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 연구팀
【정견망】
3. 오씨(五氏) 중
복희씨
복희씨는 성이 풍(風)이고 포희씨(庖犧氏), 복희씨(虙犧氏), 포희씨(炮犧氏), 복희씨(伏戲氏) 등으로도 불리는데 간혹 태호(太昊)나 희황(羲皇)으로 불리고 웅황씨(雄皇氏) 내지는 황웅씨(黃熊氏)로도 불린다. 이런 것들은 아마 같은 문명시기 한 분 신씨(神氏)의 이름은 아닐 것이다. 현재로서는 고증할 방법이 없지만 그의 업적이나 성취를 말하자면 확실히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우리는 ‘복희씨(伏羲氏)’로 그를 존칭하며 우리가 찾아낸 그의 위대한 공업(功業)에 관해 공경히 서술해보고자 한다.
전설에 따르면 수인씨가 통치의 말기에 화서국(華胥國)이란 지방이 있었다. 그곳에 있는 큰 늪을 뇌택(雷澤)이라 불렀다. 어느 날 한 거인의 발자국이 뇌택 가운데 나타났다. 그런데 화서국에 화서씨(華胥氏)라 불리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호기심에서 거인의 발자국 위를 발로 밟고 뭔가 이상한 느낌이 있어 임신한 후 복희씨를 낳았다. 복희씨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는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들을 보여주었고 성인(聖人)의 덕(德)을 갖춰 수인씨를 대신해 당시 천하의 왕이 되었다.

《열자‧황제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황제(黃帝)가 낮에 잠을 자다가 꿈에 화서국(華胥國)에 놀러갔다. 화서국은 아주 멀고 신비한 곳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고 오직 신(神)만이 놀라갈 수 있다. 그 나라에는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도 모든 것이 자연과 서로 합일(合一)해 백성들은 사욕(私欲)이 없으며 사랑하거나 미워함도 없으며 또 그 어떤 고통도 없었다. 삶을 탐하지도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아 하늘을 날 수 있었으며 신력(神力)을 구비해 자연 만물이 모두 그들을 해칠 수 없는 기묘한 극락(極樂)의 국토였다. 황제는 깨어난 후 몸을 기르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깨달았다. 또 28년이 지나자 나라가 크게 다스려졌고 다스림이 화서씨의 나라와 큰 차이가 없어졌다.”
이 기록에 따르면 복희의 고향인 화서국은 반신(半神)의 나라다. 성인은 천명(天命)을 받고 인간세상에 내려와 인류문화를 전수하고 인류를 이끌고 야만상태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순진하고 선량한 본성으로 돌아가게 했으니 신과 서로 통하는 반인반신(半人半神)의 나라를 만들었다.

《둔갑개산도(遁甲開山圖)》에서는 “구이산(仇夷山)이 복희씨가 출생하고 천하를 다스리던 곳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구이산은 상고시대 지명으로 이곳이 과연 어디인지는 지금으로서는 고증할 방법이 없다. 오늘날 감숙성 서화현(西和縣)과 예현(禮縣)이 만나는 곳에 구지산(仇池山)이 있는데 이 산속에 복희애(伏羲崖)란 절벽이 있다. 높이가 약 2천 미터에 달하며 복희가 출생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복희가 팔괘를 만들다
복희씨는 중화민족의 인문시조(人文始祖)로 불린다. 그는 원고(遠古) 인류에게 박대(博大)하고 현오(玄奧)한 반신(半神)문화를 전수해주었고 처음으로 팔괘(八卦)를 창조해 중화역학(中華易學)을 개창했다.
복희씨가 통치하던 시기의 인류는 심령(心靈)과 사회환경이 더욱 복잡하게 변해 결승기사(結繩記事)는 이미 인류생활에 적합하지 않게 되었다. 복희씨는 이에 추상적인 ‘수(數)’를 구체화시켜 팔괘(八卦)를 연화해냈고 또 팔괘를 서로 배합해 괘마다 6효가 있는 64‘상(象)’을 만들었다. 이를 이용해 사건을 기록하니 신명(神明)과 서로 통했다. 때문에 팔괘는 또 중화 문자의 기원으로도 불리며 인류가 천지(天地)신령(神靈)과 서로 통하는 도구였다. 문자에 비해 더욱 큰 내함(內涵)과 지혜를 지녔지만 오늘날의 인류는 이미 똑똑히 읽어낼 수 없게 되었다.
