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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만방에 위덕 떨친 영락대제(永樂大帝)

간언을 잘 받아들이고 공신을 우대 (상)

글/ 유효(劉曉)

명 성조(成祖)는 대신들이 용감하게 의견을 말하고 진실을 말하도록 격려했다. 또 과감한 행동보다 직언을 소중히 여겼다. 사진은 명나라 과거의 최종관문인 전시(展試) 장면.

1402년 7월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남교(南郊)에서 천지에 제사를 올리고 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이듬해부터 연호를 영락(永樂) 원년으로 고치고 모든 것은 명 태조 때의 제도에 따르게 하니 이가 바로 명 태종(明太宗 나중에 성조로 바뀜)이다. 그는 또 명대에 가장 뛰어난 공적을 수립한 위대한 황제였다.

최고 통치자로서 웅대한 지략을 지녔던 주체는 근검절약하고 백성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동정하는 주원장의 장점을 계승했다. 하지만 부친의 의심 많고 독단적인 단점은 버렸다. 그는 과감하고 용맹하며 신하들에 대해 위엄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독단적이지 않았으며 간언(諫言)을 잘 받아들였다. 그는 “법운용은 마땅히 관대하고” “사람을 대함에 진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수성(守成)에 주의했을 뿐만 아니라 국정에 힘을 기울여 영락 연간을 명조(明朝) 역사상 가장 휘황하고 번영한 시기로 만들었다.

정사에 힘쓰고 간언을 잘 받아들여

영락제는 부친인 홍무제(洪武帝)와 마찬가지로 정사에 근면한 부지런한 황제였다. 그 자신이 똑똑하고 유능했지만 자만하지 않았으며 예전처럼 마음을 비우고 간언을 받아들였다. 이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군왕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중요한 덕성의 하나다.

역대로 대부분의 황제들은 보통 아침에 대부분의 정사를 처리했고 저녁에는 업무량이 적었다. 하지만 영락제는 오전뿐 아니라 저녁에도 회의를 열었다. 저녁 조회가 끝난 후에는 6부 상서 등 가까운 신하들만 남겨 중요한 일을 상의하곤 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아침 조회에서는 보고할 내용이 너무 많고 시간이 부족해 대신들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 조회는 상대적으로 업무량이 적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이때 그는 대신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게 했고 또 일부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토론하거나 의견을 교환했다.

명성조(明成祖) 주체(朱棣)(양매/에포크타임스 제작)

성조는 즉위 후 여러 신하들에게 이렇게 효유(曉諭)했다.

“대체로 사람은 재주와 식견이 달라서 혹 이 방면에는 뛰어나지만 저 방면에는 단점이 있다. 만약 짐이 일을 함에 잘못이나 오류가 있다면 즉각 지적할 수 있으니 이를 책망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감추고 말하지 않아 시간이 오래된 후에야 발견한다면 이는 짐을 속인 것과 다름이 없으니 법칙상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이처럼 신하들에게 자신의 허물을 바로잡아달라고 당부했다.

성조는 또 늘 대신들에게 말을 하고 과감하게 의견을 제출하며 진실을 말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직언(直言)이 감위(敢爲 과감한 실천)보다 더 소중하다고 보았다.

“일을 과감히 하는 대신은 구하기 쉽지만 용감하게 직언(直言)하는 대신은 얻기 힘들다. 이는 과감한 행동은 자신에게 좋고 용감한 직언은 군주에게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나라 태종 정관(貞觀) 연간의 왕규(王珪)나 위징(魏徵)처럼 직언하는 풍토는 흔히 보기 어렵다. 만약 진언하는 사람이 두려움이 없고 듣는 사람에게 저촉이 없다면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근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는 또 관련 부서에 명령을 내려 주왕에게 간언한 은나라 충신 비간(比干)의 사당과 묘를 새로 수리하게 했다. 성조는 “임금이 신하를 예의(禮)로 대하고 신하가 임금을 충성으로 모시면 임금과 신하가 각기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라고 보았다.

성조는 과감하게 직언하는 관원에 대해서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직언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책망했다. 예를 들어 영락 초년 절강(浙江)의 한 교유(敎諭 원주: 공묘의 제사를 관장하며 현학縣學에서 생원들을 가르치는 관직)가 상서를 올려 지방의 몇 가지 시급한 일에 대해 의견을 제출했다. 성조는 그를 칭찬하고 상을 내리게 했고 또 그가 올린 상서문을 대신들에게 주어 돌려보게 했다. 신변의 대신들도 이처럼 직언하길 바란 것이다.

또 어느 해 성조가 이부(吏部)에 명령해 주현(州縣)에서 다년간 근무해 백성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업무능력이 뛰어난 관원들을 선발해 경성에 들어와 육부에서 일하도록 했다. 이들이 경성에 도착하자 성조는 그들에게 대담한 직언으로 지방행정의 폐단을 지적하게 했다.

하지만 처음엔 직언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성조는 매우 언짢게 여기며 관련 관원들에게 자신의 희망과 불만을 알리는 동시에 신변의 신료들에게도 “용감하게 직언하는 신하는 실로 얻기 어렵구나!”라며 개탄했다. 그러면서 또 다시 대신들에게 언제든 자신의 과실을 지적해달라고 했다.

