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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대순(大順)황제 이자성 (4)

선정으로 민심을 얻다

글/ 유효(劉曉)

틈왕 이자성(에포크타임스)

이자성은 일개 평민출신으로 십여 년 간 수많은 전투를 통해 명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정권을 수립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천상(天象)의 변화다. 명나라 후기에 들어와 황제들이 정사를 태만히 하고 덕행을 닦지 않으면서 관료사회는 심각하게 부패했고 민생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 명조(明朝)의 기수(氣數)가 확실히 다한 것 역시 이자성이 왜 거듭 하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지 설명해준다. 그 외에도 다른 몇 가지 원인이 있었다. 여기서는 이자성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 살펴보자.

1. 백절불굴의 정신

이자성은 농민군에 투신한 후 여러 사람에게 몸을 의탁해야 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환경이 좋든 또는 나쁘든 그는 한 번도 명나라 조정에 굴복하지 않았고 또한 자신이 큰일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자성이 상락산(商洛山)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주변에는 극소수 패잔병들만 남자 대부분 의기소침해졌지만 그만이 홀로 태연자약했다. 낮에는 사냥을 하고 밤에는 책을 읽었으며 또 주위 사람들을 격려하면서 “이번 액운(厄運)만 잘 넘기면 천하를 얻을 날이 멀지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손처남 고일공(高一功 고계영의 남동생)이 옆에 있다가 몰래 웃었다. 그러자 이자성이 정색을 하고는 “과거 한고조는 비록 백전백패를 했지만 결국에는 천하를 획득할 수 있었는데 네가 이런 것을 아느냐?”라고 말했다.

2. 주색을 멀리하고 소박하게 살면서 부하들을 잘 대해

이자성에 비판적인 관찬(官撰)의 《명사(明史)》에서는 이자성은 “술과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부하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관에서 편찬한 지방지 《연수진지(延綏鎮志)》에서도 “(이자성은) 오직 담백함을 좋아했고 소박하게 살았으며 아내 하나와 첩 하나를 두었을 뿐 자식이 없었다.”고 했다.

당시 다른 농민군 두령들과 비교하면 큰 차이를 알 수 있다. 가령 이자성의 부하 장수였던 나여재(羅汝才)는 “처첩이 수십 명에 달했고 화려한 장식이 달린 비단옷을 입었으며 휘하에 여자 악사들로 구성된 악단만도 여럿 있었다.”

또 다른 농민군 두령 장헌충(張獻忠)은 여색을 탐하고 재물을 아주 좋아하는 위인이었다.

하지만 이자성은 이들의 이런 행실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사서(史書)에는 또 이런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자성이 서안에서 대순(大順)정권을 건립한 후의 일이다. 당시 명나라에서 투항했던 장국신(張國紳)이란 인물이 이자성에게 잘보이기 위해 이전 동료였던 문상봉의 처이자 젊고 아름다웠던 등(鄧)씨를 바쳤다.

하지만 굴종을 원치 않던 등 씨가 이자성을 만난 후 자세한 내막을 들려주자 이자성은 몹시 화를 내고 장국신을 죽인 후 등 씨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가 미색을 밝히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나중에 명나라 도성인 북경을 공략해 성안으로 진입할 때도 의식이 아주 간단했다.

“삿갓에 옥색의 옷을 입고 오박마(烏駁馬 검고 얼룩덜룩한 말)를 탔으며 기병 다섯이 그를 따랐다.” 이자성은 자금성(紫禁城)에 들어간 후에도 비교적 조용히 지냈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미음을 약간 마셨으며 다른 물건은 사용하길 꺼렸다.” “옷과 모자도 남들과 차이가 없었다.” 외출할 때면 오직 말을 탔으며 작은 황색 일산(日傘)만 따르게 했다. 궁녀 한둘을 거두긴 했지만 그렇다고 분수를 넘진 않았다.

이자성은 또 수하들을 잘 대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부귀를 함께 나눴다. 이 역시 그가 여러 차례 패전했음에도 왜 그렇게 많은 장수들이 여전히 그를 따랐는지 설명해준다.

