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자녀의 인연이 끝나지 않아 본가에 다시 태어난 예들

글/ 유효(劉曉)

【정견망】

사람은 일생 중 각종각양의 사람들을 만난다. 어떤 이는 친근하고 어떤 이는 소원(疎遠)하며, 어떤 이는 그저 인사만 하는 사이인데 이들은 모두 전생의 연분 때문이다. 이런 연분에는 부부의 연 또는 부모의 연, 자녀의 연, 가족의 연, 친구의 연 등등이 있다. 자녀 연을 예로 들면, 어떤 자녀는 일생을 동반하지만 어떤 자녀는 그저 몇 년만 함께 하고 일부는 한 생(生)에 연분을 마치지 못해 다시 한 번 태에 들기도 한다.

1. 청조 대신 장영이 한 집에 두 번 태어나다

청나라 대신 장영(張英 1638-1708)의 자는 ‘돈복(敦複)’ 또는 ‘몽돈(夢敦)’이라고 하며 안휘 동성(桐城) 사람이다. 청조의 명재상 장정옥(張廷玉)의 부친이다.

장영은 유명한 ‘육척항(六尺巷)’ 전설의 주인공이다.

이 일화는 청나라 강희(康熙) 연간 장영의 고향 가족이 이웃인 오씨(吳氏) 집안 사이에 집을 짓는 과정에 발생한 논쟁에서 시작한다. 두 집은 터는 조상의 기업을 일으킨 곳이었고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경계가 분명치 않았고 둘 다 세력이 있는 집안이라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쌍방이 관청에 소송을 냈는데 양쪽 집안이 모두 고위관직과 연계된 까닭에 현관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자 장씨 집안에서 경성에 편지를 보내 일가인 장영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장영은 편지를 받은 후 다음과 같은 한 수의 시를 썼다.

먼 고향에서 보낸 편지가 겨우 담벼락 때문이니
석자를 양보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만리장성은 아직 남아있지만
당시의 진시황은 보이지 않는다네.

千里修書只爲牆
讓他三尺又何妨
萬里長城今猶在
不見當年秦始皇

장 씨 집안 사람들은 이 시를 보고 깨달아 자발적으로 석자를 양보했다. 이것을 본 오씨 집안 역시 감동해서 석자를 양보해 결과적으로 두 저택 사이에 폭이 6자인 길이 생긴 것이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장영의 모친이 임신했을 때 꿈에 왕돈(王敦)을 보았다고 한다. 왕돈은 동진(東晉) 시기 유명한 재상이다. 때문에 아들이 출생한 후 모친은 아들을 돈가(敦哥 돈 오라버니란 의미)라고 불렀으나 돈가는 오래지 않아 요절했다.

또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 모친이 또 꿈에 왕돈을 보았는데 그가 말했다.

“내가 결국 다시 부인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영을 낳았다. 그의 자가 돈복(敦複 역주: 왕돈이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 또는 몽돈(夢敦 역주: 꿈에 왕돈이 나타났다는 의미)인데 의미는 왕돈이 꿈에 다시 왔다는 것이다.

2. 세 살 때 요절한 아들이 다시 귀가하다

중화민국 시기 모 은행에 근무했던 웅술도(熊述陶)의 아들 웅진생(熊津生)은 어렸을 때 아주 총명했으나 세 살 때 요절했다. 부모는 몹시 상심하며 애통해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이를 알고 슬퍼했다. 곽측운(郭則沄)도 그중 하나였다.

곽측운은 <웅술도가 아들 진생을 잃고 말을 타고 붓을 휘두르는 그림의 제목>이란 글을 지었다.

1년이 지나 진생의 모친이 꿈에 아들이 집에 돌아온 것을 보았다. 얼마 후 웅술도의 첩이 아들을 낳았는데 생김새가 진생과 매우 닮았다. 가족들은 진생이 다시 돌아온 것임을 알았다.

3. 죽은 아이가 시로 전생을 알려주다

중화민국 시기 문인(文人) 왕언초(王彥超)에게 일찍이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매우 똑똑했다. 하지만 6살 때 홍역을 앓다가 양의사의 오진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가 1929년 3월 20일이었다. 왕언초는 몹시 애통했다.

그날 밤 왕언초는 꿈에 아들이 두 구절의 당시(唐詩)를 외우는 것을 들었다.

“강족의 피리가 어찌 버드나무를 원망하랴, 꽃 지는 시절이면 다시 그대를 만날 텐데.”

(羌笛何須怨楊柳,落花時節又逢君)

[역주: “강족의 피리가 어찌 버드나무를 원망하랴”에서 버드나무를 뜻하는 양류(楊柳)는 양(洋 楊과 발음이 같다)의사의 오치를 의미한다. ]

아들이 이런 시를 배운 적이 없었고 또 이 두 구절의 당시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깨어난 후 왕언초는 이렇게 추측했다. 앞 구절은 아마 비록 서양의사의 오진이긴 하지만 원망하지 말라는 탄식이며 뒤의 구절은 아들이 다시 온다는 예시라고 생각했다.

2년 후의 3월 6일 왕언초는 과연 또 아들을 얻었다. 이 아이는 이미 떠난 아들과 생김새가 흡사했고 정신이나 행동이 아주 똑같았다. 그가 출생한 날이 ‘꽃이 지는 시절’과 맞았다.

4. 경극 배우의 딸이 전생을 인정하다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시기 유명한 경극배우 왕요경(王瑤卿)과 왕혜방(王惠芳)은 사촌 형제간이었다. 왕요경에게는 막 시집갈 나이가 된 15세 딸이 있었는데 사춘기였다. 매번 왕혜방이 집에 가면 친척이므로 허물없이 지냈다. 이렇게 오래되자 그 딸은 왕혜방에 대해 정이 생겼고 나중에 그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맹세했다. 왕혜방은 안된다며 거절했는데 그의 딸은 그 마음을 바꾸지 않았고 마침내 우울하게 생을 마쳤다.

오래지 않아 왕요경은 꿈에 딸이 집에 돌아온 것을 보았다. 1년 후 둘째 딸을 낳았는데 생김새가 죽은 언니와 똑같았다. 이 딸은 어릴 때부터 언니 방에 머물고자 했으며 자라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언니가 생전에 썼던 화장품의 출처를 일일이 지적했고 또 사용한 기간도 알았다. 나중에 그녀는 언니가 생전에 완성하지 못한 자수를 완성했다.

당초 왕요경의 장녀는 우울증 때문에 흡연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왕요경의 부부는 그 유물을 차마 볼 수 없어 흡연 도구들을 어느 낡은 상자 속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점점 이 일을 잊어버렸다. 어느 날 집에 후(侯)씨 성을 가진 손님이 방문했는데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하며 그에게 흡연도구를 달라고 부탁했다.

왕요경은 담배를 피지 않아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때 둘째 딸이 옆에 있다가 말했다.

“제가 사용하던 흡연구가 바로 저 상자 안에 있는데 왜 후 아저씨에게 드리지 않아요?”

왕요경이 그 말에 따라 찾아보니 과연 흡연도구가 있었다. 이때부터 그 차녀는 자신의 전생의 언니가 전세(轉世)한 거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위에서 서술한 것과 유사하게 자녀의 연을 마치지 못해 다시 본가에 태어난 사례는 기나긴 중국 역사 중에 사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참고자료: 《동령속지(洞靈續志)》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7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