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의 시 ‘종남별업’을 읽은 감수
글/ 이량(李亮)
【정견망】
나는 원래부터 왕유(王維)의 시를 아주 좋아했다. 그가 성당(盛唐)시기 대시인이라거나 또는 대화가나 음악가라서가 아니고 무슨 ‘변새시’(邊塞詩)니 ‘전원시’(田園詩)를 대표하는 인물이라서가 아니었다. 오직 왕유가 불법을 닦은 수도인의 하나라서 그의 시 속에서 고심한 불법(佛法)의 지혜가 반짝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동시대 사람들은 왕유를 가리켜 “당대(當代) 시의 거장이자 선(禪)의 이치에 정통”하다고 찬양하며 ‘시불(詩佛)’이라 불렀다.
예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귀에 익숙한 왕유의 시구들이 많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북쪽 창가 복숭아 자두나무 아래 한가로이 앉아 향불을 피우네(北窗桃李下,閑坐但焚香)”
[봄날 산사의 풍경을 노래하다(春日上方即事)의 마지막 2구절]
“대 사막엔 한 가닥 봉화연기 곧추 오르고 긴 강 너머 지는 해는 둥근데(大漠孤煙直,長河落日圓”
[변새 지대로 출사하다(使至塞上) 중 5~6구]
“강물은 천지 밖으로 흐르고 산색은 있는 듯 없는 듯 가물거리네(江流天地外,山色有無中)”
[한강을 배를 띠우며(漢江臨泛) 중 3~4구]
“명월은 솔숲 사이로 비치고 맑은 샘물은 바위 위로 흐르네(明月松間照,清泉石上流)”
[산장의 가을 저녁(山居秋暝) 중 3~4구)
이런 구절들은 지금까지로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천고(千古)의 명구들이다.
왕유의 시 중에 ‘종남별업(終南別業)’이란 시는 특히 신운(神韻)을 극치까지 발휘했다.
우선 시 전체를 감상해보자.
중년에 자못 도를 좋아해
만년에 종남산 기슭에 사노라니
흥이 일어 매양 홀로 나서면
상쾌한 일은 다만 혼자만 알뿐
거닐다 물이 다하는 곳에 이르면
앉아서 구름이 이는 때를 바라보네
어쩌다 숲속 노인이라도 만나면
담소하느라 돌아갈 줄 모르네
中歲頗好道,晚家南山垂。
興來每獨往,勝事空自知。
行到水窮處,坐看雲起時。
偶然值林叟,談笑無還期。
이 시는 대략 왕유가 40세 이후에 지은 것으로 관직을 완전히 떠나지 않고 반(半) 은거생활을 하는 가운데 쓴 것이다. 왕유는 당시 조용히 수련하면서 스스로 기쁨을 얻는 심태를 진실하게 묘사했다.
나는 이 시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 ‘행도수궁처(行到水窮處) 좌간운기시(坐看雲起時)’ 두 구절이라고 본다. 이 두 구절에는 철리(哲理)와 지혜가 가득하다. 명나라의 유명한 학자이자 문예비평가였던 호응린(胡應麟)은 《시수(詩藪)》에서 왕유의 시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읽다보면 몸과 세상을 모두 잊고 만 가지 상념이 전부 고요해진다.(讀之身世兩忘,萬念皆寂)”
청말민국시기의 근대 학자 유폐운(俞陛雲)은 《시경천설(詩境淺說)》에서 “물이 다하는 곳에 이르면 마치 이미 끝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또 구름이 이는 것을 보면 오묘한 경계가 무궁하다. 처세와 일의 변화가 무궁(無窮)하고 학문의 의리를 구하는 것 역시 무궁함을 깨달을 수 있다. 이 두 구절에는 화기(化機)의 오묘함이 있다.”고 했다.
“행도수궁처”에서 시인이 계속 걷고 걷다보니 문득 계곡이 사라지는 곳이 나타났다. 산이 막히고 물이 다하니 마치 더 이상은 출로(出路)가 없는 것 같다.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되면 경박한 일반인들은 곤경(困境)을 감당하기 어려워 우울하거나 절망적인 정서가 일어날 것이다. 가벼운 사람은 번뇌로 불안해하거나 우울증이 된다. 심한 사람은 자포자기해서 자신을 해치게 된다. 예를 들면 증시가 폭망했다거나 사업이 완전히 망했다거나 연애가 뜻대로 되지 않아 건물에서 뛰어내리거나 약을 먹고 죽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흉금이 넓고 내심(內心)이 강한 사람이라면 마치 왕유처럼 담담하고 편안하게 새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볼 것이다. 바로 이때 당신은 현기(玄機)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산봉우리 위로 구름이 피어오른다.
한 사람의 수련과정 역시 아마 아주 많은 곤란에 직면하게 된다. 신체 정화(淨化)를 감당하거나 또는 심성을 제고하는 관(關)을 만나거나 또는 외부환경에서 오는 마난(魔難) 등이다. 때로는 심지어 산이 막히고 물이 다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만약 이때 조금이라도 물러나려는 마음이 싹터 나오면 그럼 분명 이전까지의 모든 공이 수포로 돌아가고 나중에 후회해도 만회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이런 때 우리가 왕유를 배워보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아예 일체 세속의 정과 근심걱정을 모두 내려놓고 좀 소탈해지면 온갖 생각이 모두 조용해지는데 이렇게 앉아서 구름이 이는 것을 지켜보자. 그때가 되면 당신은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난 몇 년을 돌이켜보면 우리 수련자들은 온갖 역경과 생사의 갈림길을 지나왔다. 당시에 제아무리 놀라고 위험하며 제아무리 위기가 심했을지라도 지금은 모두 지나오지 않았는가? 지금 다시 그동안 겪은 곤경들을 돌아보면 전처럼 그런 일이 아닐 것이다. 물론 아직 마난이 남아 있긴 하지만 전보다는 훨씬 줄어들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역경 앞에서 실망하지 말아야 하며 더욱이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행도수궁처 좌간운기시”라, 인생의 매 단계 어디에서나 ‘물이 다하는(水窮)’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만약 이런 시경(詩境 시의 경계)으로 인생을 대한다면 곳곳에서 ‘구름이 일어날(雲起)’ 것이며 전기(轉機)가 있고 희망이 있을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746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