《역경(易經)‧계사(系辭)》에서는 “옛날 포희씨(包犧氏 복희씨)가 천하에서 왕이 되어 위로는 하늘의 상(象)을 우러르고 아래로 땅의 법을 살폈으며 새와 짐승의 모양, 땅의 마땅함을 살펴 가까이는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취해, 팔괘(八卦)를 처음 만들어 신명(神明)의 덕에 통하고 만물의 실정에 비겼다.”라고 했다.

오늘날 감숙성 천수시 서쪽에 괘대산(卦台山)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복희가 이곳에서 팔괘를 그렸다고 한다. 복희씨는 평소 괘대산 위에 서서 위로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을 관찰하고 아래로 지리와 지형을 관찰했으며 새와 짐승의 발자국과 무늬를 연구해 자연만물의 법칙을 통찰하고 천지만물의 상(象)을 취해 팔괘를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가 한창 괘대산 위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괘대산 맞은 편 산굴에서 갑자기 한 마리 용마(龍馬)가 뛰쳐나왔다. 용마의 몸에는 특이한 무늬가 있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하도(河圖)였다고 한다. 용마는 산 아래 위수(渭水) 가운데 있는 큰 바위 위로 날아갔다. 이 큰 바위의 모양이 태극과 같았는데 용마 몸에 있던 무늬와 결합해 단번에 크게 깨달은 복희씨가 팔괘를 그려냈다.
당시 용마가 나온 산굴을 ‘용마동(龍馬洞)’이라 하고, 위수 가운데 있던 거대한 바위를 ‘분심석(分心石)’이라 한다. 이런 지명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복희씨가 만든 기타 문명
복희씨는 팔괘를 창립한 것 외에도 역학(易學)을 개창했고 또 다른 수많은 위대한 문명성과들을 남겨주었다.
《주역‧계사하전》에 따르면 복희가 그물을 발명해 인류에게 사냥과 어업 및 목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물은 어류와 조류를 잡는데 사용된다. 전설에 따르면 복희씨는 거미줄이 연결된 것에서 계발을 받아 그물을 발명했다고 한다. 그물을 발명한 후 인류는 자연계에서 풍부한 육류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복희씨는 또 다 먹지 못하고 남은 동물을 양육하는 목축(牧畜)을 가르쳐 목축업의 시조가 되었다. 복희씨는 이렇게 인류의 음식 문제를 해결했고 주방을 충실하게 했기 때문에 또 포희씨(庖犧氏)로도 불린다.
한편, 《예기(禮記)‧곡례(曲禮)》의 기록에 따르면 복희는 또 혼인 예법을 제정해 암수 한 쌍의 사슴가죽을 예물로 삼게 했다.
전설에 따르면 복희씨 이전의 인류에겐 아직 혼인제도가 없었고 군혼(群婚)상태에 처해 있었다고 한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엄마만 알았고 아버지는 누군지 몰랐다. 복희는 예단과 중매 등 일련의 혼인제도를 제정해 남자가 장가가고 여자가 시집가는 것을 규정했고, 성씨(姓氏)제도를 수립해 남녀관계가 더 이상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 또 이를 통해 인륜도덕을 규범지었고 금수(禽獸)와는 다른 진정한 인류문명이 개창되게 했다.
《역사(繹史)》에서는 “선성(先聖 복희)께서 위로 하늘의 무늬를 살피고 아래로 땅의 이치를 관찰해 건곤(乾坤)을 그려내고 인도(人道)를 정하셨다. 백성들이 비로소 깨달아 부자(父子) 사이의 친함, 임금과 신하의 의리, 부부의 도리, 장유(長幼)의 순서를 알게 되었다. 이에 백관(百官)이 세워졌고 왕도(王道)가 생겨났다.”고 했다.
