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황제 (3)
(1) 영토를 나누다
황제는 천하를 통일한 후 새로 영토를 나누기 시작했다. 백리 크기의 나라가 모두 만여 개 국이 있었는데 좌우 대감(大監)을 설치해 만국(萬國)을 관리해 만국이 안정되고 화목하도록 했다.
황제는 사람을 시켜 토지를 측량케 하고 정전제(井田制)를 제정했다. 즉, 여덟 가구에 대해 우물 정(井)자로 나누고 중간은 공전(公田)으로 하고 주변 8개는 사전(私田)으로 삼았다. 3정(井)을 1린(隣)으로 삼았고 3인(隣)을 1붕(朋)이 삼았으며 3붕을 1리(里)로 했다. 또 5리를 1읍(邑), 10읍을 1도(都), 10도를 1사(師), 10사를 1주(州)로 삼았으며 전국을 모두 구주(九州)로 나눴다.
(2) 도(道)로 나라를 다스려
황제는 초기에 덕(德)으로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교화시켰다. 천하가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잘 다스려지자 백성들이 행복해졌다. 하지만 황제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고 다스림에 뭔가 부족함이 있으니 마땅히 천하를 더 잘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황제가 꿈에서 계발을 받았다. 깨어난 후 그는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 몸을 기르는 치국양신(治國養身)의 도를 깨달았다. 그는 또 도처로 다니며 스승을 찾아 도(道)를 물었고 각고의 수행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경계를 제고해, 최종적으로 천하를 무위(無爲)로 다스리는 최고의 통치 경지를 실현했다.

무위로 다스린다 함(無爲而治)은 장기간의 도덕 교화를 통해 천하 백성들과 소통하고 이끌어 대도(大道)가 잘 통하게 하는 것으로, 천하 백성들이 모두 덕을 중시하고 선(善)을 닦으며 대도(大道)로 돌아가 자연과 합하면, 일체가 다 자동적으로 도(道)에 따라 움직이며 하고 마음에서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으니, 지나친 간섭이나 관리가 필요가 없어 마치 군왕(君王)과 조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열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황제(黃帝)가 낮에 잠을 자다가 꿈에 상고시대 신국(神國)인 화서국(華胥國)에 놀러갔다. 그 나라에는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도 모든 것이 자연스레 합일했고 백성들은 사욕(私欲)이 없었으며 사랑하거나 미워함도 없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등 일체 고통이 없었으며 삶에 연연하거나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었고 초자연적인 신력(神力)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수화(水火)와 자연만물 등 그 무엇도 그들을 다치게 할 수 없었다. 하나의 기묘한 극락(極樂)국토였다. 황제는 꿈에서 깨어난 후 몸을 기르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깨달았고 도로 나라를 다스렸다. 이렇게 28년이 지나자 천하게 크게 다스려졌고 화서국과 큰 차이가 없었으며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이상적인 나라가 되었다.”
《신기비보(神奇秘譜)》에는 황제가 꿈에 화서국에 놀러가 깨달음을 얻었으며 28년이 지나자 마침내 천하를 잘 다스려 반신(半神)국가를 만들었다. 이에 상고시기 저명한 거문고 곡 《화서인(華胥引)》을 창작해 그 뜻을 밝혔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화서인》의 유래다.
(3) 하늘이 상서로움을 내리다
황제가 재위하던 후기에 천하가 잘 다스려지자 천인(天人)이 감응해 상서로움이 끊이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경성(景星)이 나타났고 조정에는 신초(神草)가 자라났다. 이 풀은 신기하게도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그를 가리켰기 때문에 굴일(屈軼)이라 불렀다. 당시 봉황(鳳凰)이 세상에 내려와 궁중에 둥지를 틀었으며, 용(龍)이 황제의 수레를 끌었고, 기린이 원유(園囿 궁궐의 동산)에서 노닐었다.
《회남자》에는 황제가 천하를 크게 다스린 후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줍는 사람이 없었고 밤이면 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천하에 도둑이 사라졌고 시장에서는 속임수가 사라져 천하에 다툼이 없었으며, 시골 촌부조차도 서로 재산을 양보할 줄 알았고 심지어 개나 돼지마저도 배불리 먹어 서로 다툴 일이 없었다고 한다.

