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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심법: 혼계중토(魂系中土) 시리즈 도성의구(濤聲依舊) 상 

글/ 석방행

【정견망】

서문을 대신해서 : 혼계중토(魂系中土) 천애명월(天涯明月) 

당나라의 장구령(張九齡)은 《망월회원(望月懷遠)》에서 이렇게 읊었다.

“바다에 밝은 달 뜨니 천하가 이때를 함께하누나(海上升明月,天涯共此時)”

바로 중추절을 맞이해 나는 가족들을 대표해 사부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며 천하의 모든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드린다.

중추절(仲秋節 추석)은 가족이 단란하게 모이는 명절이다. 이는 신(神)이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신명(神明)을 받들고 수확을 경축하라고 창립해준 날이다. 중국 고대에 사람들은 밝은 달을 보고 잔을 들어 건배할 때 하늘을 존중하고 운명을 아는 정신이 자연히 드러났다.

지금은 사람들의 공명심이 갈수록 강해져 중추절처럼 이렇게 아주 깊은 내함을 가진 명절이 그저 친척들이 모이는 외에 이 기회를 통해 서로 연락하고 발전을 도모하거나 편리함을 제공하는 구실로 되었다. 이때 마땅히 어떻게 신명(神明)의 조화와 베풂에 감사드려야 하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내가 이 원고를 쓸 때는 진작 중추절이 지나갔음에도 여전히 이 단락을 본문의 머리에 두었다. 그 목적은 안부를 전하면서 신전문화에서 명절의 의미를 말하는 외에 또 사실 보름달을 빌려 설명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바로 인간 세상에 우리는 비록 세계의 서로 다른 구석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만은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내함을 더 심화해 신으로서 말하면 어느 층차에 있던 지금 우리 모두는 우주대법 앞에서 위치를 바로잡아야만 비로소 항구적이며 영원히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각도에서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 역시 함께 하는 것으로 우주대법 중에서 함께 한다. 이 시각 “천하가 이때를 함께 하누나” 라는 구절에서 ‘집’에 대한 귀속감은 우리가 인간세상에서 수행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신(神)과 신(神) 사이의 ‘유대’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이 문제를 떠올렸을 때 동시에 한 동수의 제안을 생각했다. 즉, 나더러 해외에 있는 서로 만난 적이 없는 그런 친구들이 과거에 법을 찾은 경험에 관심을 두어달라는 것이다. 왜냐면 그들의 몸은 비록 타향에 있고 많은 사람들이 친척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들이 몇 년, 십여 년 혹은 더욱 긴 시간을 하루처럼 소중한 중국인들을 위해 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그들이 법을 찾으러 다닌 일을 관해 써보려고 생각했고 그래서 혼계중토(魂系中土 역주: 몸은 비록 외국에 있어도 혼만은 중토와 연계되어 있다는 의미)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다.

본문에서 쓰려는 인물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내가 누구를 쓰던 모두 사람들이 중에서 생명의 고귀함을 알고, 진상을 알고 구도될 기회와 인연의 고귀함을 알았으면 한다. 본문 내용이 길기 때문에 독자들이 편의를 위해 다음과 같이 몇 부분으로 나눈다.

(1) 도성의구(濤聲依舊): 신이 원래 있던 세계의 신성, 장엄, 화려함을 써서 암암리에 생명의 미래가 비할 바 없이 아름답고 신성한 것을 표현한다.

(2) 방비진연(芳菲盡然): 천국 세계에 각종 변이가 출현한 후의 어쩔 수 없음.

(3) 목양부요(沐陽扶搖): 생명이 절망했을 때 창세주를 만나 새생명을 얻은 기쁨을 썼다.

(4) 정난의휘(亭蘭毅輝): 생명이 내려오는 과정 중에 서약을 확고히 지키는 것.

(5) 이봉서진(怡峰瑞真): 삼계 내의 이번 차례 인류 이전에 법을 찾으러 다닌 경험

(6) 흔우호량(欣宇浩亮): 인간 세상에서 이들 생명이 인류문명 고대사 중에 전생했을 때 연기한 법을 찾은 경력.

(7) 동욱정예(東旭庭譽): 인간 세상에서 이들 생명이 인류문명 근대사 중에 전생했을 때 연기한 법을 찾은 경력.

(8) 우평심진(宇平心珍 결론): 이 언론인들이 진상을 널리 전하는 것이 자신과 다른 생명에 대한 의의를 간단히 서술.