영락 5년 개평(開平 지금의 개봉)의 위졸(衛卒 호위병) 장문정(蔣文霆)이 상서를 올려 관련 부서에서 민간에서 각종 물건을 구매할 때 겉으로는 구매라고 하지만 사실상 강제로 빼앗아 백성들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고 했다. 만약 현지에서 생산되는 물품이라면 그래도 조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다방면으로 이를 조달하느라 가산을 탕진하게 된다. 그러므로 앞으로 만약 관련 부서에서 백성들의 돈을 일부라도 함부로 가져간다면 마땅히 뇌물수수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건의했다. 또 만약 각종 물품도 현지에 있는 물건이 아니면 마땅히 관련 부서에서 취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성조는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성조는 또 윗사람의 뜻만 받들고 아첨하는 관원을 몹시 싫어했다. 한번은 귀주(貴主) 포정사(布政使)가 상주문을 올려 “황상의 은혜로운 조서가 남쪽 관아에 도달하니 깊은 산골에서도 모두 ‘만세’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이는 황상의 위엄과 은혜가 머나먼 산천(山川)까지 더해진 영험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일부 대신들이 이 말을 듣고는 모두들 앞 다퉈 성조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성조는 기쁜 낯을 보이기는커녕 “산 정상에서 소리를 지르면 여러 산과 골짜기에서 모두 반응이 있는 게 당연하고 이는 아주 평범한 일이다. 경들은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며 나를 즐겁게 하려 하지만 이는 실로 현인군자(賢人君子)의 행동이 아니다.”라고 했다.

성조는 또 상서(祥瑞)로운 일에 대해서도 늘 조심스럽고 신중히 대했다.

영락 초년 섬서(陝西)의 흥평(興平)과 봉상(鳳翔) 두 현에서 상서로운 보리[瑞麥]를 바쳤다. 여러 신하들이 표문을 올려 이는 성덕(聖德)이 널리 퍼져 천하가 태평한 징조라고 축하했다.

하지만 성조는 예부상서(禮部尙書) 이지강(李至剛) 등에게 “상서로운 보리는 진실로 상서롭지만 멀고 가까운 사방에서 만물이 모두 적당한 장소를 얻지 못함이 없어야만 태평(太平)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조정 안과 밖에서 과연 단 한사람도 원망하는 기운이 없을 수 있겠는가? 짐은 표문을 보고 단지 더욱 부끄러움만 느낄 뿐이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를 대함에 진실을 귀하게 여기니 아첨은 치세(治世)의 기풍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영락 2년 9월 주왕(周王)이 인수(仁獸)로 알려진 추우[騶虞 역주: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서(祥瑞)로운 동물로 성인(聖人)의 덕(德)에 감동해 나타나는데, 흰 호랑이 모양에 검은 무늬가 있고 살아 있는 풀은 밟지 않고 살아 있는 생물은 먹지 않는다]를 바치자 여러 신하들이 조정에서 축하인사를 올렸다.

성조는 가까운 신하들에게 “방금 여러 신하들의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두려워졌소. 거대한 천하에 만약 한 사람이라도 원망하는 기운이 있다면 어찌 인(仁)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한마음이 성실하지 않다면 어찌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짐은 밤낮으로 근심하는데 어찌 추우를 하늘이 내게 내린 상서로운 영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상서로움의 출현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 쉽다. 때문에 고대의 밝은 군주는 상서(祥瑞)를 만났을 때 늘 자신을 일깨웠고 상서로움의 출현으로 인해 나태해지지 않도록 했다. 만약 추우가 정말 상서로운 것이라면 나는 더 근신해야 한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하루는 성조가 무영전(武英殿)에 와서 《존심록(存心錄)》을 읽다가 옆에 있던 한림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방금 남연(南燕)의 모용초(慕容超)가 교제(郊祭)를 올릴 때 기이한 짐승이 제단 한쪽에서 나타났고, 수양제(隋煬帝)가 원구(圜丘)에서 제사를 올릴 때 폭풍을 만나 예식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끝낸 것을 읽었는데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이 아주 빨리 죽었다. 고인(古人)은 오직 덕행만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고 덕이 없으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했다. 선량하면 상서로움을 내리지만 선하지 않으면 재화(才華)를 내린다.”

또 “제사를 지낼 때는 진실로 성실하고 경건해야 하지만 반드시 평소 쌓은 선행이 있어야 복을 얻을 수 있소. 만약 평소 행동이 도덕에 어긋나면서 오직 제사를 지낼 때만 경건함을 나타낸다면 어찌 복을 얻는 도리가 있겠는가?”

영락 14년 여름 예부 사제사(祠祭司)의 낭중(郎中) 주납(周訥)이 상서를 올려 봉선(封禪)할 것을 청했다. 예부상서 여진(呂震)도 성조에게 이 건의를 받아들이자고 요청했다. 그러자 성조가 여진에게 말했다.

“지금 천하에 비록 별다른 일이 없다고는 하지만 홍수와 가뭄 및 역병이 간혹 존재한다. 짐은 매번 지방 군현에서 올리는 상주문을 볼 때마다 내심 당황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어찌 나 스스로 태평한 세상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당태종도 봉선하지 않았는데 위징은 태종을 매번 요순과 같은 성인으로 대하곤 했소. 그대들은 짐을 태종의 아래에 놓으려고 하는 것이오 아니면 위징처럼 임금을 사랑하는가! 그대들은 마땅히 고인(古人)처럼 스스로 분발해야만 어깨에 짊어진 책임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오.”

(계속)

【만방에 위덕을 떨친 영락대제】 시리즈 문장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6/5/24/n7926984.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