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언을 잘 받아들이고 공신을 우대 (하)
글/ 유효(劉曉)

성조(成祖)는 천하를 얻은 후 일부 신임하는 대신들을 ‘병직문연각(並直文淵閣) 예기무(預機務)’로 선발했다. [역주: 문연각과 예기무는 문(文) 무(武) 두 분야에서 황제의 자문기관에 속한다. 자신이 신임하는 대신들을 옆에 두고 언제든 의견을 들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는 당 태종이 홍문관을 설치해 학사들을 교대로 숙직시키며 그들의 의견을 경청한 것과 유사하다.]
공신(功臣)과 자신을 추종한 사람들에 대한 성조의 태도는 명 태조 주원장과는 달랐다. 즉 이들을 잘 대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선발한 사람을 임용할 때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임금과 신하가 (나라를) 보전할 수 없는 것은 늘 불신(不信)에서 시작된다. 진실로 서로 믿을 수 없다면 설사 부자지간이라도 진(秦)과 월(越)처럼 멀어지는 법인데 하물며 임금과 신하이랴! 나는 여러 공신들에게 두텁게 보답하고 진심으로 대할 것이다. 늘 장점을 보고 단점을 보지 않으며 오직 재주에 따라 임용한다면 공(功)을 지키고 사람을 쓰는 두 가지를 다 얻을 수 있노라.”
예를 들어 어사가 서녕후(西寧侯) 송성(宋晟)이 권력을 전횡해 제대로 보고도 하지 않고 업무를 처리한다고 탄핵하자 성조가 그에게 말했다.
“사람을 씀에 전횡하지 않고 어찌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하물며 멀리 변방에 있는 대장이 어떻게 일일이 모두 조정의 뜻을 확인하고 그에 근거해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느냐?
이에 성조는 특별히 한 차례 칙령을 내려 송성이 편리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했다.
생사를 같이 한 장수와 자신을 보좌한 공신들에 대해 성조 역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실시했다. 예를 들어 원래 왕부의 신하였던 구복(丘福)은 전쟁 중에 늘 최전선에서 서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지만 한번도 자신의 공을 다투지 않았다. 성조가 즉위한 후 구복은 1등 공신이 되었고 패국공(淇國公)에 봉해졌다. 성조 휘하의 또 다른 맹장이었던 주능(朱能)은 성국공(成國公)에 봉하는 등이었다. 성조는 공신들에게 벼슬을 봉하고 관작을 높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하사품과 돈을 주었다.
특히 공로가 아주 컸던 도연(道衍)에 대해 성조는 불교와 승려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는 승록사(僧錄司) 좌선세(左善世) 직책을 주었다. 영락 2년에는 또 자선대부(資善大夫)와 태자소부(太子少傅)를 더해주었다. 성조는 그와 대화할 때면 직접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대신 ‘소사’라 불렀다. 하지만 도연은 끝내 환속하지 않았고 영락 5년(1407년) 은거를 선택해 영락 16년 원적했다.

건문제의 신하들을 중용
당시 조정에는 건문제 시기의 옛 신료들이 있었다. 이들은 비록 성조에게 귀순하긴 했지만 일을 할 때마다 늘 전전긍긍하며 근심이 많았다. 이들의 근심을 해소해주기 위해 성조는 특별히 해진(解縉) 등에게 명령해 건문제 시기 여러 신하들이 올린 상주문을 전부 정리해서 오직 국가경제와 민생에 관련된 것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전부 소각하게 했다.
아울러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건문(建文)이란 사람을 위해 진심을 다한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는 게 아니다. 단지 건문을 유도해 조종(祖宗)의 법규를 망치게 한 그런 자들을 미워할 뿐이다. 전에 너희들은 그의 대신이었으니 당연히 그에게 충성을 다해야 했고 지금은 나를 섬기니 마땅히 내게 충성을 다해야하니 숨기거나 은폐하지 말라.”
또 일부 뛰어난 능력을 지닌 건문제의 구신(舊臣)들을 중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해진 외에 건의(蹇義)와 하원길(夏原吉) 등이 있었다.
건의는 대담한 직언으로 좌시랑(左侍郎)으로 발탁되었고 나중에 상서(尙書)까지 올라갔다. 영락 7년(1409년) 성조가 북경에 가서 순수할 때 그더러 황태자를 도와 남경에 남아 감국(監國)하게 했다. 당시 그는 조정의 전장제도(典章制度)에 익숙하고 예의에 통달했기 때문에 국가 대사를 모두 그와 상의하게 한 것이다. 신임이 아주 두터웠기 때문에 성조는 그에게 여러 차례 명령을 내려 다른 부서의 일을 겸해 처리하게 했다. 이렇게 맡은 임무가 많았음에도 그는 능수능란하게 잘 처리했다.
하원길은 정사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지극히 공평무사한 인물이라 중용되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황복(黃福)은 건문 시기 구신이니 중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성조가 이렇게 반박했다.
“임금과 신하가 함께 하며 진심으로 대해야 하며 의심을 남겨두어선 안 된다. 제왕이 진심으로 대한다면 신하 역시 기꺼이 전력을 다할 것이다. 만약 의심을 남겨둔다면 신하 역시 책임을 면하는 데만 급급할 것이니 누가 진심을 다하려 하겠느냐?”
