華)>를 대략적이나마 완성한 것으로 친다. 전에 두 시리즈를 완성하지 못한 것이 늘 유감이었다. 이번에 돈황 부분을 통해 최대한 개괄적으로 두 시리즈를 이런 형식으로 완성한 셈으로 친다.
앞으로는 조금씩 각 지역에서 법을 찾으러 다닌 일을 천천히 써나갈 예정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기대를 바란다. 허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63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