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목목(木木)
【정견망】
《고승전》에 따르면 석법현(釋法顯)은 원래 공(龔)씨로 산서성 평양(平陽) 무양(武陽) 사람이다. 법현의 세 형이 모두 7·8세의 어린 나이에 죽자 아버지가 법현에게도 재앙이 미칠까 두려워, 세 살 때 승적(僧籍)에 올려 사미(沙彌)로 만들었다.
하지만 나이가 아직 너무 어려서 집에 머물렀는데 병이 위독해져 곧 죽을 것 같았다. 이에 부모가 급히 사찰로 보내니 놀랍게도 이틀 만에 병이 나았다. 이때부터 법현은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만나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다.
열 살 때 부친상을 당했다. 숙부가 그의 모친이 늙고 외로워 독립하기 힘들다고 생각해 억지로 그를 환속시키려 했다.
그러자 법현이 말했다.
“저는 본래 아버님이 계셨기 때문에 출가한 게 아닙니다. 다만 티끌과도 같은 속세를 멀리 떠나고자 수행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에 숙부도 그 말을 옳게 여기고 곧 그만두었다. 얼마 후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법현은 장례를 마치고 곧바로 절로 다시 돌아왔다.
법현이 일찍이 같이 수행하던 동료 수십 명과 논에서 벼를 수확하고 있었다. 그 때 일부 굶주린 도적들이 그 곡식을 탈취하려고 하자 다른 사미들은 다 달아났고 법현만이 홀로 남아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만약 곡식을 원한다면 뜻대로 가져가도 좋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전생에 보시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생에 이렇게 배고프고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또 남의 것을 빼앗는다면 내세에는 배고픔과 가난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빈도(貧道)는 다만 이것이 걱정될 따름입니다.”
굶주린 이들이 이 말을 듣고는 모두 곡식을 내려놓고 떠났다. 수백 명의 여러 승려들이 모두 법현에게 탄복했다.
성장해서 구족계를 받고 정식 비구가 된 후 법현은 늘 불경과 율장이 어긋나고 빠진 것을 개탄해 맹세코 경전을 찾아오리라 마음먹었다.
이에 동진(東晉) 융안(隆安) 3년(399) 같이 공부하던 혜경(慧景)·도정(道整)·혜응(慧應)·혜외(慧嵬) 등과 함께 장안(長安)을 출발해 서쪽으로 고비사막을 건넜다.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땅에는 뛰어다니는 짐승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득히 넓고 끝없이 멀어서 가야 할 곳을 헤아릴 수 없었다.
가는 길에 온갖 고생을 겪으며 다른 일행들은 모두 죽고 법현 혼자만 외로이 여행을 계속했다. 마침내 험준한 산을 넘어 모두 30여 국을 두루 다닌 후 천축국(天竺國)에 이르렀다.
당시 왕사성(王舍城)과 거리가 30여 리에 절이 하나 있었다. 어두워질 무렵에 그 절을 방문하였다. 법현은 다음 날 새벽에 기사굴산(耆闍崛山)에 가려고 하였다. 그 절의 승려가 만류했다.
“길이 매우 험준하고 외집니다. 게다가 검은 사자들이 많아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그러자 법현이 말했다.
“멀리 수만 리를 건너온 것은 맹세코 영취산(靈鷲山)에 이르고자 함입니다. 목숨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숨 쉬는 것조차 보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해 동안의 정성을 들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거늘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제 아무리 험난하다 하더라도,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그를 만류할 수 없자, 두 승려를 딸려 보냈다.
법현이 산에 이르렀을 때는 땅거미 지는 저녁 무렵이었으므로, 거기서 하룻밤을 묵으려고 하였다. 따라온 두 승려는 위태로움으로 무서워하면서 법현을 버려두고 돌아갔다. 법현만 홀로 산중에 남아 향을 피우고 예배하였다. 부처님의 옛 자취에 가슴 설레며 상상의 나래를 펴, 마치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을 뵙듯이 했다.
밤이 되자 세 마리의 검은 사자가 왔다. 법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입술을 핥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법현은 경문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염불했다. 그러자 사자는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내리더니, 법현의 발 앞에 엎드렸다. 법현은 손으로 사자들을 쓰다듬으며 주문을 외웠다.
“만일 나를 해치고자 하거든, 내가 경문 외우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다오. 만일 나를 시험해 보는 것이라면, 바로 물러가는 것이 좋으리라.”
사자들은 한참 있다가 가 버렸다.
나중에 중천축국(中天竺國) 마갈제국(摩竭提國 마가다국) 아육왕탑(阿育王塔) 남쪽 천왕사(天王寺)에서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살바다율초(薩婆多律抄)》·《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 및 《방등니원경(方等泥洹經)》 등의 경전을 얻었다.
그는 이곳에서 3년간 체류하면서 범어(梵語)와 범서(梵書)를 배운 후 직접 글씨를 베껴 쓸 수 있었다. 이에 불경과 불상을 지니고, 상인(商人)들에게 의탁하여 사자국(師子國)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또 2년간 머무르면서 《장아함경(長阿含經)》·《잡아함경(雜阿含經)》·《잡장(雜藏)》 등을 얻었는데 모두 중국에는 없는 것들이다.
나중에 상인들의 배를 타고 해로를 따라 귀국했다.
법현은 귀국한 후 경성에 들어갔고 외국에서 온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를 찾아가 도량사(道場寺)에서 《마하승기율》·《방등니원경》·《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 등을 번역했는데 모두 합하면 백여 만 자에 달한다.
나중에 형주(荊州) 신사(辛寺)에서 원적했으며 향년 86세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2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