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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불 (12)

【정견망】

12. 귀국설법과 친족제도

세존께서 도(道)를 이룬 후 6년이 되자 부왕(父王 정반왕)은 아들에 대한 정이 간절해져서 하루 빨리 보고 싶어 했다. 곧 우타이(優陀夷)에게 세존을 찾아가 자신의 뜻을 전달하게 했다. 우타이는 전에 세존이 태자로 있을 때 늘 태자를 모셨던 아주 총명한 사람이다. 이번에는 정반왕의 조서를 받들고 부처님 처소에 갔다. 일단 왕의 뜻을 전달한 우타이는 세존(世尊)의 장엄한 위신(威神)을 천신(天神)들이 호위하고 성중(聖衆)들이 둘러싼 것을 보자 도를 얻을 기연이 무르익어 자신도 출가해서 법을 배워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이루고 싶다고 청했다.

부처님은 본래 기연(機緣)이 무르익기를 기다려왔기에 이번 기회에 귀국해서 설법하기로 하셨다. 첫째는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고 둘째는 도를 이루면 귀국하기로 했던 자신의 맹세를 실천하려 했던 것이다. 이에 우타이를 먼저 보내고 부왕께 부처님이 7일 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전하게 했다. 아울러 신통(神通)변화를 드러내시니 여러 대중들이 경앙(敬仰)하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우타이는 부처님의 명을 받들고 떠났는데 신족통(神足通)으로 금새 카필라 국에 도착했다. 그는 성 위 허공에서 불가사의한 각종 변화를 드러냈고 또 장편의 게송으로 부처님의 위덕을 찬송하며 자신이 겪은 일들을 설명했다. 정반왕과 신하들 및 만백성이 이 말을 듣고는 기뻐했다. 또 우타이가 부처님께 귀의하자마자 도과(道果)를 이뤄 이렇게 불가사의한 신통과 지혜가 있는 것을 보고는 처음 배운 제자가 이 정도라면 부처님은 어떠하실까? 하며 흠모하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7일이 지나자 정반왕은 진용을 엄밀하게 정돈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많은 백성들과 함께 성 밖 사십 리를 나가 세존을 영접했다. 가는 길을 모두 청결히 했고 향과 꽃, 당번으로 장엄하게 공양했다. 이윽고 천신(天神)의 호위를 받는 장육(丈六 1장 6척을 의미) 금신(金身)의 대웅세존께서 앞뒤로 천명의 성인(聖人 아라한)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위풍당당하게 국경으로 들어오셨다.

여러 가지 상서로운 조화가 가득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우러러보며 오체투지(五體投地)하게 했다. 왕과 신하들은 세존의 입성을 공손히 맞이한 후 서로 물어가며 법요(法要)를 들었고 정반왕은 곧 깨달았다.

대웅세존이 귀국해서 가르침을 널리 펴시자 온 나라가 위아래로 법(法)에 동화되었고 수많은 석종(釋種 부처님 종족)들이 모두 인과를 깊이 믿고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해 도를 얻은 자들이 숲처럼 많아졌다.

정반왕은 부처님을 모시던 천이백오십 명의 나한 제자들이 모두 고행을 위주로 하던 외도(外道) 출신이라 몸이 여위고 볼품이 없어 부처님의 풍만한 금신(金身)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을 보았다. 이에 왕족과 귀족 자제들 중에서 용모가 단정한 사람 오백 명을 뽑아 머리를 깎고 출가해서 세존을 모시게 했다.

이에 정반왕의 부처님의 동생으로 정반왕과 마하프라자파티 소생인 난다, 정반왕의 둘째 동생 백반왕(白飯王)의 아들 아난다와 조달(調達 데바닷타), 셋째 동생 곡반왕(斛飯王)의 아들 아나율(阿那律 아니룻다), 넷째 동생 감로반왕(甘露飯王)의 아들 발제(拔提 바디야), 군다나(軍荼那 킴바라), 우파리(優波離 우팔리) 등 종실의 자제와 귀족 자제들이 속세를 벗어나 도과(道果)를 구하고자 했다.

또한 부처님의 이모이자 새어머니인 마하 프라자파티(한자로는 대애도大愛道라고 함)도 출가를 요구했다. 처음에 부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자 두 번 세 번 간청한 끝에 비로소 허락을 받았다. 부처님은 여자가 출가하면 많은 폐단과 비난이 있을 것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나중에 외도들이 불법(佛法)을 파괴하기 위해 임신한 여자를 비구니로 출가시켜 불교의 청정함을 모독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그러나 도를 얻어 간고하게 수행하려던 이모의 간절함에 더해 친어머니처럼 길러준 은혜 때문에 강경하게 거절하지 못하셨고 결국은 이모의 뜻을 이루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부처님은 비구니를 위한 팔경(八敬 역주: 비구니는 비구를 공경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내용)의 계율을 정했다. 비구니들이 이 팔경법을 준수하면 정법(正法)이 창성해 오랫동안 머물 수 있다고 하셨다.

이모가 출가한 후 그녀를 따라 수많은 궁녀 및 부처님의 아내였던 야수다라 등이 잇따라 출가했고 나중에 이들 모두 아라한과를 성취했다. 이렇게 카필라 국은 부처님의 교화로 하나로 통일된 청정한 국가가 되었다.