내가 주인공의 이름을 취할 때 모두 다 드러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철저하게 생명의 진상을 밝힐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렇게 큰 면적으로 알리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인명을 조합하여 하나의 시리즈의 제목을 삼는 것은 내가 오랫동안 써온 생애 중 지금껏 시험해 본적이 없는 것으로 이번에 새로운 시도의 “특례”로 삼는다.

마지막으로 설명하고 싶은 것은 이 시리즈에서 많은 다른 공간과 역사 속의 일부 진상이 관련되지만 본인 층차에 한계가 있어 문제와 사물을 보는데 국한과 치우침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세세한 내용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내가 표현하려는 뜻이 무엇인지 알면 된다.

이상으로 서문을 대신한다.

*** *** ***

왜 이런 제목을 생각했는가, 두 가지 의미 있는 인연부터 말해보고자 한다.

첫번째 인연: 우리 외삼촌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어디를 가든 노래를 한다. 나의 기억에 있는 그가 부른 유일한 가곡은 바로 <도성의구(濤聲依舊 파도소리 여전한데)>인데 당시 이 노래가 중국 전역에서 크게 유행했다.

이 노래가 유행한 원인을 지금에 와서 회상해보면 선율이 좋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회귀를 갈망하게 하는 심리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비록 원래 노래는 정을 표현한 것이지만 자세히 가사를 음미해보면, 만약 가사 중에서 “당신”을 원래의 ‘순진한 자기’로 보면 천년의 풍상을 겪은 후 현재의 자기가 종전의 순진한 자신의 마음과 맥을 함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노래가 1993년 가수의 단독앨범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곡은 매우 우울한 고풍이 있고 진정 풍상을 다 겪어도 바뀌지 않는 요소 때문에 단번에 중국 전역에서 불같이 일어났다.

권위 있는 평론에 따르면 이 노래의 성공은 중국 음반산업이 성공적으로 출범해 상대적으로 성숙기로 향하고 있음을 선포한 것이다. 이때는 마침 파룬따파(法輪大法)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이 출산해 법을 전하던 시기이다. 대법은 1992년 반년 넘게 기반을 다진 후 1993년 신속하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이는 또 나중에 파룬따파가 전 세계에 널리 전해지는데 매우 유력한 뒷받침이 되었다.

두 번째 인연은 본래 나는 자신이 사는 곳에서 능력이 되는대로 아무 일이나 찾아서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뿐 상관 아주머니가 있는 이곳으로 올 수 있을 거라는 사치스런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직장을 구한지 약 한달 정도 시간이 되었을 때 그녀가 나더러 자신이 있는 곳에서 계속 일을 하라고 했다. 나는 기왕 상관 아주머니가 나를 필요로 한다기에 즉시 사표를 제출하고 그날 밤 주동적으로 한 친구에게 연락하여 함께 해변으로 가서 잠시 앉았다.

당시 이미 저녁 7시가 넘었는데 해변에는 아직 몇 명 젊은이가 있었고 모두들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바다 멀리는 온통 암흑이었다. 만조 때가 되어 근처에 출렁이는 파도는 점점 가까워졌고 어떤 것은 1미터도 넘어 보기에도 좀 무서웠다.

쉬지 않고 부딪치는 파도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지구상에서 당신들의 존재가 있기에 다시 말해 당신들의 넘실거리는 물결이 있기 때문에, 이곳이 어느 한 시기 사람의 거주지든 아니면 공룡과 날짐승이건 당신들이 내내 넘치며 바뀐 적이 없다. 당신들은 줄곧 신의 배치에 따라 예전처럼 오래 전해질 것이다. 물론 창해가 상전이 되어 이 파도소리가 비로소 자연히 쉴 날이 오른 것은 제외한다.’

나중에 그 친구가 말했다.

