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싱글벙글하는” 경지를 닦아내다

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나는 이미 23년을 수련했지만, 늘 마난(魔難) 속에서 맴돌았고 마음속으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나는 늘 거대한 압력을 머리에 이고 전진한다고 느껴왔다. 자신은 아주 견정하고 마난 속에서도 고통스럽게 감당하면서 고난 속에서 견정했다고 여겨왔다. 나는 줄곧 이렇게 하는 것만이 수련이며 아울러 수련이 아주 힘들다고 여겼다.

회사에서도 나는 얼음처럼 차갑고 괴팍한 성격 때문에 동료들이 모두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보곤 했으며, 갈수록 나와 거리가 멀어졌고 내 얼굴이 보기 싫다며 돌아가곤 했다. 아울러 나와 같은 지역에 사는 동수가 나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인상이 아주 좋지 않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나는 아주 이상하게 여겨졌다. 나는 그녀들과 거의 왕래한 적이 없고 또 내가 무슨 나쁜 일을 한 적도 없는데 그녀들에게 왜 내 인상이 나쁘단 말인가?

한참을 생각해보니 아마도 내 인상이 괴롭고 힘들어 보여 심리적으로 압력을 느꼈기 때문에 나와 왕래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고만 짐작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나는 동수가 말한 이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이는 다 작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내 성격이 남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그녀들이 나에 대해 멋대로 추측했기 때문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열한 살 난 딸(동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 표정으로 중생을 다 훼멸시켜요!”

그리고 얼마 후 “엄마가 이렇게 하는 건 사람을 구하러 온 게 아니라 사람을 훼멸하러 온 거에요!”라며 아주 직접적으로 말했는데 게다가 아주 큰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더 이상 작은 일로 여길 수 없다고 인식했다.

나는 자신이 웃을 수 있도록 노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40여 년을 이렇게 살아왔기에 아무리 해도 웃을 수 없었다. 나는 자신에게 깊이 뿌리박힌 성격을 어떻게 고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생이 구도 받게 하려면 나는 웃어야 했다. 회사에서 내가 억지로 웃는 얼굴을 지으며 동료들을 대하자 동료들은 나를 한번 보고는 고개를 돌려 가버렸다.

나는 몹시 고민이 되어 딸에게 물어보았다.

“네가 보기에 엄마가 진짜로 웃는 것 같니 아니면 거짓 웃음처럼 보이니?”

그러자 딸이 대답했다.

“거짓웃음은 안돼요, 정말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라야만 해요.”

나는 어떻게 해야만 내심에서 웃어나는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나는 왜 웃는 게 이렇게 힘이 드는 걸까? 분명한 것은 이는 단순하고 아주 간단한 성격 문제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의 내심이 어둡고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물질로 가득 차 있어 광명이 없으니 웃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반드시 이것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근본적으로 손을 쓸 수 없었다. 나는 억지로라도 스스로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는 한편 내심으로 사부님께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사부님, 저는 스스로 개변해야 합니다. 저는 사람을 구해야 하며 중생을 훼멸할 수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자신이 변한 것을 발견했다. 내 인상은 찬란한 햇살처럼 변했고 웃는 얼굴이 내심에서 우러나와 온화하고 상화하게 변해 있었다. 누구를 만나든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미소로 상대방을 비춰주었고 중생에게 아름다움을 발산했다. 나는 더 이상 억눌린 느낌이 없었고 온몸이 햇살로 충만했다. 아울러 나의 미소는 일순간에 상대방의 몸과 마음을 비춰주었고 상대방도 동시에 내게 미소를 보였다. 설령 상대방이 당시 제아무리 마음이 불편할지라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줄곧 나를 상대하지도 않았던 동료들마저 자발적으로 나를 찾아와 인사를 나눴다. 모든 것이 다 너무나도 아름답게 변했다.

이 변화는 기적과 같았다. 사부님께서는 40년이 넘는 나의 어두운 성격을 불과 며칠 만에 다시 만들어주신 것이다. 내게는 오직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람을 구하려는 일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변화는 정말 불가사의했다.