《송서(宋書)·부서지(符瑞志)》에는 황제가 천자에 오른 후 50년이 되던 어느 가을 연속 3일간 큰 안개가 껴서 한낮에도 물건을 구별할 수 없었다고 한다. 큰 안개가 걷힌 후 황제가 대신들과 낙수(洛水)에 나아가니 낙수에서 거대한 물고기를 발견했다. 황제는 곧 5가지 희생(犧牲)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칠일 밤낮으로 큰 비가 내려 큰 물고기가 대해(大海)로 놀러갔고 이어서 하수(河水)와 낙수에서 각각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나타나 붉은 글자로 된 전서(篆書)를 황제에게 주었다.
(4) 황력(黃歷) 창조
황제는 하도에 근거해 영대(靈台)를 설치해 천상(天象)을 관찰했따. 또 하늘을 점치는 관직인 점천관(占天官)을 설치해 귀유구(鬼臾區), 두포(斗苞), 상의(尚儀), 차구(車區) 등 몇몇 대신들을 점천관에 임명해 각기 별을 점치고, 해를 점치고 달을 점치고 바람을 점치게 했다.
황제는 또 대신(大臣) 예수(隸首)에게 명령해 수(數)를 만들게 했다. 전설에 따르면 예수는 수에 정통해 중국수학을 개창했으며 가장 원시적인 주판과 산술(算術)은 모두 예수가 발명한 것이라고 한다.
황제는 또 대신 용성(容成)에게 명령해 천상을 관찰할 수 있는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게 했고 다섯 점천관의 점측(占測)을 결합하고 또 예수가 발명한 수(數) 등을 결합해 당시의 역법인 《조력(調曆)》을 만들었다. 이 역법은 이후 여러 대에 걸친 보완과 수정을 거쳐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하는 전통달력인 《황력(黃曆)》이 되었다.
(5) 중화 율려(律呂)
중국 전통음악은 서양음악과는 전혀 다른 체계에 속한다. 중국 전통음악과 상응하는 음악의 이치는 율려(律呂), 오음(五音) 등으로 나뉜다. 율려는 또 12율(律)이라고도 하는데 황종(黃鍾:C)·대려(大呂:C#)·태주(太簇:D)·협종(夾鍾:D#)·고선(姑洗:E)·중려(仲呂:F)·유빈(蕤賓:F#)·임종(林鍾:G)·이칙(夷則:G#)·남려(南呂:A)·무역(無射:A#)·응종(應鍾:B)의 순서다.
이것을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 오음과 결합하거나 또는 변치(變徵)와 변궁(變宮)을 합한 칠성(七聲)과 결합해 선궁전조(旋宮轉調) 등을 형성해 완벽한 동방의 음악체계를 구성한다.
《제왕세기》에는 황제가 영륜(泠綸 또는 伶倫이라고도 함)에게 12율을 확립하도록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륜은 곤륜산 북쪽기슭에서 곧고 두께가 일정한 대나무를 취한 후 먼저 3자 9푼 길이의 관(管)을 만들고 이것을 불어서 나는 소리로 황종률(C에 해당)을 만든다. 그 후 소리를 가장 조화롭게 배합하는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에 근거해 비례대로 12개의 서로 다른 길이의 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봉황의 울음소리에 근거해 이를 바로 잡았다.
전설에 따르면 수컷 봉황은 6가지 성조(聲調)를 낼 수 있고 암컷 봉황 역시 이와 다른 6가지 성조를 낼 수 있었으니 이 12가지 성조가 그자 제작한 12개의 관을 불어서 나오는 소리와 서로 같았다고 한다. 영륜은 이에 12율의 홀수에 해당하는 황종·태주·고선·유빈·이칙·무역을 ‘율(律)’이라 하고 짝수에 해당하는 대려·협종·중려·임종·남려·응종을 ‘여(呂)’라 했으며 이 둘을 합쳐서 ‘율려(律呂)’라 했다.
이번 차례 5천년 문명이 진행된 과정에서 고대 중국의 음악체계는, 적어도 12율의 발명과 사용에 있어서 원고시기에 이미 성숙하고 완비되었으며 완벽에 가까웠다. 이에 비하면 서양음악에서 12평균율이 확립되고 체계적으로 이용된 것은 18세기 초 바하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 등장한 이후의 일이다.