3. 간언을 받아들여 민심을 크게 얻다

이자성은 자신과 견해가 다른 말을 아주 잘 들었고 좋은 의견을 골라서 따르곤 했다. 《명말기사본말(明末記事本末)》에는 “매번 계획을 세울 때면 무리를 모아 서로 다른 의견을 토론하게 하면서 자성은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았다. 그중에서 좋은 의견을 암암리에 사용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측하지 못했다.” “매사에 늘 함께 상의했다.”

이자성은 군사(軍師) 이암(李岩)을 얻은 후 그가 제안한 민심수습방안을 흔쾌히 채택했다. 즉, 36개 조의 군령(軍令)을 제정해 군사들이 함부로 백성들을 죽이지 못하게 했고 멋대로 민가를 불태우거나 부녀를 간음하는 행동을 엄하게 금지시켰다. 예를 들어 “말이 농경지에 뛰어들게 한 자는 목을 베었다.”

북경에 들어갈 때도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각 영(營)에서 백성을 함부로 죽이는 자가 있으면 부대원 전원을 참수한다.”고 했다. 북경에 들어간 후에는 또 “함부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남의 재물이나 부녀를 빼앗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거듭 밝혔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이자성 군대는 초기부터 질서가 아주 좋았다.

쉽게 말해 당시 여러 부대 중, 명나라 정부군을 포함해서, 오직 이자성의 부대만이 군기(軍紀)가 엄명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심지어 그의 적들조차 인정할 정도였다.

예를 들어 청나라 때 장대(張岱)가 지은 명나라 역사서 《석궤서후집(石匱書後集)》에는 “적(대순군을 가리킴)은 군령이 엄명해서 장수와 하급관리들이 함부로 침략하지 않았다. 명나라 말기 이래 부대(관군)는 기율이 없어져 가는 곳마다 병사들이 함부로 약탈을 일삼았다. 이를 가리켜 타량(打糧 양식 구하기)이라 했는데 마을이 폐허로 변했다. 백성들은 이런 폭정을 견디다 못해 차라리 적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겼다.”라고 기록했다.

이외에도 이자성은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고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는 정책을 폈다. 이를 농민군 중 살인마왕(殺人魔王) 장헌충 등과 비교하면 결코 함께 논할 수 없었다.

4.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다

이자성이 처음 하남(河南)에 진입했을 때 계속된 자연재해와 폭정으로 천리에 걸쳐 농토가 황폐해졌다. 백성들은 먹을 게 없어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혹한 상황이었다. 그는 ‘창고를 열어 식량을 방출하자’는 이암의 건의를 받아들였고 이를 통해 광범위한 민중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또 낙양(洛陽)을 어렵게 공략한 후에는 “복왕(福王 만력제의 아들 주상순)의 왕부와 부자들의 집에서 수만 석의 쌀과 수십만에 달하는 재물을 방출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했다.” 당시 낙양의 번왕(藩王)인 복왕의 집에 보관된 돈이 만(萬)관이 넘었고 식량은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복왕이란 위인은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끝까지 재물을 풀어 군대를 기르거나 백성들의 재난을 구휼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결국은 자신이 죽은 후 묻힌 땅조차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동 뿐 아니라 서안 등에서도 늘 이렇게 했기 때문에 이자성은 민심을 크게 얻을 수 있었다.

5. 비범한 군사적 재능

이자성은 집안 대대로 말을 키워왔기 때문에 기병(騎兵)작전에 대해 독창적인 견해가 있었다. 전투에 나설 때면 아군의 우세한 병력을 한곳에 집중해 섬멸전을 펼쳤고 적이 강한 곳은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하면서 적을 피해 다니다가 일단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판단되면 과감한 결정을 내려 질풍처럼 행동에 나섰다.

일찍이 홍승주(洪承疇)로부터 “세상의 좋은 장수로 천하에 둘도 없다(世間良將,天下無雙)”는 찬사를 들었던 조문조(曹文詔)조차 이자성과의 전투에서 포위되어 목숨을 잃었다.

아울러 이자성은 행군할 때도 늘 병서를 읽으며 자신의 작전과 지략을 풍부히 했다.

바로 이런 모든 것에 천명(天命)이 더해졌기 때문에 이자성은 한 차례 위대한 업적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6/7/19/n8116011.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