“사해 용왕이 다 왔나요? 아니면 파도가 이렇게 클 수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사해 용왕이 여기 모이는 날이 아닙니다. 구체적 원인은 내가 모든 생명을 향해 정중하게 약속한 적이 있는데 누구에게도 사사로이 다른 공간과 역사 윤회에 관련되는 일을 말하지 않으며 나는 오직 글을 쓰는 데만 이용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장차 단지 내가 글을 써서 표현하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고 다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그때 파도가 그렇게 높았던 것은 용왕이 다른 신들과 토론할 일이 있었기 때문인데 토론이 고조에 달했을 때의 인간세상에서 표현되어 나온 것이다. 당시 무슨 토론을 했는가? 인간 세상에서의 각종 재난 중에 사람을 남길 것인지 말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와 관계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마음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입으로 신을 믿는다거나 혹은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막상 재난에 닥쳤을 때 그가 누구를 생각하는가 하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비록 자신은 신을 믿는다고 선전하지만 그러나 그가 오랫동안 한 일은 모두 신을 향해 얻어내려는 것이었고 세간의 각종 명, 리, 정에 대한 집착이 몹시 심하다. 그 순간에 이른바 신을 믿는다고 한 말은 신령의 보우(保佑)를 구하는 것이지 철저히 집착과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며 신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사실 신(神)이 보기에 거짓 수련이며 그 말로는 일반인들보다 더 비참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명백하게 수행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사람은 입으로는 무신론(無神論)을 말하면서 마음속에는 매우 선량하여 일을 만나면 머리를 굴려 생각해본다. 그러면 그가 재난을 만났을 때 외계 요소의 영향으로 인해(예를 들어 파룬궁 수련자가 그에게 선의로 진상을 알려주었다든지) 혹은 그 진실한 본성이 나와서 그가 파룬궁의 진상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그는 신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이를 통해 남겨질 것이다.

부동한 해역(海域)의 신마다 관할하는 범위가 다른데 이 해역이 망라하는 지역은 매우 크고 사람마음 역시 매우 복잡하다. 그래서 용왕 내지 각종 신들은 토론하는 과정에 많은 요소를 다 고려해야 했다. 물론 이런 상세한 사정은 사람에게 일일이 나타내주지 않는다.

이렇게 많이 말하는 것은 신은 자비와 위엄이 동시에 존재함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자신이 위대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두 신의 장악 중에 있다. 단 이 과정에서 선악은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신이 미래에 존재하느냐 소멸하느냐에 관계된다.

그날 상관 아주머니가 내게 해외 친구들의 고생과 어려움을 말했을 때 나 역시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신이 어떤 장면을 나에게 나타내주는지 보겠다고 했다. 나중에 봉황(鳳凰)여신이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그 북경에서 온 언론인이 일부 층차에서 겪었던 경험을 보여주겠다.”

이 원고를 쓰는 과정 중에 다른 많은 신들이 봉황여신이 내게 나타내준 것을 보았고 그들도 내게 와서 매체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이 법을 찾으러 다닌 경험을 나타내주었다. 그리고 가장 순정하고 공경한 문자로 일체를 서술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신들이 나타내준 것을 종합하면 나는 이런 언론인들 사이에 천상과 역사 속 생명의 요소가 많이 겹쳐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아예 직접 체계적으로 내가 아는 몇몇 언론인들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 동시에 천상과 지구 및 인류 역사 중의 일부 진상을 펼쳐내기로 했다.

아래는 신명(神明)들이 나에게 그 언론인들이 천상에서 법을 찾으러 다닌 일과 유관한 장면을 나타내 준 것이다.

그것은 매우 높은 한 경계에서 있었던 일이다. 보기에는 고정되어 있고 우뚝 솟은 장방형의 거목이 있는데 어느 절정의 고산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이 산은 하나의 투명한 돌로 만들어져 있으며 각종 형상을 형성할 수 있는데 산 위에는 수목과 각종 화초 내지 동물이 매우 많았다. 재미있는 것은 산 자체도 이런 동물, 식물과 함께 놀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류가 인지하는 것 중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그루 부드러운 작은 풀이 오히려 거대한 높은 산을 받칠 수 있다. 다시 말해 산은 아래로 뾰족하게 되거나 혹은 누워있고 작은 풀의 뿌리가 산의 바위에 박혀있는 것이다. 산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는 젤리처럼 임의의 형태로 변화할 수 있으며 동식물은 산을 뚫고 지나갈 수 있으며 산 위에는 사자, 사슴, 영양, 봉황 등등이 있다.

어떨 때는 이런 동물들이 각종 신통(神通)을 드러내는데 봉황이 사자를 이끌고(봉황이 앞서고 사자는 뒤에 기다리거나 혹은 봉황이 두 날개를 펼쳐 사자를 받드는 식이다) 사자가 영양을 등에 업고, 영양 위에는 구기자 모양의 작고 붉은 열매 식물이 앉아 있는데 이런 붉은 열매들이 서로 노래하며 말을 한다. 보면 아주 재미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문자를 이용해 매우 간단히 일부만 묘사한 것이다. 진실한 것은 내가 묘사한 것보다 억만 배나 더 풍부하고 재미있다.