복희는 또 중앙 관제를 수립했다. 사마정(司馬貞)의 《삼황본기(三皇本紀)》에는 “복희씨는 용(龍)의 상서로움이 있어 벼슬이름에 용이 들어가며 용사(龍師)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다시 말해, 복희는 관직명에 용을 넣어 불렀는데 예를 들면 거룡씨(居龍氏)는 건축을 담당하는 관직이고 토룡씨(土龍氏)는 농경지와 경계를 담당하는 관직이었으며 수룡씨(水龍氏)는 관개(灌漑)와 소통(疏通)을 담당하는 관직이었다. 우리 중화민족이 용을 토템으로 삼고 중화인을 용의 전인(傳人)이라 칭하는 것은 대체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복희는 또 달력의 일종인 갑력(甲曆)을 창조했다. 《통력(通曆)》에 따르면 “태호(太昊) 시기에 처음으로 갑력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갑력은 갑인(甲寅)을 원년(元年)으로 삼고 간지(干支)로 연월일시를 기록하던 상고시기 역법인데 아마도 우리 중화역법의 시조일 것이다.
그런데 역법(曆法)은 장기간 천문을 관측한 기초 위에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이를 제정하자면 반드시 한 세트의 완비된 천문학 지식을 갖춰야 한다. 1987년 하남 복양(濮陽) 서수파(西水坡)에서 한 기의 형의묘(形意墓)가 출토되었는데 묘 안에서 조개껍데기로 만든 사상(四象) 28수를 완전히 구비한 한 폭의 성공도(星空圖 별자리 지도)가 나왔다. 배치가 아주 합리적이라 위로는 천문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지리에 부합했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매장할 때 이미 분명 발굴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전문가들의 고증 결과 형의묘에 배치된 성공도는 지금부터 약 2만 5천 년 전 하늘의 별자리 지도로 2만여 년 전의 인류가 이미 상당히 완비된 천문학 지식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복희씨는 이외에도 금(琴 거문고)과 슬(瑟 큰 거문고)을 발명했고 《입기(立基)》, 《가변(駕辨)》 등의 악곡을 창작했다. 음악으로 백성들을 교화해 인류의 심령을 정화하고 인류의 행동을 규범 시켜 인류 도덕을 제고시켰다.
《세본(世本)》에는 “포희씨(庖犧氏)가 슬(瑟)을 만들었는데 50현(弦)이었다. 여기서 슬은 깨끗하다는 뜻이다. 사람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행동을 순수하게 만든다.”고 했다.
《세본》에서는 또 “포희씨가 발명한 슬은 50현이었다. 나중에 황제(黃帝) 시기에 이르러 소녀(素女)가 슬을 연주하는데 황제가 들어보니 소리가 너무 슬퍼서 슬픔을 자제할 수 없다고 느껴 슬을 두 개로 나눠 25현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의(吳儀)가 쓴 《금당서(琴當序)》에는 “복희의 금(琴)은 1현의 길이가 7자 2치였다.”고 했다. 오늘날 중국 소수민족 경족(京族)들은 아직도 아주 오래된 1현금을 연주하는데 전설에 따르면 원고 시기부터 전해내려온 거라고 하며 음색이 고아(古雅)하고 아름답다. 아마 복희씨가 처음 발명한 일현금에서 근원한 것일지 모른다.
전설에 따르면 복희씨는 115년을 재위했고 세상을 떠난 후 진(陳 지금의 하남 회양현)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오늘날 하남성 회양 현성(縣城) 북쪽에 복희 고묘(古墓)가 있고 역대 제왕들이 이곳에서 여러 번 제사를 지냈다.
참고문헌:
1. 《제왕세기(帝王世紀)》
2. 《열자‧황제편》
3. 《둔갑개산도》(《태평어람》에서 인용)
4. 《역통괘험(易通卦驗)》
5. 《주역‧계사하전》
6. 《포박자》
7. 《한서‧율력지》
8. 《예기‧곡례》
9. 《백호통(白虎通)》
10. 《강감이지록(綱鑒易知錄)》
11. 《자치통감외기(資治通鑒外紀)》
12. 《혼원성기(混元聖紀)》
13. 《예기‧악기(樂記)》
14. 《세본(世本)》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5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