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효유 사건 진상과 영락제의 억울한 누명
글/ 유효(劉曉)

방효유(方孝孺)는 명조(明朝) 초기의 유신으로 일찍이 대유학자 송렴(宋濂)을 스승으로 모셨다. 뛰어난 실력과 인품으로 동년배들 사이에서 큰 존중을 받았으며 심지어 자기보다 연배가 높은 일부 학자들조차 탄복하던 인물이다. 명 태조 때 방효유를 불러 만나본 후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학식이 깊은 것을 크게 칭찬하며 섬서(陝西) 한중부(漢中府) 교수에 임명했다.
나중에 태조의 아들 촉왕(蜀王) 주춘(朱椿)이 방효유가 어질고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초빙해 왕세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건문제가 즉위한 후 방효유를 경성으로 불러 중임을 맡겼고 또 여러 분야에서 그의 의견에 따랐다. 한마디로 건문제는 그에게 지우(知遇 자신의 학식이나 능력을 알아주는 것)의 은혜를 베풀어주었다.
정난(靖難)의 역(役) 기간에 방효유는 여러 차례 건문제에게 연왕(燕王) 주체의 역량을 삭감시키는데 힘써야 한다고 건의했다. 약 4년에 걸친 전투 끝에 연왕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천명(天命)을 받아 수도인 남경(南京)에 진입했다. 건문제의 옛 신하들 중 자진하거나 투항을 거부한 경성을 떠난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대신들은 연왕게 귀부했다. 하지만 방효유는 투항을 거절한 소수에 속했다.
이 당시 방효유는 이미 천하제일의 대유학자로 명성을 날렸고 학식과 품행에서 사해(四海)의 칭송을 받고 있었다. 주체가 처음 병력을 일으킬 때 도연이 “성을 함락시키는 날 방효유는 절대 투항하지 않겠지만 절대로 그를 죽여선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하에 독서인들의 씨가 끊어질 겁니다.”라고 일찍이 건의했었다. 주체 역시 그렇게 하겠노라고 응답했다.
그래서 주체가 남경에 진입한 후 처음부터 예의를 차리고 방효유를 불러다 등극 조서를 기초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방효유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상복을 입고 대전에 올라와 울면서 욕을 해 주체를 격분하게 했다. 주체는 곧 명령을 내려 귀순을 거부하던 건문제의 다른 구신들과 함께 방효유를 사형에 처하고 일족을 멸하게 했다.
《명사(明史)》에는 “정축일에 제태, 황자징, 방효유를 죽이고 그 가족을 멸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제태와 황자징은 건문제 시기 번왕 세력의 삭감을 주장했던 주범들이다. 그런데 “그 가족을 멸했다”는 것이 현대에 와서는 방효유의 제자들을 포함한 십족(十族)을 멸했다는 설로 변했다.

방효유가 한 행동에 대해 한편에서는 그가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해 가치 있게 죽은 것으로 평가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어리석은 충성으로 본다. 왜냐하면 건문제는 나약하고 무능해서 어느 것 하나 쓸 만하거나 성공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옛 주군에 대한 감사표시는 죽음만으로 충분한데 굳이 연왕을 격노하게 만들어 일가족까지 멸문의 화를 당할 필요는 없었다. 아울러 한 조정의 천자에 한 조정의 신하라 천상(天象)이 이미 변했으니 이전 조정의 신하로서 새로운 군주를 따르지 않는다면 당연히 좋은 결말이 있을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은 방효유의 십족을 정말 멸했는가? 하는 점이다. 사고전서 《명사본기(明史本紀)》에는 “정축일, 방효유를 불러 등극 조서를 기초하게 했으나 효유가 붓을 던지고 울면서 욕을 했다. 황제가 크게 노했고 제태와 황자징도 항변하며 굴복하지 않았다. 마침내 효유와 함께 저자에서 사지를 찢어죽이고 그 가족을 모두 멸했다.”라고 쓰여 있다.
《명사》 원본이든 사고전서본이든 어디에도 주체가 방효유의 십족을 멸했다는 기록은 없다. 명나라 때 초횡(焦竑)이 쓴 《옥당총어(玉堂叢語)》에는 방효유가 “죽어도 굴하지 않았다”라고만 적혀 있다. 주체가 방효유의 십족을 멸한다고 위협했다는 대화도 보이지 않는다.