이 고산에 매우 큰 거목(巨木)이 있는데 그것은 아래의 대해(大海)에 비하면 콩알만 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바다는 얼마나 큰가? 인류가 탐색할 수 있는 우주의 최대한도 범위를 벗어나 얼마나 더 큰지 모른다.

매우 높은 경지 중에서 사실 천지인(天地人) 삼자는 일체이다. 인간세상에서는 이렇게 뚜렷하게 구분하여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과는 달리 고층 경계에서는 얼마나 높든지 사실 인류 이 공간을 초월하면 삼자 간의 관계는 그 경계 중에서 경계가 그리 분명하지 않게 변한다.

약간 높으면 삼자 사이에 일종 서로 용납하는 상태이며 약간 더 높으면 더욱 복잡한 상태가 된다. 바로 하늘 속에 땅과 생명이 있고, 땅 속에 하늘과 생명이 있으며, 생명 속에 하늘과 땅이 있다. 이런 것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경계 중에서 각종 상태의 상호 표현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높은 산이 이 거대한 대해(大海) 위에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그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바다 속 물질과 산 위의 동식물 사이에 일종의 순환상태라서 산은 이따금씩 떠다닐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묘사이며 그곳에서 산은 바다 위에서 이동하는 것이 물의 부력작용뿐 아니라 많은 경우 생명과 물체가 그렇게 존재하는 일종방식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대해에 관해 우리가 지구에서 아는 것은 해양 중에 대륙붕, 대륙언덕, 대양 바닥, 해안산맥, 해저산맥, 해구, 바다 분지 따위의 명칭이 있다. 해류에 대해 말하면 각종 한류와 난류가 있다.

하지만 여기 바다에는 많은 이런 류의 지형이 있을 뿐 아니라 늘 표현형식을 서로 맞바꾼다. 해저산맥과 해구 사이에 호환할 수 있다. 인간세상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높은 곳으로 향하고 물을 낮은 곳으로 흐른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이런 이치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곳의 물은 임의의 각도로 흐를 수 있고 그저 필요에 따른다. 바다가 아무리 커도 만일 그것을 대야로 비유한다면 그곳의 해양이 뒤집어져도 물을 잃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런 존재이며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우리가 아는 사물과는 완전히 다르다. 천상의 일체는 모두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 하나의 지리환경마다 모두 거대한 한 신이 관장하고 있다.

이 높은 산은 늘 바다 속을 놀러 다니는데 돌아다니는 중에 해저산맥은 산이 머물게 하는 닻이 된다. 물론 어떨 때는 해구에 머물기도 하는데 그 해구는 바로 산의 착륙점이 된다.

우리는 바다에 각종 어류, 각종 동물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사실 그 경계의 바다 속에는 어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선도 많이 있다. 이 신선들은 각자 그 지위에 따라 직책을 다하고 있다. 바다 속에는 각양각색의 신전(神殿)이 있는데 모두 우리 인간세상에서 볼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여기에 어느 작은 해구(海溝)를 관리하는 해신이 한 분 있었는데 층차는 그리 높지 않았다. 그가 거주하는 지방의 외형은 송곳을 거꾸로 세운 모양의 집인데 끝은 움직이지 않고 집은 파도를 따라 흔들린다. 겉으로 보면 비교적 평범하나 그 속에는 복잡하고 미묘한 사유가 많다. 그는 법기와 의복 및 그가 관할하는 지역 범주 및 매우 큰 해역 지도를 각 한곳에 두고 있다.

나는 파룬따파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대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동일한 시간과 동일한 지점에 다른 공간이 존재한다.”(《전법륜》)

그는 같은 종류의 물건을 한곳에 놓아둔다. 하지만 이 한 곳에 많은 공간이 있고 그 자신은 어느 정도의 법력(法力)이 있어서 그가 어느 것을 사용할 때 생각을 움직이기만 하면 그 물건은 자연적으로 그의 수중에 나타난다.

그의 집에는 탁자가 하나 있는데 위에 인근 여러 신선들의 표기가 있다. 누가 오면 마음대로 앉는 것이 아니고 어느 곳에 앉는지 모두 정해져 있다. 물론 고정된 것이 아니고 일정한 시기가 되면 순환한다.

(계속)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706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