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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20주년원고】 공덕(公德)과 공덕(功德)

글/ 목법(沐法)

【정견망】

수련은 공덕(功德)을 중시하지만 수련인은 또 ‘공덕심(功德心)’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공덕심의 근원이 위사(爲私)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위사적인 입장과 출발점에 서서 일을 한다면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한 일 역시 바르게 하기 어렵다. 수련과정 중에서 나는 점차 ‘사덕(私德)’은 진정한 덕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것 안에는 덕이 부족하고 덕을 손상시키는 수많은 요소들이 들어있어 위타(爲他)이타(利他)하고 선타후아(先他後我)한 정각(正覺)정행(正行)과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공덕심(功德心)을 품고 공덕을 추구하면 많은 경우 원하는 대로 되지 않거나 또는 덕을 잃거나 업을 지을 수 있다. 새로운 집착과 좋지 않은 관념을 형성해 오성에 영향을 주고 설사 때로 일부 표면적인 효과는 있을지언정 사덕(私德)의 가상일 수 있다.

개인적인 이해로 ‘공덕심’은 또 일종의 근본 집착으로 아주 완고해서 자아를 강화시키며 다른 각종 집착을 유발하고 망념(妄念)을 일으키며 생명의 경계(境界)가 점차 협애하고 제한적이며 빗나가게 만들어 공(功)과 지혜를 저애하고 대법대도(大法大道)에서 점차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이런 근본 집착의 작용 하에서 만약 좋지 않은 수련상태를 초래하고 또 거기서 돌파하지 못하면 그럼 장기적으로 크고 작은 마난에 들어갈 수 있다.

“사심(私心) 문제에 관하여 내가 조금 전에 당신에게 이 이치를 말했을 때 당신들은 모두 손뼉을 치면서 마음속으로 아주 기뻐했다. 미래의 우주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내가 말했을 때 당신들은 모두 기뻐했다. 왜 이럴 수 있는지 여러분은 아는가? 어떤 사람은, 사람이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좌우명으로 삼는다. 사실 당신들은 아직 모르는데, 이 사(私)는 아주 높은 층차에까지 관통되어 있다. 과거, 수련하는 사람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하겠다.’, ‘나는 무엇을 얻겠다.’, ‘나는 수련하고 있다.’, ‘나는 성불하겠다.’, ‘나는 무엇에 도달해야 하겠다.’고 말하는데 사실 모두 그 사(私)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들이 진정으로 순정(純正)하고, 무사(無私)하여, 진정한 정법정각(正法正覺)으로 원만(圓滿)을 이루는 것인데, 그래야만 비로소 영원한 불멸에 도달할 수 있다.”(《스위스법회설법》)

“장래의 법은 원용(圓容)한 것이고 공(公)을 위하는 것으로, 우주의 근본속성이 개변됨으로써, 우주의 과정과 생명의 특징(特點)으로 하여금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했다.”(《각지설법 5》〈2004년 미국서부법회설법〉)

“사(私)를 말하자면 이 우주 중에서, 특히 인류사회 중에서 무슨 큰 문제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일체가 모두 자아(自我)에서 생겼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해보라. 이 사회 중에서, 가정은 당신의 가정이고, 일은 당신의 일이며, 당신이 번 돈, 당신이 한 일, 모든 일체가 그렇지 않은가? 이 사회를 밀고 나아가는 것 심지어 이 동력(動力)마저 이 사(私)에서 내원했다. 내가 무엇을 발명하려 하고, 내가 무엇을 좀 하려하고, 내가 어떠어떠하게 하려 한다. 그렇지 않은가? 대통령이 된 사람은, 나는 이 사회를 어떠어떠하게 잘되게 하겠다고 한다. 설령 좋은 일일지라도 모두 자아(自我)에서 나온 것으로, 속인에 대해서는 문제가 안 된다. 수련인으로서는, 당신들이 수련하려 함은 타인을 위하고 공적인 것을 위함으로, 생명은 모두 정법정각(正法正覺)의 생명으로 변해야 하는데, 이는 수련인을 가리킨다.”(《2018년 워싱턴DC설법》)

사부님 설법에서 나는 오직 ‘공을 위하는 것(爲公)’만이 비로소 완전하게 우주특성에 동화할 수 있으며 비로소 원용할 수 있고 비로소 누락 없이 수련하고 결점을 보완할 수 있으며 비로소 불괴(不壞)불멸(不滅)할 수 있는 대법 수련자의 방향과 목표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사(私)’가 관통된 층차가 높고 깊이 묻혀 있기 때문에 세간 표면에 있는 사람은 미혹과 교란이 충만한 이런 공간 속에서 생활하고 수련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사(私)를 식별하고 그것을 제거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사(私)와 대립된 ‘공(公)’은 생명이 생겨난 초기 사(私)가 존재하기 전부터 줄곧 존재해왔으며 또 진선인(真善忍)의 체현으로 층차가 더욱 높다.