《명사》에는 또 “방효유가 동생인 효우(孝友)와 함께 피살되었고 그 후 방효유의 아내 정씨(鄭氏)가 네 자녀 중 두 아들인 방중헌(方中憲), 방중유(方中愈)와 함께 목을 매달아 자살했고 두 딸 역시 도망가다 진회하(秦淮河)에서 자진했다.”고 했다. 이 역시 성조가 그 가족을 멸한 게 아니다.
《명사》에는 또 비록 방효유 가문의 사람들이 피살되었다는 내용은 나오지만 방효유의 모계(母系)나 처가 사람들이 피살되었다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명사》에 방효유의 소위 십족(十族)인 문인과 친구들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가령 “영락 연간에 효유의 글을 숨긴 자들은 죄가 사형에 이르렀다. 문인 왕도잠(王稌潛)이 《후성집(侯城集)》을 기록해서 후세에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명나라 성화(成化) 연간에 살았던 송단의(宋端儀)가 쓴 《입재한록(立齋閑錄)》, 《혁제록(革除錄)》 등에도 건문제의 충신들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만 오직 그 일족을 멸했을 뿐 십족을 멸했다는 내용은 없다. 《입재한록》에서는 또 일족을 멸했다는 뒷부분에 “재산을 몰수당한 847명”의 명단이 나오는데 대부분 방 씨 일가로 모계나 처계 쪽 인물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송단의가 의도적으로 방가의 모계와 처계 피해자 명단을 숨길 이유는 전혀 없다는 점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들이 ‘재산이 몰수’는 조사하고 몰수했다는 뜻으로 피살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건문제에 관한 여러 야사에도 방효유의 십족을 주살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 명 성조 주체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인종(仁宗) 주고치(朱高熾)가 제위를 이은 후 방효유 등 건문제 구신들에 대해 명예를 회복시키고, 방효유의 사촌형 방효복(方孝複)을 찾아내 사면해주었다. 만력 13년 3월 만력제(萬曆帝)는 또 방효유 사건에 연루되어 변방에서 수자리하던 방 씨 후손들을 석방시켜주었다. 이렇게 절강, 강서(江西), 복건, 광동, 사천 등지에 유배당한 사람이 13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통해 보자면 방효유 및 그의 일족 중 일부가 죽임을 당했지만 일족을 전부 죽이는 멸족(滅族)은 아니었고 일족의 대부분은 재산이 몰수되거나 유배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게 아니라면 명나라 인종과 만력 연간 방씨 일가에 대한 사면을 해석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십족을 멸했다는 근거없는 주장은 대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근대에 어떤 사람의 고증에 따르면 방효유의 십족을 멸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최초의 서적은 명나라 정덕(正德) 연간에 축기산(祝枝山)이 쓴 야사인데 그 출처는 어릴 때 어른들이 나누던 대화를 듣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충분한 근거가 있는 사료라 볼 수 없다.
또 청나라 초기 민간 사학자 담천(談遷)이 저술한 《국각(國榷)》에도 방효유의 십족을 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청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이후 이와 유사한 주장이 곡응태(谷應泰)의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과 조익(趙翼)의 《이십이사차기(廿二史劄記)》 등에 등장하면서 점차적으로 널리 전해지기 시작했다.
이외에 방 씨 가족의 족보인 《방하종보(方何宗譜)》에 따르면 방효유의 지위는 한림시강(翰林侍講)에 이르렀고, 부친이 피살된 후 어린 아들 성공(聖公)이 절강 태주(台州)에서 안휘 흡현(歙縣)으로 이주해 네 아들을 낳았다. 그중 큰 아들 통공(通公)이 나중에 안휘 여강(廬江)으로 이주한 후 성을 하(河)씨로 바꿨다. 하 씨는 이후 날로 번창해서 대가족이 되었고 명청 시기에 늘 관리를 배출하곤 했다.
그러므로 이상의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볼 때 영락제가 방효유의 십족을 멸했다는 설은 터무니없는 과장임에 틀림없다. 이 점에서 보자면 영락제는 확실히 지난 수백 년간 억울한 누명을 써왔던 것이다.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6/5/28/n7939243.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