누구나 재능을 다할 수 있게
성조는 또 관리 임용을 책임진 이부(吏部) 관원들에게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선발해서 위로 올리라고 여러 차례 신신당부했다. 아울러 이부 관원들에게 인재가 사람마다 “그 재능을 다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즉 사람이 지닌 고유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작은 일에 큰 재목을 쓸 수 없고 반대로 큰 일에 작은 재목을 쓸 수는 없다.
이외에 또 사람의 품덕(品德)을 중시해야 한다. 성조는 일찍이 이런 의심심장한 말을 했다.
“군자는 용감하게 직언하고 관직이나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나라를 위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소인은 윗사람에게 아첨하며 오직 출세하고 부자가 될 생각만 한다. 왜냐하면 자기 한몸의 사적인 이익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각 지방에 있는 재능 있는 사람들을 위로 선발해 올리기 위해 성조는 전국 각 주현(州縣)의 관리들에게 조령을 내려 인재에 대한 심사를 진행하게 했다. 9년 기한의 심사해서 탁월한 성적을 올린 관리들을 포상하는 외에 이들을 모두 경성에 불러 중앙 6부에서 일하게 했다.
대신을 예우하다
성조는 또 늘 대신들을 예로 대하곤 했다. 한번은 한림원 시독학사(侍讀學士) 무주문(武周文)이 외직으로 나가게 되어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 성조는 그에게 의자를 주어 앉게 한 후 장시간 담화를 나눴다. 또 떠날 때는 술과 음식을 내리고 여행 경비까지 하사했다.
그러자 시독(侍讀) 호광(胡廣)이 말했다.
“폐하께서 유신(儒臣)을 대하실 때 나아가고 물러남에 늘 은혜와 예의를 겸비하셨으니 유생으로서 이에 큰 영광이라고 느낍니다.”
그러자 성조가 웃으면서 말했다.
“짐이 유학의 도[儒道]를 이용해 천하를 다스리는데 어찌 유자(儒者)를 예우하지 않을 수 있겠소? 멀리 가려면 반드시 좋은 말을 중용해야 하고, 식량을 확보하려면 반드시 좋은 농부를 중시해야 하니 또한 각자 그 쓰임이 있는 것이오.”
이외에도 북방의 겨울은 몹시 춥기 때문에 북경 행궁에 근무하던 여러 신하들이 동상을 입곤 했다. 영락 7년 성조가 북경을 순시할 때 아침 조회를 끝낸 대신들을 우순문(右順門) 안에 있는 편전(便殿)에서 대기하게 했다. 업무가 있어서 보고할 관원들은 순서에 따라 대전에 들어가 알리게 했고 일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었다.
너그럽되 엄격함을 동시에
일부 관원들의 잘못과 범죄에 대해서 성조는 또 아주 관대하게 처리했다. 가령 관리가 올린 문서에 글자를 잘못 적는 경우, 성조는 사람의 정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공문서가 많다보면 잘못을 피하기 힘들다고 인정해 속일 의도가 아니면 죄를 추궁하지 않았다.
또 도독(都督) 정달(程達)이 죄를 저질렀을 때 성조는 그더러 서평후(西平侯) 목성(沐晟)을 따라가 공을 세워 속죄하게 했다.
그는 옆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했다.
“군자가 일을 처리하는 도는 죄가 크고 극악해 절대 용서할 수 없거나 작은 선행에 대해서는 절대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오. 사람으로서 어찌 허물이 없겠는가? 하지만 작은 허물을 중시하고 큰 선을 소홀히 한다면 선량한 사람들이 나태해질 것이오. 또 작은 재능을 중시하고 큰 죄악을 면제해준다면 악인(惡人)들이 더욱 방종해질 것이오. 때문에 악이 너무 커서 용서하기 어려운 자는 재능이 있어도 고려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래도 사용할 수 있는 자라면 그가 저지른 잘못을 가볍게 여길 수 있다. 이렇게 한다면 선악(善惡)이 모두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성조는 또 일찍이 시신(侍臣)들과 상벌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한 시신이 “고인은 사람에게 관직으로 상을 주는 것이 재물로 주는 것만 못하다고 했습니다.”라고 했다.
성조는 이를 인정하면서도 두 가지 방법 모두 완벽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만약 임금이 한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한다면 두 가지(관직과 재물)를 모두 중시해야 한다. 재물이 백성들의 노고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면 반드시 (재물을) 함부로 줄 수 없을 것이고, 관리를 부양하는 것이 백성들임을 안다면 반드시 (관직을) 함부로 줄 수 없을 것이다.
영락제의 성공적인 통치 하에서 각급 관원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자신의 직책을 감당할 수 있었고 근면히 일해 행정효율이 상당히 높았다. 아울러 나를 다스리는 정치에 뛰어난 일부 신하들과 청렴결백한 관리들이 잇따라 나타났으니 이 역시 영락제가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을 실현해 태평성세를 이끌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이다.
(계속)
【만방에 위덕을 떨친 영락대제】 시리즈 문장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6/5/25/n7930941.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