중화 전통문화에서는 예악(禮樂)의 기능을 대단히 중시했으며, 줄곧 제왕이 천하 백성을 다스리고 교화하는 중요한 방식으로 간주되어왔다. 《제계보(帝系譜)》에 따르면 아득히 먼 삼황(三皇)시기 여와씨(女媧氏)가 천하에서 왕 노릇을 할 때 일찍이 아릉씨(娥陵氏)에게 명령해 도량관(都良管)이란 악기를 제작하게 했으며 이를 통해 천하의 성률(聲律)을 통일했다고 한다.
중화 음악체계가 이미 아득히 먼 상고시기에 완벽하게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율려의 주파수(頻率)가 고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에 따라 발전해나가면서 서로 다른 변화가 있었을 따름이다. 즉, 서로 다른 시기마다 율려의 주파수에 대한 통일과 규정이 있었다. 아마도 중화음악체계는 요원한 사전문명(史前文明)시기부터 유전되어 내려왔을 것이다. 그러다 황제(黃帝)시기에 이르러 황제가 영륜에게 당시 천하 율려의 주파수를 새로 통일하고 규정하도록 했을 것이다.
(6) 악무(樂舞) 창작
이외에도 황제는 또 영원(榮猿)에게 명령해 12종(鐘)을 주조하게 해서 천하 율려를 조율하는 표준으로 삼도록 했다. 황제는 또 《운문대권(雲門大卷)》이란 대형 악무(樂舞)를 창작했고 이를 사용해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운문대권》은 요 임금의 《대함(大咸)》, 순 임금의 《대소(大韶)》, 우임금의 《대하(大夏)》, 상나라 탕 임금의《대호(大濩)》, 주나라 무왕의 《대무(大武)》와 함께 6대(代)의 음악으로 불리는데 《운문대권》이 그 시조가 된다.
육대의 악무는 모두 제사에 사용되었다. 《운문대권》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쓰고, 《대함》은 땅에 제사를 지냈으며, 《대소》는 사망(四望)에서 제사를 지냈고, 《대하》는 산천에, 《대호》는 선친에게, 《대무》는 조상에게 제를 지내는데 사용되었다.

황제는 또 직접 거문고 연주곡 《화서인(華胥引)》을 지었으며 또 상고의 신곡(神曲) 《청각(清角)》을 창작했다. 전설에 따르면 《청각》은 천지(天地)와 소통할 수 있고 귀신을 호령할 수 있었으며 이 곡을 연주할 때면 “학들이 날아오르고 봉황이 해를 가렸다”고 한다.
《청각》의 창작배경에 대해 《한비자》〈십과(十過)〉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옛날 황제가 귀신을 태산 위에 집합시켰을 때, 상아로 장식한 수레를 탔는데 여섯 마리 교룡이 수레를 끌었고 나무의 신 필방(畢方)이 수레 옆을 지켰으며, 치우(蚩尤)는 앞에서 길을 열고, 풍백(風伯)은 땅을 쓸었으며, 우사(雨師)는 길에 물을 뿌리게 했다. 범과 이리떼가 앞장서서 길을 열었고 귀신들이 뒤를 따랐으며 등사(騰蛇)는 땅위에 엎드려 기어가고 봉황은 하늘에서 춤을 추었다. 이렇게 귀신들을 크게 모은 뒤에 《청각》을 만들었다.”
즉, 황제는 이 당시 귀신대회 소집을 기념하기 위해 《청각》을 창작했던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청각》은 귀신을 불러 모으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오직 덕행(德行)이 아주 높은 사람만이 들을 수 있었고 덕이 얕은 사람이 들으면 큰 재앙을 초래했다고 한다. 《금사보(琴史補)》 제1권에는 “《청각》의 소리는 가장 슬퍼서 덕의(德義 도덕과 신의)가 얕은 사람은 들을 수 없었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평공(平公)이 악사인 사광(師曠)에게 《청각》을 연주하도록 명령하자 큰 바람이 불어와 기와가 날라 가고 나라에 큰 가뭄이 들어 3년간 토지가 황폐해졌다고 한다. 그러니 음악이란 함부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참고문헌:
1. 《신기비보(神奇秘譜)》
2. 《송서(宋書)‧부서지(符瑞志)》
3. 《회남자》
4. 《여씨춘추》
5. 《주례주소(周禮注疏)》
6. 《주례‧대사악(大司樂)》
7. 《한비자》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56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