이어서 내가 일하는 부서에서 동료들은 이미 더 이상 나를 내치지 않았고 나를 감싸주었다. 나는 적시에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었다. 바로 미소 가득한 얼굴로 생생하게 파룬따파 진상을 들려준 것이다. 나는 ‘위화(偽火)’, ‘장자석(藏字石)’, ‘9자 진언으로 생명을 구한 실록’ 등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많은 동료들이 다 대법진상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법을 언급하기만 하면 그들은 극히 무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그들이 내 옆에 있으면서 즐겁고 상화하며 착실함을 느낀다. 내가 만약 늦게 가면 그들은 내게 “왜 이제야 왔어요?”라고 묻는다. 그들은 내 옆에 있기를 갈망한다.

나는 지금 신(神)의 세계에서 그들의 왕이 자신의 중생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게 되었고, 중생은 또 일종 아주 행복하고 아무런 근심과 걱정이 없는 분위기에서 살아감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한 가지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대략 2015년 쯤의 일이다. 나는 동수 갑(甲)과 함께 구류소에 납치되었다. 갑 동수는 정념이 아주 강해서 죄수복을 입거나 조회에 나가거나 수업을 듣거나 노동에 참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 여경이 늘 잔뜩 화난 표정으로 찾아오곤 했다. 그때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줄곧 어두웠던 나는 오히려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 그러면 내가 보기에 그녀는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더는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그때 나는 광명(光明)이 사악을 해체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부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내가 닦아낸 것이 아니었다. 구류소에서 나온 후 나는 이 방면에 마음을 쓴 적이 없었고 자신을 개변하지도 않았다.

이외에도 이 일을 통해 나는 또 아주 많은 것을 깨달았다.

가장 먼저 나는 사부님의 설법이 떠올랐다.

“많은 관중이 배우들이 이처럼 선한 것을 보았고, 웃음도 일반배우처럼 아양을 떠는 웃음이 아니라 완전히 수련인의 순선(純善)한 내심세계의 발로이다.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파룬궁이 어떤 사람인지를 바로 알지 않겠는가?”

(《각 지역 설법 11》〈대법제자는 반드시 법공부를 해야 한다〉 )

전에 나의 미소가 그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완전히 수련인의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순선(純善)한 표현이다. 이 순선하고 웃는 얼굴을 중생에게 보여주면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그들은 파룬궁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알게 된다.

다음으로 나는 또 사부님의 설법이 생각났다.

“수련이라, 무엇을 누락이 없다[無漏]고 하는가? 작은 일은 없다.”

(《2015년 미국서부법회설법》)

나는 줄곧 내 성격이 한 가지 작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나는 수련 중에는 작은 일이란 없을 뿐만 아니라 일체는 다 중생이 구도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또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나한(羅漢) 그 층차에 도달하면 어떤 일과 마주쳐도 다 마음에 두지 않고, 속인 중의 모든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으며, 언제나 싱글벙글하면서, 아무리 큰 손해를 보아도 싱글벙글하며 개의치 않는다.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나한의 초급과위에 도달한 것이다.”

나는 줄곧 이 단락의 의미는 나한 층차에 도달하면 득실(得失)에 따라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싱글벙글 할 수 있다고만 여겨왔다. 나는 종래로 싱글벙글이 일종의 높은 경계(境界)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고층 생명은 자연히 이런 높은 경계로 싱글벙글하는 표현이 있을 것이다. 반대로 생명이 낮아질수록 내심이 더욱 고통스러운데 속인은 매일매일 고뇌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또 수련인의 승화는 위타(爲他)에서 오는 것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만약 자신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이 모두 위타의 각도에 있다면 그럼 마치 로켓처럼 빨리 제고되어 위로 올라가는데 가로막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내가 바로 중생이 구도 받을 수 있도록 하려 했기 때문에 40여 년간 얼음처럼 차가웠던 내 성격이 불과 며칠 만에 녹아버렸던 것이다.

나는 사존(師尊)의 위대함과 법의 박대정심(博大精深)함에 감사드린다. 사부님께서는 늘 제자의 신변에 계신다는 느낌을 체험했다. 또 우주 중생을 위한 사부님의 무량한 자비를 느낄 수 있었다. 우주의 한 생명으로서 자신의 내심을 표현할 수 있다면 오직 비할 바 없이 경건한 경사경법(敬師敬法)과 비할 바 없는 감사뿐이다.

개인 수련중의 작은 깨달음이니 부족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8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