당시 왕족들이 출가했던 성황 속에는 다양한 인연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중 몇 가지를 들어보겠다.

우선 부처님의 친동생 난다는 출가한 후 이전에 출가한 비구들을 차례차례 배알했다. 그러다 옛날에 궁궐에서 전에 하인으로 일했던 비구 앞에 서자 ‘이 자는 내 하인이었는데 어떻게 나의 예배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저하면서 절을 하지 못했다.

부처님의 그의 생각을 아시고 그에게 알려주셨다.

“난다야! 불법(佛法)이란 평등한 것으로 결코 세상의 지위나 존비(尊卑)의 구별이 없단다. 모두 부처의 제자이니 단지 출가한 선후에 따라 장유(長幼)의 순서를 정할 뿐 과거의 빈부귀천은 모두 상관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출가한 선후에 따라 장유(長幼)의 순서’를 정한다는 법이 제정되었다.

한편, 부처님의 아들 라훌라(羅哞羅)는 부처님이 출가한 이후 태어났다. 그는 야수다라 태자비가 끔찍히 아끼던 아들이었다. 야수다라가 출가하기 전 어느 날, 부처님이 목갈라나 존자에게 왕궁에 가서 부인을 이끌어주고 라훌라를 출가시켜 사미(沙彌)로 삼게 했다. 야수다라는 처음에 그를 피하며 만나주지 않았고 아들을 데리고 높은 건물 위로 피신했다. 하지만 목갈라나는 신통으로 날아올라 그녀 앞에 와서 이렇게 권했다.

“모자간의 사랑이란 때가 되면 끝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도(道)를 배워 과위를 증득하면 영원히 생과 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거듭된 권고를 통해 야수다라도 마음속으로 이치를 알았지만 자식에 대한 정이 너무 깊어서 차마 내려놓지 못했다. 이에 이미 법요(法要)를 아는 정반왕 부부까지 와서 권유했지만 여전히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시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에 제가 시집올 때 여덟 개 나라에서 초빙했지만 모두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싯다르타 태자의 재주가 뛰어난 것을 알고 그의 배필이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은혜와 사랑을 저버리고 혼자 산림에 거처합니다. 지금처럼 될 걸 알았다면 당시 왜 제게 구혼을 했습니까? 그리고 이제 또 우리 모자를 떼어놓으려 하니 이는 절대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후 이렇게 알려주셨다.

“그대는 우리의 과거 인연을 알고 있는가? 과거 생에 내가 보살도(菩薩道)를 닦으면서 그대에게 꽃을 사서 부처님께 바친 적이 있소. 당신은 꽃을 파는 대신 나와 생생세세 부부가 되기로 맹세할 것을 요구했었소. 내가 ‘나는 보살도를 닦기로 맹세했으니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보시할 수 있는데 당신이 이것을 허락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당신은 남편을 따라 보시할 것이며 절대 인색하지 않고 함께 성도(聖道)를 닦아 해탈을 구할 것을 맹세했었소. 그런데 지금 왜 이다지도 정에 집착하며 내려놓지 못하단 말이오?”

그러자 야수다라는 과거 인연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이에 아들 라훌라를 목갈라나 존자에게 맡겨 출가시키게 했다.

정반왕은 이에 귀족 자제 오십 명에게 왕손(王孫 라훌라)을 따라 출가하도록 했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에게 명령해 이들 51명의 머리를 깎기고 사리푸트라를 궤범사(軌範師 아사리 제자를 이끄는 스승)로 삼게 했다. 이들은 훗날 모두 성과(聖果)를 증득했으며 특히 라훌라는 부처님의 여러 제자들 중에서 밀행(密行) 제일이 되었다.

한편 부처님의 사촌형제였던 아나율(阿那律)과 발제(拔提) 두 사람은 모두 모친의 큰 사랑을 받던 보배 같은 아들이었다. 아나율이 출가하려고 어머니에게 허락해 달라고 하자 모친이 반대했다. 아들이 거듭 애원하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발제 엄마가 발제의 출가를 허락한다면 나도 너의 출가를 허락하겠다.”

그래서 아나율은 발제와 상의했다. 하지만 발제는 처음에 속세의 정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러다 아나율이 거듭 설득하자 “1년만 더 복을 누린 후 출가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아나율이 사람의 목숨이란 무상(無常)한 것으로 불법(佛法)을 듣기란 어렵다고 일깨워주었다.

그러자 1년에서 점차 7일로 줄어들었고 아나율도 이를 승낙했다. 이렇게 7일이 지난 후 발제가 어머니에게 출가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자 그의 어머니도 아나율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나율의 어머니가 아들의 출가를 허락하면 출가를 허락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모친의 허락을 받아 같이 출가할 수 있었다.

한번은 밤에 발제가 혼자 나무아래에 앉아 수련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즐겁구나 즐거워!”라며 큰소리로 외쳤다.

부처님이 사람을 보내 무슨 일인지 물어보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에 제가 집에 있을 때는 칼과 창을 든 시위들이 삼엄했지만, 마음속으로 늘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광야에 혼자 있어도 마음이 놓이고 피로하지도 않으며 담담해서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때문에 즐거워서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다.”

나중에 두 사람 모두 성과(聖果)를 증득했고 아나율은 부처님 제자들 중에서 천안(天眼) 제일이었다.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1/10/24/18294.html