그러므로 나는 공(公)이야말로 효과적으로 사를 해체하고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공덕(公德)이 많아지면 사덕(私德)이 줄어들고, 공덕심(公德心)이 많아지면 공덕심(功德心)이 적어진다. 그렇다면 사(私)는 마치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아픈 이를 뽑는 것처럼 반나절이나 때리고 비틀어 많은 피를 내거나 큰 마난을 겪고 나서야 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 남을 위하고 공을 위하는(爲他爲公) 정기(正氣)를 만나기만 하면 한번 흔들기만 해도 뺄 수 있다.

당문화 습성은 사(私)의 두드러진 표현이지만, 중국 전통의 신전문화(神傳文化)에서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란 보편적 가치를 제창했다. 수련인이 표면상에서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는 행동거지에서 이런 속인 사회의 도덕규범에 부합하면 누구나 인정하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전통적이고 정상적인 속인사회 속에서 존경을 받을 수 있다. 동시에 수련의 각 방면에서 만약 층층의 표준에 도달해 줄곧 고층까지 관통할 수 있다면 그럼 사(私)를 와해시키고 각층을 원용하는데 도달할 수 있다.

공을 위함(爲公)은 심성이 제고하는 것으로 수련인에 대해 말하자면 바로 功을 얻는 것이다. 속인 중에서 생활하고 수련하면서 ‘공덕(公德)’은 또 비교적 직관적이고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늘 자신을 일깨우고 효과적으로 실천하기에 편리하다.

종종 우리는 법을 실증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도 모르게 자아를 실증하고 업무에 빠지거나 질투나 쟁투에 빠져들고 심지어 명리(名利)를 도모하고 정(情)을 탐하며 욕망에 빠지는데 이런 때는 아마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았든 어느 정도 ‘공덕심(功德心)’이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 구도를 많이 생각해 ‘공(公)’이 움직이게 한다면 자연히 자아의 실증에서 벗어날 수 있고 공리(功利)와 안일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또 자신이 법을 실증하는 길에 사로와 지혜를 열 수 있다.

학생이 공부를 잘하면 자연히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수련인이 공덕(公德)과 위공거사(爲公去私 공적인 것을 위하고 사적인 것을 제거)에 주의하고 해도 구하지 않는 가운데 3가지 일을 잘한다면 그럼 공덕(功德)과 원만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일체가 모두 자연히 갖춰질 것이다.

때로 표면관념상 공덕(公德)은 마치 속인의 층면에 국한되어 있어서 수련인에 대해 말하자면 아주 쉽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념을 사용해 이성으로 대할 때면 꼭 그렇지 않으며 또 꼭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발견한다. 설령 대부분 고의로 위배하진 않는다 해도 자신의 행동거지에서 공덕(公德)을 소홀히 하고 주의하지 않거나 또 이런 습관 아래에서 끊임없이 수많은 무의식적인 행동을 한다면, 세인이 대법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게 만들 수 있다.

게다가 공(公)과 덕(德)은 표면적인 협의의 ‘예(禮)’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그 넓은 범위와 깊이는 법(法) 속에 여러 차례 알려주신 적이 있다. 타인을 위해 고려하고 사회영향을 고려하며 대법을 위해 책임지는 것은 모두 공(公)과 덕성(德性)의 체현이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보다 많은 생명이 대법에 가까이 다가와 대법에 들어올 수 있다.

“션윈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사람을 구함에 있어 아주 큰 작용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려면, 그럼 반드시 각 방면에서 앞서가는 표준에 도달해야 하고, 기술상에서 모두 특출한 점이 있어야 하며, 다른 사람이 하지 못했거나 해낼 수 없는 것이어야만 한다. 여러 방면에서 모두 다른 사람보다 높아야만, 더욱 좋은 작용을 발휘할 수 있고, 대량으로 관중을 끌어들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형식에 치우친다면 무슨 작용을 발휘할 수 없다.”(《2019년 뉴욕법회설법》)

이 말씀은 나로 하여금 보다 효과적으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수련자는 각 방면에서, 각종 크고 작은 일과 항목에서 모두 속인의 표준을 뛰어넘어 더욱 잘하고 더더욱 잘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했다.

이상은 층차에 한계가 있으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여러분들의 질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2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